동행 784

이영애 씨에게 (2024년 1월 9일)

저는 배우 이영애 씨를 좋아합니다. 그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름에 걸맞게 처신합니다. 이 나라에 이영애 씨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엔 세 분의 고령 환자들이 계십니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한 분들입니다. 오후 세 시가 되도록 어머니 곁에 붙어 있다 잠시 병실 근처 휴게 공간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데, '아퍼? 어디가 아퍼!' 잘못한 아이를 야단치는 듯한 큰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병실로 달려가니 4, 50대로 보이는 간호사가 젊은 동료를 옆에 두고 아흔넷 어머니에게 반말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청력이 나빠 못 들으실까봐 큰소리쳤겠지 하고 이해한다 해도 반말은 용서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엔 기가 막혀 명찰을 볼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에 다시 ..

동행 2024.01.09

노년일기 203: 생애가 끝나갈 때 (2023년 12월 29일)

아침 기도 시간에도 낮에 산책을 하다가도 눈시울이 젖습니다. 생애의 끝 언저리에서 한 해의 끝을 맞는 분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물 찬 제비 같던 어머니가 갑자기 거동을 못하게 되시고, 얼마 전만 해도 새로 나가는 데이케어센터가 재미있다고 밝게 웃으시던 이모가 요양병원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선균 씨처럼 떠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1세기 안팎의 시간을 산 뒤에 삶이 죽음으로 치환되는 시간을 거쳐 마침내 죽음과 만납니다.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육체에서 시작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된 후에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 과정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건 삶이 한창일 때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이겠지요. 삶이 한창일 때부터 감사..

동행 2023.12.29

노년일기 198: 나이 든 친구들 (2023년 12월 10일)

지난 열흘 동안 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저처럼 비사교적인 사람이 이럴 때 사교적인 사람들의 연말은 얼마나 바쁠까요? 한 그룹은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이 반의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이 마흔이 넘었으니 우리 중 가장 어린 사람도 세는 나이로 일흔이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은퇴하여, 이제 이 모임은 손자손녀를 키우며 할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손주 없이 할머니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아이들 얘기, 저세상으로 갔거나 이 세상에 있는 남편 얘기부터 대법원장 후보와 대통령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넘나듭니다. 또 한 그룹은 옛 직장의 친구들과 그들 덕에 알게 된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최근에 아들을 잃은 친구를 위로하다 각자가 겪은 상실에 대해 얘..

동행 2023.12.10

김종건 교수님... (2023년 12월 4일)

교수님,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되셨군요. 조이스가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 교수님은 부끄러운 듯 웃으시겠지요. 세계의 국가들을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 중에는 조이스의 와 를 제 나라 말로 번역한 번역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교수님 덕택에 번역본을 가진 소수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번역본을 가진 네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1988년 11월 교수님은 소설 번역본 세 권과 주해서 한 권으로 구성된 완역본을 출간하셨고, 저는 12월 말 어느 날 고려대학교의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교수님의 방은 조이스와 더블린 지도를 비롯한 자료로 가득했습니다. 철없던 저는 교수님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교수님을 놀렸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조이스가 ..

동행 2023.12.04

부여와 부여 밤 (2023년 11월 20일)

오래전 한 번 가 본 부여는 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작년에 홈마트에서 서부여농협이 생산한 밤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으로 사 들고 온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부여를 가 보지 못한 한 해가 끝나가는 어제 다시 홈마트에서 부여에서 온 밤을 샀습니다. 1킬로그램에 8,9 천원 하던 걸 6,900원에 세일 판매한다니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물망에 든 밤들은 '부여왕밤(특)'이라는 광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부여에서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게가 이상했습니다. 주부 경력이 꽤 길다 보니 웬만한 무게는 맞추는데, 그물망의 밤 무게가 1킬로가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 삼아 부엌의 꼬마 저울에 올려 놓으니 바늘이 850그램과 860그램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정량..

동행 2023.11.20

빗속의 피아노 (2023년 11월 17일)

어젯밤엔 잠자리에 들고도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습니다. 아이로부터 빗속에 '폐기물 수거 대상' 딱지를 붙인 채 버려진 피아노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가 비를 맞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트럭으로 물건을 날라주는 곳을 찾아 네 곳이나 연락했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어쩌면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없어 안 한다고 한 것인지 모릅니다. 피아노를 옮기는 데는 힘과 함께 요령이 필요한데, 전에 요령으로 피아노를 옮기던 분들이 이제 대개 고령이 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요령이 없어 들 수 없을 테니까요. 본 적도 없는 그 피아노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하얀 건반 검은 건반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음악을 죽이겠구나, 사물에도 마음이 있지 않을까, 피아노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이십 년..

동행 2023.11.17

정성의 온도 (2023년 10월 29일)

며칠 전 후배 덕에 처음 가보는 식당에 갔습니다. 편의점 2층에 있는 일식집은 평범해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빈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후배가 예약을 해둔 덕에 간신히 자리에 앉았습니다. 점심코스가 1인당 5만 원이나 한다는데 이렇게 붐비다니... 이 나라에 부자가 많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음식이 나왔습니다. 음식의 온도가 완벽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뜨거워야 할 음식이 뜨겁게 나오고 차가워야 할 음식이 차갑게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요즘은 당연한 것을 해내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을 나설 때 주인인 듯한 여자분이 "맛있게 드셨어요?" 물었습니다. "네, 온도가 완벽해서 참 좋았어요. 셰프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하고 답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기뻐하더니 저를 계단 아래 길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

동행 2023.10.29

어느 날의 노트: 입안에 말이 적고 (2023년 10월 15일)

방안 정리를 시작했는데 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 있는 책을 저쪽으로 옮기고 어쩌고 하며 책꽂이 한 칸을 간신히 비우고 나면 머리가 아파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버릴 책을 버리자고 시작한 일인데 버릴 책은 찾지 못하고 메모 쪽지 두어 장 버리는 게 고작입니다.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메모지중에 한 장이 손에 들어옵니다. 법정 스님의 책 의 78쪽과 79쪽에서 옮겨 적은 글입니다.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하루 일과를 대충 마치고 나면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다. 이 산중에는 믿음직한 몇몇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청랭한 개울 물소리를 ..

동행 2023.10.15

노년일기 194: 시장 사람들 (2023년 10월 12일)

아이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니 사는 곳이 중요하고, 저처럼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의 경우엔 생활을 영위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사는 지역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운이 좋습니다. 시장이 가까우니까요. 엊그제 시장에 가니 가끔 들르던 청과물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 아픈가... 40대 부부를 걱정했는데, 오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세 개에 천 원이라 쓰인 골판지가 꽂혀 있는 상자의 파프리카를 고르며 옆에 있는 남자 주인에게 "엊그제 문 닫았지요? 왔다가 허탕 쳤어요" 하며 웃으니 "집에 일이 좀 있었어요" 심상하게 답하고는 골판지를 집어들었습니다. '3개 1,000원'이라 쓰인 것을 쓱쓱 지우며 "지금부터 파프리카 다섯 개 천 원!' 소리치더니 골판지에도 '5개..

동행 2023.10.12

노년일기 193: 아들의 흰머리 (2023년 10월 9일)

저는 젊어서도 머리가 아주 검지 않았는데 아들의 머리는 푸른 빛이 돌 정도로 검었습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보면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받는 감동 같은 감동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들의 머리칼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검던 머리가 갈색으로 변하고 윤기가 없이 꺼칠해 보이기 일쑤입니다. 밤 새우기를 밥 먹듯 하는데다 밤낮으로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아들의 머리칼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기에 저렇게 셀까 안쓰러워한 적도 있고, 젊어서부터 멜라닌 색소가 부족했던 나 때문인가 미안한 적도 있었지만, 그가 이뤄가는 것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세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아들의 머리를 보면 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제 머리가 희어지는 걸 견디..

동행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