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7

'명절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에게 (2025년 1월 26일)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정말 그런건지 큰길이 텅 비었습니다. 설 명절 앞뒤 긴 연휴를 맞아 멀리 있는 고향이나 아는 사람 없는 타향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많아서이겠지요. 아무 데도 가지 못한(않는) 저는 방학 때 교정 같은 거리로 흩어진 걸음을 옮기며, 아 이곳에 이런 게있었구나, 짧은 발견의 여행을 즐깁니다. 설 명절에 큰 차례상을 준비해야 하거나 많은친척들을 대접해야 하는 사람들은 벌써 지쳐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명절이 지날 때까진 오도가도 못할 겁니다.  그분들에게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시,  "이니스프리 호수 섬 (The Lake Isle of Innisfree)'을 대충 번역해 선물합니다. 영어 읽기가 가능하신 분들..

동행 2025.01.26

병원에 대한 본즈 씨의 생각 (2025년 1월 23일)

본즈 씨 (Mr. Bones)는 작년에 별세한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 (Paul Auster)의 중편소설의 주인공입니다.본즈 씨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말하지 않는 것까지 읽어내는 총명한 개입니다. 그는 사랑했던 첫 주인 윌리(Willy)를 잃고우여곡절 끝에 새 가정의 일원이 되는데,네 식구 중 세 사람은 다 그를 반기지만남자 주인만은 조건을 충족할 때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조건 중 한 가지는 본즈 씨가 병원에 가서 건강한지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즈 씨는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가며 생각합니다. If you were sick enough to die, a doctorwasn't going to save you. And if you weren'tsick, wh..

오늘의 문장 2025.01.23

형용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2025년 1월 21일)

모든 단어는 기능, 의미, 형태에 따라 명사, 동사,형용사, 부사, 조사 등으로 나뉩니다. 제가 좋아하는 품사는 명사와 동사이고 좋아하지않는 품사는 형용사와 부사입니다. 형용사나 부사가 명사나 동사에 비해 사적(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처럼 고통을묘사하는 형용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들이 고통의 정도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진짜 고통과 엄살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받으며 '아프다'고 하는 것과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아프다'는 진정한공감을 모르는 둔감한 사람 같습니다.  '힘들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 태어나 예닐곱 살 때부터 병든 부모 수발을 ..

나의 이야기 2025.01.21

사고 권하는 정전 (2025년 1월 18일)

이른 아침 눈을 뜨니 저를 에워싼 정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머리맡의  다지털 라디오는검은 얼굴뿐 시간을 알려 주던 녹색 숫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거실로 나가니 거실이 산속 절집보다 조용합니다.절집엔 새소리라도 들리지만 동네 새들은 아직수면 중인가 봅니다. 충전 중이던 전화기와작은 청소기, TV와 연결된 셋톱박스 등에서 늘보이던 작은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냉장고기계음도 들리지 않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소리도 사라지나 봅니다.  우리 집 차단기가 내려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란다로 나가니 불 켜진 창문이 하나도 없고동네 전체가 낯선 정적에 휩싸여 있습니다.우리집 차단기가 내려간 게 아니고 동네 전체가정전된 게 확실합니다. 한국전력 상담 전화(국번 없이 123)로 신고하니이미 신고 전화를 여러 통 받았..

동행 2025.01.18

SK텔레콤 홍기정 님께 (2025년 1월 14일)

홍기정 님,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불쑥 편지를 보내어놀라시지 않을지... 우려를 안고 몇 자 적습니다.  SK텔레콤이 오래 쓰던 2G폰 사용을 강제 종료시킨 후그 회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홍기정 님과 통화한 후 마음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물론 기정 님은 그 회사의 수많은 직원 중 한 분이어서회사 자체와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기정 님 같은 분이 머물고 있는 회사라면 제가 모르는 장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제가 근 일년 동안 누려온 혜택이 종료되니 문의하라는 SK텔레콤의 문자를 받고 전화기의 114를 누를 때만 해도 기정 님 같은 분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상담원들 중엔 기계적 말투를 사용하고, 질문을 하면 질문에서 빗나간 답을 기계적으로 반..

동행 2025.01.14

언젠가 말하리라 (2025년 1월 4일)

몸은 동네에 묶어 두고 입을 닫고 살지만눈은 세상을 봅니다. 1980년대를 2020년대에와서 말하듯, 40년쯤 흐른 후엔 지금을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땐 제 입이 사라지고 없을 테니다른 이의 입이겠지요. 어제 선물받은 책에 눈 가는 글이 있어 옮겨둡니다.원래 제목은 ' 浪吟낭음', 즉 '아무렇게나 읊다'라고 합니다. 이 한시를 쓴 사람은 조선 전기 문신 박수량 ( 朴遂良: 1491-1554)입니다. 인용자에 따라 원문 첫머리 '口耳'가 ' 耳口'로 쓰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말하리라 벙어리에 귀 먹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두 눈만은 그대로이네.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일들은볼 수는 있지만 말할 순 없네.--박동욱, , 빅퀘스천  浪吟口耳聾啞久(구이롱아구)猶餘兩眼存(유여량안존)紛紛世上事(분분세상사)能見不能..

오늘의 문장 2025.01.04

새해 첫 노래: 지상의 영광은.. (2025년 1월 2일)

무지개 빛 희망으로 시작했던 2024년,회색으로 어두워지더니 검붉은 연기 속에막을 내렸습니다.  새해는 시작되었지만 지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산 자들의 몫... 새로운 것 속에서 불멸의암시를 찾는 건 영혼을 잃지 않은 자들만이할 수 있는 일...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1770-1850)의 '어린 시절 회상 속 불멸의 암시(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를읽습니다. 2The Rainbow comes and goes,and lovely is the Rose,The Moon doth with delightLook round her when the ..

동행 2025.01.02

우는 남자들 (2024년 12월 28일)

웃을 때보다 울 때 더 아름다운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그런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하는 건 웃는 모습이 우는 모습보다 보기 좋기 때문에생긴 말이겠지요.  그러다 보니 웃는 건 남들 앞에서 해도 되지만 우는 건 되도록 개인적 공간에서 하는 관습이 생겼고, 누군가의 앞에서 마음껏 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의미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공공장소에서 울어도 질시를 받지 않고 공감이나 동정을 일으키는 경우는 나라나 가족을 잃었을 때, 가족 같은 존재를 잃었을 때,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스승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처럼 매우 제한된 경우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솔로'에는 우는 얼굴이 꽤 흔합니다. 남자도 울고 여자도 우는데, 그들의 눈물이 얼마나 공감을일으키는지는 모..

동행 2024.12.28

크리스마스 케이크 (2024년 12월 24일)

오늘, 내일, 아니 매일, 케이크를 한 조각 더 먹을까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쉘 실버스틴 (Shel Silverstein)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명쾌한 답을 내놓습니다. 게다가 시(詩)의 형태로! 아래의 시는 '파이'에 대한 고민을 다루지만, 케이크에대한 고민의 해결책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즐겁고 맛있는 크리스마스 보내세요!즐겁고 맛있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Pie Problem If I eat one more piece of pie, I'll die!If I can't have one more piece of pie, I'll die!So since it's all decided I must die,I might a..

동행 2024.12.24

악귀야, 물렀거라: 동지 팥호박죽 (2024년 12월 20일)

내일은 동지, 24절기 중 22번 째 절기입니다.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음기가 극에 달하며 양기가 생겨나는 때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동지에 양색인 붉은 색 팥으로 죽을 쑤어 먹음으로써 음귀를 쫓았다고 하지요. 올해는 팥의 작황이 매우 나빠 값이 엄청 비쌉니다.팥만으로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은 부자들에게나가능할 테고, 저는 가을 끝에 사 두었던 늙은호박을 주로 하고 팥은 다만 곁들여 죽을 쑵니다.본래는 찹쌀 경단으로 만든 새알심을 넣어야 하지만찹쌀 가루가 없으니 며칠 전 세일할 때 샀던 밤을 삶아 새알심을 삼습니다. 요즘 이 나라엔 무속 신앙이 판을 칩니다.대통령 부부 주변에도 역술인 천공과 건진법사가있고,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용한 점쟁이'와'새해 운세' 얘기를 하는..

동행 202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