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김종건 교수님... (2023년 12월 4일)

divicom 2023. 12. 4. 18:51

교수님,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되셨군요.

조이스가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

교수님은 부끄러운 듯 웃으시겠지요. 

 

세계의 국가들을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 중에는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와 <피네간의 경야

(Finnegans Wake)>를 제 나라 말로 번역한 번역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교수님 덕택에 <율리시즈> 번역본을

가진 소수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피네간의 경야>

번역본을 가진 네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1988년 11월 교수님은 소설 번역본 세 권과 

주해서 한 권으로 구성된 <율리시즈> 완역본을 

출간하셨고, 저는 12월 말 어느 날 고려대학교의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교수님의 방은 조이스와 더블린 지도를 비롯한

자료로 가득했습니다. 철없던 저는 교수님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교수님을 놀렸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조이스가 던진 수수께끼를 푸느라

애쓰셨으니 '조이스의 사도'라고, '조이스의 사도'로

사신 게 후회되시진 않느냐고.

 

교수님은 특유의 부드럽고도 수줍어 하시는 듯한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지요. 자신은 조이스의  사도가

맞다고. 조이스의 사도로 산 걸 후회한 적은 없다고.

그러면서 <율리시즈> 원서 초판본 서두에 쓰인 

조이스의 글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I've put in so many enigmas and puzzles

that it will keep the professors busy for centuries

arguing over what I meant.(내가 이 책에 수수께끼를

잔뜩 넣어 놓았으니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교수들은

내가 무슨 뜻으로 썼는지를 놓고 설전을 벌일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만 12년 동안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하면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교수님과의 인터뷰는

정말 재미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님처럼

지적으로 뛰어나신 분이 자신을 내세우시긴커녕

조이스라는 걸출한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니... 교수님의 겸손 앞에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교수님 인터뷰 기사는 1989년

1월 7일 자 코리아타임스에 실렸습니다. 기자로서는

인정받았으나 인간으로서는 뒷걸음질을 쳤다는 자각으로, 

제가 만 12년 동안의 코리아타임스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3일째 되던 날이지요. 

 

기자 아닌 독자로서 집에서 교수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는 교수님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릇이지만, 교수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얼마 있다가 뵌 적도 없는 정한숙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정 선생님의 소설 <끊어진 다리>를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해 영역(英譯)하기로 

했으니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니, 김종건 교수님의 은사이시며 자신의 절친인

영문학자 조성식 선생님이 교수님 인터뷰 기사를 보시고

꼭 제게 맡기라고 했다고 하셨습니다. 소설을 한 번도

영역해 본 적이 없어 극구 거절했지만, 정 선생님은 제가

하지 않으면 아예 영역서를 내지 않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미천한 실력으로 그 소설을 영역했고,

그 책은 <Bridg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교수님,

정한숙 교수님은 1997년에, 조성식 교수님은  2009년에

떠나시고, 이제 교수님마저 떠나시네요.

맑고 곧고 실력 높으신 선생님들 모두 이곳을 버리시니 

이곳은 점점 탁하고 천하여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갑니다. 

 

교수님, 

그때 주신 <율리시즈>를 아직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그리고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지만, 

교수님이 걸으신 평생의 여정을 생각하며 읽어야겠습니다.

 

교수님, 김종건 교수님,

이 나라에 와 주시고 저를 만나 주셔서 허리 굽혀 감사드립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부디 자유와 평안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