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57

노년일기 232: 문방구가 있던 자리 (2024년 10월 4일)

나이가 들수록 삶이 가벼워집니다. 제가 어른 행세를  하며 사회생활을 할 때 제 안에 숨죽이고 있던 아이가 기지개를 펴더니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고 저 하늘 좀 봐,저 구름 좀 봐, 합니다.  오늘은 제게 천사가 되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이 '천사' 데이라는 겁니다. 오늘 날짜를 숫자로 쓰면 '1004'!젊은이라면 천사와의 만남을 꿈꾸겠지만, 나이 든 사람은 누군가의 천사가 될 궁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 안의 아이 덕에 노인치고는 제법 자주 문방구를들락거렸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문방구 세 곳이 있는데,둘은 제법 크고 초등학교 초입에 있는 하나는 그 학교 아이들의준비물에 특화된 조그만 가게입니다. 제 안의 아이가 좋아하는 곳은 당연히 다양한 물건이 있는두 곳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카드 몇 ..

동행 11:17:22

노년일기 231: 포옹 남녀 (2024년 9월 30일)

일요일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네 카페들은 대개 교회와성당을 다녀온 사람들이 뒤풀이하는 장소로 쓰이니까요.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래도그리로 갔습니다. 교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한 두 청춘남녀는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빈자리라고는 그 남녀의옆 테이블뿐이라 거기에 앉았습니다. 보려 하지 않아도 그들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로 유명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말처럼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두 사람은 테이블 한편의 두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코감기에 걸린 듯한 남자는 연신..

동행 2024.09.30

운수 좋은 날 (2024년 9월 22일)

남녘의 비는 행패를 부렸지만 서울의 비는 대지를 식혀 어제는 오랜만에 살 만했습니다. 회색 하늘 아래를 걸어 좋아하는 카페에 갔습니다. 더구나 어제 근무하는 바리스타는 기복 없이 늘 맛좋은 커피를 만듭니다.  저처럼 비를 반가워한 사람이 많았는지 카페엔손님이 많았습니다. 비어 있는 테이블은 오직 하나.왼쪽 작은 방에 이어져 놓인 4인석 테이블 두 개 중 안쪽 테이블엔 젊은 여성 넷이 앉아 있고 바깥 테이블만비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잠깐 망설였지만, 제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걸 다행스러워 하며 웃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니 그냥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옆 테이블 여성 중 한 사람의 짐이 제 의자 옆 의자에놓여 있었습니다.  빈 테이블의 빈 의자에 짐을 놓는 일은 흔하지만 누군가 그 자..

동행 2024.09.22

노년일기 230: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19금)(2024년 9월 20일)

'나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적은 나를 강화시킨다'는 말이있지만, 이 말은 더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더위는 저를 죽이지 못했을 뿐, 저를 무기력하게 하고약화시켜 시간을 닝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케이블텔레비전에서 해 주는무료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는 호주 감독 소피 하이드 (Sophie Hyde)가 2022년에 발표한 '19금'로맨틱 코미디로, 영국이 자랑하는 배우 엠마 톰슨 (Emma Thompson)과  그녀보다 34세 어린 아일랜드 배우 다릴 맥코맥(Daryl McCormack)이 주연합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하는 전직 윤리 교사 낸시는 2년 전 남편과사별하고 홀로 사는..

동행 2024.09.20

영화를 지우는 나라 (2024년 9월 17일)

'추석'이라는 말 속의 '저녁 夕' 때문일까요?오늘 아침은 저녁 무렵 같습니다.구름에 가리었어도 보름달 님은 저 하늘에 계실 테니기도가 자꾸 길어집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무지를 덜어 주시고 무명(無明)을 깨뜨려 주소서! 명절 전야 TV도 볼 것 없기는 평소와 진배없었습니다.낯설고 낯익은 연예인들이 먹고 떠드는 화면을 피해 옛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며칠 전엔 '빠삐용'과 '백 투 더 퓨쳐'가반가웠습니다. 조폭들의 총질이 난무하지 않는 영화들을 보며눈물을 훔치고 박장대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옛 명화는 여전히 명화인데, 보다 보니 짜증이 났습니다. 대사가 지워지고 장면이 지워졌습니다. 저 영화를 만든감독들이 제 옆에 앉아 TV에 나오는 자신의 영화를 보았으면정부인지 누구..

동행 2024.09.17

지구: 플래닛 아쿠아 (2024년 9월 15일)

배달 오토바이들이 도시 곳곳을 누빕니다.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사람이 많다 보니 직장 생활을하기보다  배달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이가 많다고 합니다. 대개 꽉 짜인 일과를 보내야 하는 직장 생활에 비해 배달 일은근무 시간이 자유롭고 수입도 짭짤하다고 합니다.물론 오토바이 사고가 나면 큰일이지만, 사람들은 '은사 망상'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에겐 사고가 나도자신에겐 사고가 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배달 공화국'답게 이 나라 TV에 나오는 밥상 위엔 그릇들 대신 배달 음식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들이 놓여 있습니다. 소상공인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배달료를 보조해 주는 이 나라에서는, 환경단체나 정부도  배달 음식이나 배달 음식용 플라스틱 용기에 환경분담금을 부과해야 한다거나 다회용 용기를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

동행 2024.09.15

'광복'은 멀어라... (2024년 8월 15일)

광복절 아침, 태극기를 걸며 생각합니다.일제에 빼앗겼던 주권은 79년 전에 도로 찾았지만이 나라는 아직 '광복'하지 못했구나. 한국의 근세사가 정치를 벗어나 학문적 논쟁을 통해진실에 수렴되는 것을 언젠간 볼 수 있을까... 일제를 벗어난 후 한동안은 주권을 가진 사람들답게살려 하더니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다시 식민이되고 싶어 안달하는 나라.  국어는 못해도 영어만잘하면 된다고 혀 짧은 어린이들에게 영어 단어를외우게 하는 나라... 왜 일본의 식민이 되면 안되고영어의 식민이 되는 건 괜찮은 걸까요? 며칠 전 우연히 전에 경향신문에 실렸던 영어유치원,아니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 일했던 전직 영어 강사들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https://www.khan.co.kr/national/education/ar..

동행 2024.08.15

중요한 것은 (2024년 8월 6일)

살아가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을 때 삶에서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은드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순간은 대개 삶이 자신을 시험할 때입니다. 일러스트 포잇 (illust-poet) 김수자 씨는 늘 무엇이 이득인가보다 무엇이 중요한가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유명한 병을 만나 생각이 더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혈액암으로 조혈모세포이식까지 받고 잠~시편히 살던 제 아우... 다시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육신이 힘들 때조차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언니 같은 동생의 건투를 응원하며, 그가 자신의블로그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 올린 그림과 글을옮겨둡니다. 인용된 시 아래 글은 김수자 씨의 글입니다.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그의 블로그로 연결됩니다.https://bl..

동행 2024.08.06

고추의 배신 (2024년 8월 4일)

물론 제 탓입니다. 이름을 믿은 저의 탓이지요.대통령을 믿었다가 속았다는 사람도 있고국회의원을 믿었다가 당했다는 사람도 있고친구를 믿었다가 발등을 찍혔다는 사람도 있지만,저는 아직 이름을 믿었는데, 그러다 아주 뜨거운맛을 보았습니다. 지금껏 먹어 본 '오이맛 고추'는 이름 대로오이맛이었기에 이번에도 의심 없이 사 들고  왔는데 고추가 담긴 봉지에서 매운 향기가 나니이상했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몇 개 자르려니 기침이 나왔습니다.  더운 날 불을 쓰는 반찬은 만들기 힘드니찬물에 씻어 쌈장에 찍어 먹으려 했는데소박한 계획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잘게 잘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된장찌개 끓일 때나써야겠구나 생각하고 고추를 자르는데 손끝이얼얼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씻으며 고추를 자르..

동행 2024.08.04

신유빈 선생 추앙 (2024년 8월 2일)

스승에게는 나이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갓 스물의 탁구선수를 스승으로 부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어제 TV 생중계로 신유빈이숙적 히라노 미우를 꺾는 것을 보고는 그를 선생이라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신유빈 선수가 제 스승이 된 것은 1시간 20분 접전 끝에아주 힘겹게 승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빈 씨가 패했다고 해도 저는 그를 스승이라 불렀을 겁니다. 신유빈 선수가 스승이 된 이유는 무엇보다 그를그답게 만드는 천진함, 진력 (盡力), 자제력, 그리고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이루는 품격 때문입니다.  신유빈은 어제 파리 올림픽 탁구 여자 단식 8강전에서히라노 미우와 만나 세 게임을 계속 이겼습니다.신유빈이 네 번 이기면 경기가 끝나게 되니 히라노는매우 불안했을 겁니다. 그는 옷이 땀..

동행 202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