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04

노년일기 247: 그때와 지금 (2025년 1월 30일)

지나간 시간 중 언제를 '그때'라 부르든,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다릅니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참 많은 일을 합니다. 저 개인으로 보면 짙은 갈색머리가 희게 변했고얼굴엔 주름, 손등엔 검버섯이 생겼습니다.허리와 다리는 굵어졌고 눈은 더 나빠졌고, 이는 삐뚤빼뚤해졌습니다. 웃음은 많아졌고 화내는 일은 줄었습니다.  책상이나 집 같은 무생물도 시간이 흐르며변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살아있는 것들의변화는 훨씬 더 두드러집니다. 윤동주 (1917-1945)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했던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평생을 포함하는 시간을 아일랜드에서 산 시인 제임스 스티븐스 (James Stephens: 1882-1950)는나뭇잎을 빌어 시간의 횡포를 고발했습니다. 대충 번역해..

나의 이야기 2025.01.30

노년일기 246: 기도에서 사라진 사람 (2025년 1월 17일)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기도 매트 위에무릎을 꿇으면 늘 울컥, 감정이 일어납니다.꿈이 현실이 되지 못할 때 하는 것이 기도이니그렇겠지요... 저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신, 그러나 이제이곳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의 자유와 평안을위해 기도한 후,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지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데  필요하고, 용기는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하니까요. 그다음엔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십사고  기도하고, 재해와 전쟁을그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게 해 주십사고기도하고, 양심적으로 ..

나의 이야기 2025.01.17

노년일기 245: 제사의 효용 (2025년 1월 11일)

1월은 언제나 9일을 기준으로 나뉩니다.9일 이전에는 외출을 삼가며 건강을 지키려 애쓰고9일 이후 며칠은 할 일을 미뤄두고 쉬며 지냅니다.9일이 무슨 날이냐고요? 9일은 제삿날입니다. 룸메의 부모님과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날입니다.아버님은 제가 뵙기 전에 돌아가셔서 모습과 인품을들은 얘기로만 짐작하지만, 어머님은 저와 함께 사신 적이 있어 더욱 그립습니다.  인간이 2,30대에 70대의 1년쯤을 미리 경험해 볼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자식이 훨씬 많아질 거고, 저도 어머님과 함께하던 시간 동안 어머님의 몸과 마음 상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노년을 미리 경험할 수는 없으니젊은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인을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행 2025.01.11

노년일기 244: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5년 1월 8일)

새해 초엔 늘 시를 읽게 됩니다.시로써 머릿속을 씻고 정리하고 새 마음으로 새해 살이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단골 카페에서 류시화 씨가 엮은 시집을보다가 낯익은 시를 발견했습니다.제 졸저 에 인용했던'인생을 다시 산다면'이었습니다. 그 시는 오랫동안 나딘 스테어 (Nadine Stair)의시로 알려져 왔는데, 사실은 나딘 스트레인(Nadine Strain)이 쓴 에세이에 나온 것입니다.저는 에 그 사실을 적고, 그 글이 1978년 미국의 여성 잡지 (Family Circle)>에 실리는 과정에서 작가 이름이 잘못 기재되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 시가 여전히 나딘 스테어의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제가 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도 나딘 스테어의 시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은 수십 쇄..

동행 2025.01.08

노년일기 243: 화는 천천히 (2025년 1월 6일)

늙는다는 건 한마디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겁니다.에너지가 줄어드니 많은 일을 하거나 신경 쓸 수가없습니다.  늘 하던 일만 하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지만,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거나 그런 일에 신경을써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날카로운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그 일에 대해말하면 곱게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금세 격앙되어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이 나라가 초고령국가가 되며 화내는 노인이 많아지는 건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화내는 건 가난한 사람이돈 쓰듯 해야 합니다. 화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화를 내고 나면, 감정에 휘둘려 돈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돈을 쓴 가난뱅이처럼 반드시 후회하게 되니까요. 새해 목표를 화내지 않는 것으로 정한 분들에게린다 엘리스(Lind..

동행 2025.01.06

노년일기 242: 그가 떠난 후에도 (2024년 12월 16일)

가끔 꿈이 깨달음을 줄 때가 있습니다.엊그제 꿈은 죽음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죽는 사람, 오로지 그 한 사람의 것이라고얘기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 죽음의방식 또한 그 사람만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채운 상자의 뚜껑을 닫는 것. 삶이 그 사람만의것이듯 죽음 또한 그만의 것이겠지요. 누군가 이곳에서 떠났을 때 그와의 이별과 그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부재(不在)를이유로 자신의 나날을 낭비하는 것은 자신의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의 의미에도 부합하는 게 아닐 겁니다. 2024년의 끄트머리에서 돌아보니 참 많은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2월에떠나셨고 4월엔 사촌동생 이정자와 팀북투>의 작가 폴 오스터(Paul Aus..

동행 2024.12.16

노년일기 241: 과장된 슬픔 (2024년 12월 10일)

한국 소설이든 영미 소설이든 소설을 읽을 땐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사전을 찾지 않습니다. 단어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 두긴 합니다.그래야 나중에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부인>을 읽다가, 91쪽에서 lugubriously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단어인데, 무슨 뜻일까 하며 적어 두었습니다. 저녁에 책상에 앉아 사전을 찾아보려는데 메모 하나가 보였습니다. 11월 1일, 같은 작가의 (등대로)>를 읽으며 적어 둔 단어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보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적어 둔 lugubriously에서 'ly'를 뗀 형용사 lugubrious였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11월 1일에 본 단어를 오늘 아침40일 만에 다시 만났는데, 처음..

나의 이야기 2024.12.10

노년일기 240: 노화에 대한 보상 (2024년 12월 8일)

나이가 들어가며 실수가 잦아집니다.어딘가에 부딪혀 다치고 뭔가를 떨어뜨리고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놓치는가 하면 티비에서 나오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늙어간다는 건 바보가 되어가는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데 그런 실수는 젊어서도 하지 않았던가자문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노인' 칭호를 듣는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나이 탓으로 돌리기일쑤입니다. 힘은 빠지고 아픈 곳은 많아지고 정신은 멍해지고...이 모든 부정적 노화 증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보상이 있긴 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에서 피터 월쉬의입을 빌어 보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보상은 바로자신의 경험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 봄으로써 '존재자체만으로  충분'하여, '타인이 필요치..

동행 2024.12.08

노년일기 239: 엄마의 속옷 (2024년 12월 1일)

동네 밖 외출을 거의 하지 않지만, 할 때는 어머니의옷이나 모자를 착용합니다. 그러면 지난 2월 돌아가신어머니와 동행하는 것 같으니까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날엔 어머니가 입으시던 속옷을입었습니다. 늘어난 목 부분을 어머니가 군데군데꿰매어 줄이신 걸 보니 괘 오래 입으셨던 옷입니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승에서 함께했던 시간, 어머니는 부드러움이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세상으로 가시고 나니 그때 알아채지못하고 흘려보낸 따스함이 새록새록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빨아 널며보니 옆구리에 꽤 큰 구멍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저처럼 그 구멍의 존재를 모르고 무심히 입으셨던걸까요? 아니면 그 구멍을 발견하셨을 ..

나의 이야기 2024.12.01

노년일기 238: 눈과 바람의 날개 (2024년 11월 26일)

여름이 떠나지 않는다고 단풍이 들지 않는다고끌탕했는데, 11월 말에 찾아온 추위가 산을물들이고 도시의 보도를 낙엽으로 덮었습니다. 오늘 새벽엔 비 내려 대지를 식히더니 거센 바람이짧았던 가을의 흔적을 지웁니다. 자연의 순환앞에서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는 맹수 앞의토끼 꼴입니다. 소설가 공지영 씨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단편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 할머니를 묘사했지만,소설 밖 할머니들은 결국 다 죽습니다. 올여름처럼오래 지지부진 지속되는 생生이 있을 뿐이지요. 요양원 등 장기요양시설에 머무는 노인의 87퍼센트가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해 살아서 잊힌 노인들이떠오릅니다.  지금 창밖에서 우는 북풍아, 내일 새벽 내릴 눈아, 살아서 죽은 노인들에게도 그대들 ..

동행 202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