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0

노년일기 232: 문방구가 있던 자리 (2024년 10월 4일)

나이가 들수록 삶이 가벼워집니다. 제가 어른 행세를  하며 사회생활을 할 때 제 안에 숨죽이고 있던 아이가 기지개를 펴더니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고 저 하늘 좀 봐,저 구름 좀 봐, 합니다.  오늘은 제게 천사가 되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이 '천사' 데이라는 겁니다. 오늘 날짜를 숫자로 쓰면 '1004'!젊은이라면 천사와의 만남을 꿈꾸겠지만, 나이 든 사람은 누군가의 천사가 될 궁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 안의 아이 덕에 노인치고는 제법 자주 문방구를들락거렸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문방구 세 곳이 있는데,둘은 제법 크고 초등학교 초입에 있는 하나는 그 학교 아이들의준비물에 특화된 조그만 가게입니다. 제 안의 아이가 좋아하는 곳은 당연히 다양한 물건이 있는두 곳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카드 몇 ..

동행 11:17:22

노년일기 231: 포옹 남녀 (2024년 9월 30일)

일요일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네 카페들은 대개 교회와성당을 다녀온 사람들이 뒤풀이하는 장소로 쓰이니까요.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래도그리로 갔습니다. 교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한 두 청춘남녀는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빈자리라고는 그 남녀의옆 테이블뿐이라 거기에 앉았습니다. 보려 하지 않아도 그들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로 유명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말처럼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두 사람은 테이블 한편의 두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코감기에 걸린 듯한 남자는 연신..

동행 2024.09.30

노년일기 230: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19금)(2024년 9월 20일)

'나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적은 나를 강화시킨다'는 말이있지만, 이 말은 더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더위는 저를 죽이지 못했을 뿐, 저를 무기력하게 하고약화시켜 시간을 닝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케이블텔레비전에서 해 주는무료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는 호주 감독 소피 하이드 (Sophie Hyde)가 2022년에 발표한 '19금'로맨틱 코미디로, 영국이 자랑하는 배우 엠마 톰슨 (Emma Thompson)과  그녀보다 34세 어린 아일랜드 배우 다릴 맥코맥(Daryl McCormack)이 주연합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하는 전직 윤리 교사 낸시는 2년 전 남편과사별하고 홀로 사는..

동행 2024.09.20

노년일기 229: 비님 목소리 (2024년 9월 12일)

더위 끝 빗소리가 잠을 깨웁니다.창밖에선 달구어졌던 세상이 식고 있습니다.나무, 건물, 자동차 모두 행복하게 젖습니다. 비가 자꾸 무어라 두런거립니다.어둠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이니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반가운 것들은 늘 미안해합니다.비도, 꽃도, 사람도, 가을도... 어제까지 새벽을 울리던 가을벌레들은 침묵한 채 빗소리의 변주를 듣고 있습니다. 진짜 음악가들은 압니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을. 세상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것,아이러니 때문일 겁니다.긴 더위를 식혀 주는 비가 오히려 늦게 온 것을미안해하고, 청아한 가을벌레들이 오히려 침묵하고...  공부하며 사는 사람은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책 읽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나쁜 부모가 자..

나의 이야기 2024.09.12

노년일기 228: 공원에서 우는 사람 (2024년 9월 6일)

어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9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들른 아버지의 방, 방은 그대로인데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진이 되어 맞아주시니아이가 되어 엉엉 울었습니다. 할아버지를 그리는 아이와 다시부모님 사시던 동네를 찾았습니다.골목마다 지난 2월 돌아가신 어머니의발자국이니 걸을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도저히 그 얼굴로 부모님 방에 들 수가 없어아이만 들여보내고 집 앞 꼬마공원에머물렀습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연락도 없이 찾던 공원, 언젠가 어머니를 발견했던 오른쪽 한갓진 곳으로 가 보았지만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 엄마... 제 안의 아이가 소리내어 울며 공원을 헤매었지만 어머니를 찾을 수는없었습니다. 저만치 서너 사람이 흘깃거리는것을 보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나의 이야기 2024.09.06

노년일기 226: 늙은 애인 (2024년 8월 25일)

저의 노화도 낯설 때가 있지만 애인의 노화는더더욱 낯섭니다. 때로는 처음 보는 노인 같을때도 있습니다. 누구세요?  제 안에서 생겨나는 물음표들이 그의 안에서도생겨날 겁니다. 가끔 그가 낯선 눈으로 저를 보며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바로 그래서일 겁니다.  그와 제가 이렇게 바래가면서도 우리로 남아 있는 건우리 안에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겠지요.그건 아마도 우리를 우리로 만든 시선일 겁니다.  1976년 어느 봄날 처음 주고받았던  그 시선...우리의 세상이 나뉜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남아 있을 그 시선... 그 늙지 않는 시선! 아이고...

나의 이야기 2024.08.25

노년일기 225: 버섯 농사 (2024년 8월 18일)

한국에는 약 1,900여 종의 버섯이 서식하는데그중 400여 가지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식용버섯은 대개 색깔이 화려하지 않고세로로 잘 찢어지며 벌레가 먹은 것들이라고합니다.  저는 버섯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지만 언제부턴가버섯을 키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버섯은 얼굴,손등, 팔 등 아무 곳에서나 자라는데, 그 시작은 대개 핑크와 자주를 섞어 찍은 마침표 같은 점입니다. 점은 며칠 지나면 연갈색이 됩니다. 핑크자주 점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흐르다 지친 피로구나, 나는 사느라 지치고내 몸의 피는 흐르다 지치는구나, 검버섯은피의 무덤이구나, 검버섯이 자꾸 생가다보면내 몸이 나의 무덤이 되겠구나...  그러다 또 생각했습니다. 표고버섯,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먹을 줄만알고 키울 줄은 몰랐더니..

나의 이야기 2024.08.18

노년일기 224: 내 인생은 초과 달성 (2024년 8월 12일)

제가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살 거라고는 감히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저의 스승이셨고 뛰어나신 분이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은 '초과 달성'의 인생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끼니를걱정하며 살았기에 하루 세 끼만 거르지 않고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세 끼는 물론 다섯 끼도 먹을 수 있으니 초과 달성이 아니냐?"며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저도 초과 달성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겸연쩍지만 감사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에 끼니를 걱정하지않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두 분이 받고 싶어했으나받지 못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생각하신 '성공'과 제가 꿈꾼  성공 또한 매우달랐습니다.  저..

나의 이야기 2024.08.12

노년일기 223: 노인은 반성 중 (2024년 8월 9일)

십 대 때는 제가 70세가 될 때까지 살 거라고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래 모습은 아예 그려지지않았고 억지로 그리면 마흔 언저리가 고작이었습니다. 마흔 넘어 쉰을 거치면서는 '나이 들수록 훌륭한 사람이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현실은 다릅니다.나이가 쌓이는 만큼 목표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제가 매일 반성(反省)하는 이유입니다. 반성은 '자신의 언행에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겐 그런대로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했지만, 가족에겐 냉정하고 공감보다 비판을  앞세우기 일쑤였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들과 저를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이었습니다.  큰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 중엔 큰 자동차가 자신인 양'자아 확대'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저는..

나의 이야기 2024.08.09

노년일기 222: 닮은 사람 (2024년 7월 13일)

올 여름 매미는 지난 여름 매미보다 며칠 일찍왔습니다. 5일 전쯤엔 참매미가 매앰, 맴 우는 소리가선물처럼 반갑더니 그 다음 날엔 말매미가 스~~미소를 자아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매미라 하고 작년에 왔던 매미가 돌아왔다고 하지만, 겉모습이 닮았을 뿐 이 여름의 매미는 지난 여름의 매미가 아닙니다. 언젠가 이 세상엔 아주 닮은 사람들이 셋씩 있다는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저와 닮은 사람 둘이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지요. 대학 시절 음악대학에저와 꼭 닮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그 사람을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그후 20여 년 지난 후 오랜 친구가 저와 닮은사람이 있다며 그이와 저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그이와 제가 어느 부분 닮았는지 꼭집어 말할 수는없었지만, 그는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의 손..

동행 2024.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