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40

노년일기 284: 엄마의 금융 교육 (2026년 4월 29일)

오랜만에 온 가족이 동네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일종의 가족 기념일이라 가족 누구도 수고하지 않게 카페로 간 거지요. 카페 안팎이 출근길 직장인들과 등굣길 학생들로 붐볐습니다. 우리 테이블 바로 옆 테이블에도 초등학생 사내아이가 엄마와함께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는데, 아홉 시가 다되어 갈 때라 그런지 서둘러 먹었습니다. 한입 가득 빵을 넣고 우물거리는 아들에게 빵을 씹으며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주식을 사는 건 물건 사는 거 하고 달라. 물건을 살 때는 물건이좋은가 나쁜가 보고 사잖아? 근데 주식을 살 때는 그 회사가 뭘하는 회사인지 보고 사는 거야. 그 회사 물건이 아니라 그 회사의 가치에 투자하는 거라고. 알았어? 그래서 삼성 주식을 사는 거라고.알겠지?" 초등학교 4학년쯤 된 아..

동행 2026.04.29

노년일기 283: 고마워, 늙은 눈!(2026년 4월 26일)

아마도 제 생애 마지막 안경이 될 안경을 맞춘 지거의 한 달이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양쪽 눈의 시력차이가 심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차이는 줄지 않았습니다.양쪽 눈을 평등하게 사용하니 그렇겠지요. 왼쪽은 -17, 오른쪽은 -13이지만, 안경을 만들 때는왼쪽 -13, 오른쪽 -11로 맞춰 교정 시력 0.3이 되었습니다. 도수가 너무 높으면 안경을 통해 보는 세상과 안경 가장자리 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편차가 너무 커서 어지러우니까요. 네 번이나 압축한 렌즈 두 개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걸 보니 늙긴 늙었나 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처음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안경 끼는 삶을 불평한 적은 없습니다. 안경 덕에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보고 싶은 하늘도 마음껏 올려다 보며 살았습니다. 겨울에 추운 곳에 있..

나의 이야기 2026.04.26

노년일기 282: 생애 첫 수술 (2026년 4월 7일 )

오랜 친구가 평생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마음 한쪽이 쿵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짐짓 웃으며 "이제야?" 하고60세 넘어 처음으로 수술을 받는다니 얼마나 복 받은 삶이냐고 하자친구도 그렇다며 밝게 웃었습니다. 마주 앉아 나눈 대화면 마음을들켰을 텐데 전화 통화라 다행이었습니다. 태아 시절에 수술받는 아기도 있고 신생아 시절부터 자라면서 계속 수술받는 사람도 있으니 환갑 넘어 처음으로 수술을 받는다면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 오랫동안한 번도 수술을 받아보지 않았기에 두려움 또한 클 것 같습니다. 나잇값을하느라 두려움을 표현하지도 못할 테니 더 무서울 수도 있겠지요. 친구가 수술받는다는 말을 들은 날부터, 그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

동행 2026.04.07

노년일기 280: 노부부 걱정 (2026년 3월 7일)

우리 동네에는 가구당 면적이 100평을 넘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산 아래라 높이 제한이 있어 7층으로 지어진건물 두 동뿐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거대합니다. 저는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보다걱정합니다. 남의 눈에 띄는 '부(富)'는 시기를 부르기 쉬울테니까요. 그 아파트에 사는 노부부를 처음 본 건 작년 말쯤, 그들이 제가 자주 가는 카페에 오면서부터입니다. 제가 그들을 '노부부'라 하는 건 그들의 목소리 때문입니다. 저는 눈이 심하게 나빠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묵소리만 들리는데, 목소리로 보면85세쯤 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70대인데 목소리만 80대일수도 있을 겁니다. 대개 목소리에 권위를 실어 발성하는사람들은 목소리가 먼저 늙으니까요. 남편은 병원(의원)을 운영..

동행 2026.03.07

노년일기 279: 부모가 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2026년 3월 4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우리 중 누군가는누군가의 부모입니다. 자식이 되는 건 선택할 수없지만 부모가 되는 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었던 제가 부모가 되어 여러 십 년을 살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수많은 부모를 목격하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도 어려운 일은 좋은 부모가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치동이나 목동에 '자가'로 살거나 샤넬백을 들고 마이바흐를탄다고 해서 좋은 부모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조건 중 첫째는 건강한 몸과 정신을 만들어 주는 것이고, 그러려면 부모의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정자만 제공하는 아버지는 나이가 좀 들어도 상관없지만, 약 ..

동행 2026.03.04

노년일기 278: 해바라기 (2026년 2월 22일)

나이가 든다는 건 무엇보다 몸의 존재를 늘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몸을잊고 살다가 병이나 사고가 나서 몸이 정상작동하지 않으면 그때에야 내게 몸이 있음을깨달았습니다. 노화는 다양하고 새로운 불편과 통증, 실수를통해 시시각각 몸을 부각시킴으로써 인생이유한함을 알려줍니다. 노년은 생의 유한함이라는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어리석음을 지우고지혜를 습득,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제 경우엔 어리석음이 지워지는 대신날로 선명해지니 노년이라는 시간을 사는 게진흙밭을 걷는 것 같습니다. 나이는 키보다 높이쌓였는데, 파란 하늘을 보며 웃음 짓다가 미세먼지의 습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젊어서와다르지 않게 살고 있으니까요. 엊그제 만난 문장 하나가 가슴으로 훅 들어와얼굴을 붉히게 한 건 바로 그래..

동행 2026.02.22

노년일기 277: 엄마, 잘못했어요(2026년 2월 18일)

엄마, 제 집 창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별 그리다'에도 불겠지요? 내일이면 엄마 떠나신 지 꼭 2년. 하루도 엄마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고 매일 아침 엄마의 자유와 평안을 위해 기도하지만 새삼 눈물이 납니다. 요 며칠 베란다에서는 엄마가 좋아하시던 두 가지가향기 싸움을 벌였답니다. 천리향은 겨울에도 봄 같았던 엄마처럼 겨울을 이기고 피운 꽃향내로, 굽힐 줄 몰랐던엄마의 심지를 닮은 홍어는 삭을 뿐 상할 줄 모르는 기질의 알칼리성 냄새로 겨루었지요. 엄마, 어리석은 딸은 엄마가 이 세상에 계실 때 잘하지 못한 것을 참회하느라 아직도 엄마 사시던 동네를 가지 못합니다. 제일 잘못한 것은 엄마의 외로움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아버지 떠나시고 9년 가까이 두 분 사시던 방에 홀로 사시며 외롭다 외롭다 하..

나의 이야기 2026.02.18

노년일기 276: 흰머리 총잡이 (2026년 2월 13일)

한국은 미국보다 작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점도 있습니다. 그중 첫째는미국에서는 시민의 총기 소지가 합법이지만 한국에선불법이라는 겁니다. 한국인은 유난히 감정적이라니 총기까지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으면 범죄율이 높아질지 모릅니다. 총기 소지가 불법인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저이지만사실 저는 거의 매일 총을 쏘고 있습니다. 좀 과장해말하면, 이상(異常)이 정상화된 이 나라에서 제가 온전한 정신(sanity)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총을 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총을 가장 자주 쏘는 곳은 저희 집 아래 큰길의횡단보도입니다. 횡단보도 앞에 차량 정지선이 있지만 그 정지선에서 멈추지 않고 횡단보도를 침범하는 자동차가 흔합니다. 한국 차도 있고 외국 차도 있고승용차도 있고 승합차와 트럭..

동행 2026.02.13

노년일기 275: 금반지(2026년 1월 31일)

현관문 앞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우리집에 왔던 택배 상자 중에 가장 초라했습니다.궁금한 마음으로 상자를 집어들고 앞면에 적힌 것을보니, 주소는 정확히 우리집이지만 받는 사람의 이름(세 글자 중 두 글자)과 전화번호(010-중간 숫자)가 다 낯설었습니다. 품목이 '주얼리'인 걸 보니 잘못 온 게 틀림없었습니다. 잘못 배달된 걸 알고 찾으러 오겠지 하고 그냥 문 옆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온 택배 상자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받을 사람의 전화번호가다 적혀 있었으면 연락했을지 모르지만, 망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배달해서전화를 유도하는 신종 사기가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까요. 저녁 늦게 집에 들른 아들이 상자에 쓰인 이름 일부를 보더니 옆집으로 갈 게 ..

동행 2026.01.31

노년일기 274: 경상도 큰애기들 (2026년 1월 27일)

잔설 남은 길을 걸어 오랜만에 찾은 단골 카페,창밖 대추나무와 나무를 안고 있는 작은 뜰이남은 눈 덕에 더욱 아름답습니다.창가 자리에 젊은 여성 셋이 앉아 있습니다. 제가 늘 앉던 구석자리엔 이미 혼자 온 손님이있고 앉을 곳은 세 여성 지척뿐입니다. 세 사람과 저 사이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지나갈 수 있는 공간만 있고 그들의 얘기는일행의 얘기처럼 또렷이 들립니다. 립밤으로 시작한 대화가 화장품과 화장법으로 이어집니다. 젊어서일까 생각하니 제 젊은 날이 떠오릅니다. 외모가 오늘날처럼 중요하지 않았던 시대라 그랬을까요? 친구들과 저는 화장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문 기자로 일할 때여서인지 사석의 소재도 공적 주제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대화의 소재도 그렇지만 창가 손님들의 말투와음량이 집중을 방..

동행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