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08

노년일기 145: 그녀의 비늘 (2022년 12월 4일)

아흔 넘은 어머니를 누르는 중력 아주 눌린 노부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다가 오히려 하늘로 돌아가시고 슬픔을 식량삼아 버티던 노모는 비척비척 십이월 젖은 낙엽 1분에 하던 일을 10분 걸려 하면서 왜 자꾸 채근하냐고 야속해 하는 어머니 혹은 낡은 비늘집 어제는 한 조각 오늘은 두 조각... 빛나던 비늘들 바래어 떨어지네 남의 집 같던 그 마음 이제야 알 것 같은데 그 목마름 그 성마름 먼지 털 듯 털어내시며 어머니 자꾸 사라지시고 내 손엔 빛바랜 비늘만...

나의 이야기 2022.12.04

노년일기 144: 나이테 (2022년 11월 25일)

낙엽 몰려다니는 길을 걷다 보면 문득 고개 들어 저 높이 나무의 정수리께를 보게 됩니다. 높아지느라, 속으로 영그느라 이렇게 버리는구나... 인생의 겨울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개 자라기를 멈추지만, 나무는 겨울에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구나... 20년 넘는 억울한 옥살이, 그 겨울 같은 시절에도 자신을 키우신 신영복 선생. 선생의 에서 같은 마음을 발견했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1984년 12월 28일 대전교도소에서 쓰신 글에 '나이테'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2016년 1월 15일 저세상으로 떠나신 선생님, 지금은 어디에서 '자라고' 계신지요?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동행 2022.11.25 (3)

노년일기 143: 아름다운 것이 스러질 때 (2022년 11월 21일)

세상에서 제일 빠르던 엄마의 걸음이 자꾸 느려질 때 스승 같은 선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 용서 대장이 어느 날부터 노여움 대장이 될 때 새 절 기와 같던 머리칼에 눈꽃 하얀 걸 볼 때 명문 자랑하던 친구가 저잣거리 흔한 여인이 될 때 여러 날 걸려 핀 꽃이 하루 환하다 지기 시작할 때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집이 굉음 속에 무너질 때 가슴 속에 무엇 무거운 것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 나도 엄마처럼 느려지다가 .. 가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니 문득 가볍네!

나의 이야기 2022.11.21 (2)

노년일기 142: 시선 (2022년 11월 12일)

아버지가 뗏목 같은 요에 누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시기 전 앉으시던 안락의자, 그 의자 아래 방바닥에 앉아 자꾸 붓는 아버지의 종아리와 발을 내 어깨 위에 올려두고 죽어라 주무르던 날들, 짐짓 명랑한 척 종알대는 나를 내려다보시던 그 시선, 그 시선 뒤 영영 떠날 마음, 그 외로움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고 잔잔히 웃으시던... 언제부턴가 내 시선 속에 그 시선 같은 것이 안개처럼 혹은 초미세먼지처럼 스미어, 살아갈 사람들은 앞과 위를 보지만 살아온 사람들의 시선은 뒤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지기 시작한 꽃의 마른 목처럼 길에 뒹구는 낡은 돌 끌어안는 저녁 이슬처럼... 아버지의 약한 육신은 굳건하고 청청한 정신을 몹시도 괴롭혔지만 아버지는 평생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 고통 또한 그 ..

나의 이야기 2022.11.12 (3)

노년일기 141: 치과, 무섭지 않아! (2022년 11월 6일)

한 2주 전 입안 오른쪽 깊숙한 곳에 있던 윗니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너무 낡아 자연히 부서져서인지 통증도 없었습니다. 가기 싫은 치과, 마침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감기를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영화 '캐스트어웨이 (Cast Away)'가 떠올라 용기를 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척 놀런드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데, 치과 치료를 미뤘던 까닭에 스케이트 날과 바위로 스스로 문제의 이를 빼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침내 어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양심 치과 명단'에 있는 치과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2대 째 하는 치과라 했습니다. 손님 수도 적당하고 직원들도 가만가만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제 이들도 꼭 저만큼 늙어 있었습니다. 우선 코로나 19로 하지 못했던 스케일링을 하..

나의 이야기 2022.11.06 (2)

노년일기 140: 신발의 주인들 (2022년 11월 2일)

며칠 전 몸에 들어온 감기가 아주 함께 살자 합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한 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감기의 힘이 더 강해지나 봅니다. 웬만하면 해 떠 있는 시간에는 눕지 않지만 직립이 힘들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까무룩 눈 감았다 깨어보니 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제 몸에 앉았습니다. 그 먼길을 왔는데도 햇살은 따스합니다. 문득 신문에서 본 이태원의 신발들이 떠오릅니다. 수십 켤레인지 수백 켤레인지 주인을 잃은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쪼르르 바랜 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신발들에도 이 햇살이 담기겠구나, 그 신발을 신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되었고, 애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흰머리와 ..

나의 이야기 2022.11.02 (1)

노년일기 139: 밤, 그 사랑 (2022년 10월 27일)

밤의 계절입니다. '어두운 밤'의 '밤'은 짧게 발음하고 '맛있는 밤'의 '밤'은 길게 발음해야 합니다. 밤을 보면 '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면 부자' 라던 어린 시절 남동생의 말이 떠오릅니다. 남동생은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밤을 마음껏 먹고 있을까요? 생밤을 익혀 먹기는 생쌀을 익혀 먹기보다 어렵습니다. 맨 바깥 가시껍질을 벗은 밤에도 두 겹 껍질이 있습니다. 바깥 껍질은 단단하고 속 껍질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밤 껍질을 벗기는 데는 수고와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밤을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먹으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개는 부모나 배우자, 자녀 등 가족에게 먹이려고 살 겁니다. 밤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고롭게 껍질을 벗겨 낸 밤을 자기 ..

나의 이야기 2022.10.27 (1)

노년일기 138: 달팽아, 미안해 (2022년 10월 23일)

따스한 가을 햇살 위로 가을바람이 스칩니다. 왜 '가을 햇살'은 두 단어이고 '가을바람'은 한 단어일까요? 때로는 표준국어대사전이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바람을 느끼며 걷다 보니 간판 없는 채소가게 앞입니다. 배추 세 통들이 한 망이 금세라도 구를 듯 놓여 있습니다. 겉껍질은 시들었지만 물에 담가 두면 푸르게 살아날 겁니다. 배추를 보는 저를 보았는지 가게 사장이 소리칩니다. "배추 6천 원!" 6천 원이면 한창때 가을배추 값입니다. 배춧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했더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달팽이가 두 마리나 나옵니다. 달팽이가 앉은 배춧잎 조각 채로 화분 흙에 옮겨둡니다. 하룻밤 물에 담가두니 시들었던 잎들이 본래의 초록으로 돌아옵니다. 한 통에 5, 6천 원 배추가 되었습니다. 절여두었던 배추를 씻는데..

나의 이야기 2022.10.23 (3)

노년일기 137: 다음 카카오처럼은 (2022년 10월 19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13년 전에 포털사이트 '다음'에 블로그를 열었습니다. 사교를 좋아하지 않아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은 만큼 블로그를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다음 블로그'에 글을 쓰는 동안 '다음 블로그'는 여러 차례 변화를 꾀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변화는 늘 개선 아닌 개악이었습니다. 지난 9월 '다음 블로그'가 없어지니 '티스토리'로 이전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고 티스토리로 이전하면서도 늘 불안했습니다. 이번 변화는 또 어떤 개악으로 끝날까... 그런데 지난 주말 다음 카카오 데이터센터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는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카카오그룹에 속한 128개 회사들이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

나의 이야기 2022.10.19 (1)

노년일기 136: 사이좋은 모녀 (2022년 10월 12일)

며칠 전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카페 입구에서 바라본 너른 창가 자리에 중년 여인이 신을 신지 않은 발을 의자 팔걸이에 걸쳐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맨 다리가 팔걸이에 걸쳐진 채 덜렁거리는 모양이 끔찍했습니다. 여인의 건너편에는 젊은 여인이 앉아 있는데 그 모양이 아무렇지 않은 듯 한참 대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지만 그 집의 커피와 음악을 따라올 곳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들어갔습니다. 두 여인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는데 그들의 큰 목소리가 거기까지 오니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나 나가니 카페 주인 정진씨가 배웅차 따라나왔습니다. "저 사람들... 끔찍하네요. 내가 가서 얘기할까요? 발 내리라고?" 제가 말하자 저보다 현명한 정진..

나의 이야기 2022.10.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