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18

노년일기 157: 추억여행 (2023년 3월 17일)

어젠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가 전에 한국일보사 일곱 개 신문사에서 일했던 동료 여자 기자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일보, The Korea Times, 서울경제신문, 일간스포츠... '장명수 칼럼'으로 한국일보의 지가를 올리시고 이제는 이화학당 이사장으로 활약하시는 장명수 선배님, 체육기자로 문명(文名)을 떨치시고 이젠 가드닝 전문가가 되신 성인숙 선배, 언론인과 외교관을 거쳐 화가로 살고 계신 지영선 선배,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맑은 물' 노릇을 하고 있는 옛 동료들과 후배들... 참석자들 모두 한목소리로 '한국일보사에서 일했으니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런 인연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얘기하니 이젠 이승에 계시지 않은 많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신문사보다 앞서 견습기자 제도를 실시하여..

동행 2023.03.17 (2)

노년일기 156: 궁금합니다 (2023년 3월 13일)

허리 아프다던 첫째, 목이 아프다던 둘째, 이제 괜찮아졌을까요? 회사 일이 버겁다던 젊은 친구는 아직 그 회사에 다닐까요, 떠났을까요? 하나뿐인 아들의 일탈로 반쪽이 된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막 사별을 겪은 선배는 어떠실까요? 팔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요? 예전에 궁금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보려 했지만, 이젠 가만히 기도만 합니다. 아픈 동생들, 회사 일에 부대끼던 젊은이, 반쪽이 되어 버린 친구, 사별을 겪은 선배 모두 부디 견딜 만하기를, 부디 아무렇지 않게 되기를... 아버지, 내일은 이승에 당신 태어나셨던 날... 팔년은 팔일 같고 저는 여전히 아버지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도 저희가 궁금하신가요?

나의 이야기 2023.03.13 (2)

노년일기 155: 누군가가 나를 추모할 때 (2023년 3월 10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친구 같은 책 몇 권이 있을 겁니다. 제게도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거나 숲 속에 들어앉고 싶을 때면 린다 엘리스(Linda Ellis)와 맥 앤더슨 (Mac Anderson)이 함께 만든 책 를 음미합니다. 는 아무개가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죽었음을 나타낼 때 쓰는 표시 (ㅡ)입니다. 예를 들어 '1900ㅡ2000' 가운데의 표시로서 바로 그 사람의 생애를 뜻합니다. 2010년 12월 이 귀한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김광호 선생님께 감사하며, 책의 제목이 된 시 'The Dash'의 마지막 연을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봄은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는 계절, 생과 함께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So when your eulogy is b..

나의 이야기 2023.03.10 (1)

노년일기 154: 사랑받는 노인, 사랑을 잃는 노인 (2023년 3월 1일)

이틀 후 어머니의 생신을 앞두고 아들딸들과 배우자들이 어머니와 점심을 함께합니다. 젊은이는 하나도 없는 식탁, 가장 어린 사람도 예순이 넘었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화제는 건강과 질병, 임플란트와 틀니 얘기를 넘나듭니다. 식사 후에 간 카페에서는 한 테이블엔 어머니가 사위와 아들들과 앉고 다른 테이블엔 며느리들과 딸들이 앉습니다. 어머니는 보청기를 끼셨지만 자기 테이블의 얘기도 잘 못 들으십니다. 며느리들은 어머니로 인해 서운했던 점을 시누이들에게 얘기하고 시누이들은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얘기하며 올케들을 위로합니다. 이야기는 어머니를 넘어 며느리들의 어머니들로 이어집니다. 어떤 노인은 늙어서도 사랑받지만 어떤 노인은 나이를 얻을수록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원인은 무엇보다 아집(我執)입니다...

동행 2023.03.01 (1)

노년일기 151: 겨울 다음 봄 (2023년 2월 12일)

겨울 동안 집안을 환히 비추던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이 자꾸 떨어지며 푸른 꽃대에서 손톱보다 작은 새 잎들이 돋아납니다. 봄이 오는 겁니다. 꽃과 잎이 묻습니다. 겨울이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을까? 봄 다음에 봄 또 봄 다음에 봄이 와도 가버린 시간을 털어낼 수 있을까?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사위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몸에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겨울 덕에 봄을 생각합니다. 제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_copa7lBCg&t=4s&ab_channel=JimmyStrain

나의 이야기 2023.02.12 (2)

노년일기 150: 달, 달, 무슨 달... (2023년 2월 6일)

어젠 정월대보름. 달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나쁜 제 눈에도 밝고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둥두렷했습니다. 제 손 좀 잡아주세요! 하고 외치면 잡아줄 듯 다정해 보였습니다. 달을 올려다보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둥글긴커녕 비죽비죽 날카로운 성정, 어둠을 밝히긴커녕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 같은 노인... 달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당신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빌었습니다. 빛을 내되 햇살처럼 날카롭지 않게 하소서. 어둠을 밝히되 스스로 너무 밝지 않게 하소서. 당신처럼... 차별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이야기 2023.02.06 (2)

노년일기 149: 젊은이는... (2023년 1월 19일)

젊은이는 빛이 납니다. 이목구비 균형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도 머리끝서 발끝까지 반짝입니다. 노인은 집에서 키운 하늘소 같아 이목구비 균형이 아무리 좋아도 빛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황금뇌를 떼어 팔며 살다 죽은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노인은 제 빛과 시간을 바꾼 사람입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이 그 분야 전문가가 되듯 긴 시간을 제정신으로 산 노인은 인생을 제법 알게 되고 젊어서 씨름하던 문제의 답을 얻기도 합니다. 젊음을 부러워하는 노인이 많지만 모든 노인들이 그러지 않는 건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빛나던 시절엔 몰랐으나 빛을 잃으며 알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노년을 흥미롭게 하고 살 만한 나날로 만듭니다. 그러면 젊음이 부럽다며 늙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뭐냐고요? 글..

나의 이야기 2023.01.19 (1)

노년일기 148: 잘 살고 싶으면 (2023년 1월 6일)

어떤 책을 읽다가 혹은 읽고 나서 다른 책을 이어 읽는 일이 흔합니다. 책의 한 구절이 다른 책을 부를 때도 있고 그 책의 한 생각이 다른 책을 펼치게 할 때도 있고, 책의 주제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읽게 하기도 합니다. 안락사를 선택한 지인의 마지막 시간을 스위스에서 함께하고 쓴 신아연 씨의 책 를 읽다 보니 두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과 네덜란드 의사 Bert Keizer (베르트 케이제르)의 입니다. 세 저자는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이고 살아온 배경과 종교도 다르지만, 그들의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후회 적은 삶을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으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프기 전에는 죽는 것이 무척 두려웠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3.01.06 (1)

노년일기 147: 크리스마스날 (202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부고를 받았습니다. 뜬금없이... '새로 태어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울지마 톤즈'를 방영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 영화를 보던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개인의 안락을 목표로 하는 대신 더 높은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할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선의와 선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이름... 그분 덕에 말갛게 씻긴 눈을 닦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얀 눈은 사라지고 거뭇거뭇한 눈만 가로수 아래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눈은 흰눈일 때 눈 대접을 받고 사람은 의식이 제..

나의 이야기 2022.12.25 (2)

노년일기 146: 아이와 노인 (2022년 12월 6일)

이 나라엔 태어나는 아이가 적어 큰일이라는데 태어난 아이는 외롭게 살거나 시달리거나 방치되거나 학대받곤 합니다. 노인들이 오래 살게 된 이유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라는데 이 나라의 노인들은 먹고 사느라 혹은 여생을 즐기느라 바쁘고 젊은이들 중엔 노인들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쁜 젊은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노인들이 돌보며 어울리면 아이들은 덜 외롭고 노인들은 기쁨과 보람을 느낄 텐데... 이 나라는 이래저래 낭비 많은 나라입니다. 아래의 시를 보면 제가 좋아하는 셸 실버스틴도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The Little Boy and the Old Man Said the little boy, "Sometimes I drop my spoon." Said the lit..

동행 2022.12.0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