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09

노년일기 252: 토마토 거울 (2025년 3월 22일)

창가의 토마토 나무에 다섯 개의 열매가 열린 건한겨울이었습니다. 손톱만한 열매를 처음 보았을 땐방울토마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겨울 햇살도 햇살이라 열매가 자꾸 커졌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난 방울토마토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빛깔은 짙푸른 채 변하지 않았습니다.몸집이 커지는 데는 햇살로 족하지만, 몸이 익는 데는햇살의 온도가 중요한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겨울 날씨와 봄 날씨가 엎치락뒤치락하더니한낮엔 봄에 여름 몇 방울이 섞인 듯 더워졌습니다.그러더니 대번에 토마토의 색깔이 달라졌습니다.푸름에 붉음이 섞이기 시작한 겁니다.   창밖에 눈 내리는 날 짙푸른 토마토를 보면안쓰러웠는데, 푸름과 붉음이 보기 좋은 모습을보면 대견합니다. 오늘 같은 날씨가 며칠 계속되면..

나의 이야기 2025.03.22

노년일기 251: 즐거운 취미 활동 (2025년 3월 12일)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독서를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있고 노래 부르기가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여행이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취미는김치 담그기입니다. 직장생활을 오래했지만, 김치는 선물로 받았을 때를빼고는 거의 항상 담가 먹었습니다.  '아니, 김치 담그기가얼마나 힘든데 그게 취미라니요?'하는 사람이 있을지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힘든 건 그 일이 힘에 부칠 때입니다.저는 김치를 힘에 부치게 '전문적으로' 담그지 않고조금씩 재미를 느낄 만큼씩만 담급니다. 어여쁜 배추를 한두 포기 사거나 올망졸망 귀여운 총각무 (알타리무) 두어 다발, 오이 한두 봉을 사서 담급니다. 물론 김장할 땐 좀 더 많은 양을 하지만, 그래 봤자 배추 세 통, ..

나의 이야기 2025.03.12

노년일기 250: 그의 어머니 (2025년 3월9일)

가끔 가는 베이커리카페의 사장님으로부터시집을 선물받았습니다. 라는 제목에 마음이덜컹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떤 구절들이 돌부리 되어저를 주저앉혔습니다. 어려운 시어도 없고 세련된기교도 없는 단어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부끄러워하며 꺼내놓은 진심이었습니다.  은평구에서 금은방을 한다는 시인, 빛나는 것들사이에 앉아 오히려 마음과 표현을 벼렸을 시인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졸저 에도 썼지만, 우리는 모두 시인입니다.사는 데 바빠 자신이 시인임을 잊은 사람들이 많지만, 조성찬 님은 자신이 시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이 모두 조성찬 님처럼 시를 쓰며 살면 세상은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겁니다. 그의 시 '어머니의 전화' 속 '어머니 49재 지낸 게엊그제였는데/뻔히 알면..

동행 2025.03.09

노년일기 249: 고맙다, 청춘! (2025년 3월 6일)

볼 것 많은 계절, 봄! 초중고교가 개학하고 대학이 개강하니 동네가 계절입니다. 거리마다 어린이 젊은이가 가득하고 식당과 카페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마른 나무마다 눈물처럼 작은 봉오리들이 아름답지만,그들에게 눈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이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학교 많은 곳에 살길잘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던 20년 전저를 칭찬합니다. 대학 주변은 아시아 거리입니다. 한국 젊은이처럼생겼는데 입을 열면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일본...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한국과 이국의학생들을 보면 국적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어쩌면 국적은 총 들고 싸우는 전쟁이나총 없이 싸우는 외교에나 필요할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저들이 국적..

동행 2025.03.06

노년일기 248: 후배들에게 (2025년 2월 27일)

TV 화면에 피켓 든 대학생들의 격앙된 모습이보입니다. 연둣빛 번지는 모교 교정에서 후배들이두 갈래로 나뉘어 싸웁니다. 마이크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목소리가 대포알 같습니다. 아름다운 젊은얼굴을 추하게 만든 나이 든 사람들이 밉습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범죄라면 저는 범죄인입니다. 개가 가장 심하게 모욕을 느낄 때는 뺨을 맞을 때라고 하던데, 투명망토가 있다면 그것을 입고 저 개만도 못한 늙은 거짓말쟁이들의 뺨을 때리고 싶습니다. 얘들아, 너희끼리 싸울 것 없어. 너희들이 각기 편드는 그 사람들, 너희만큼 순수하지 않고 너희만큼 정의롭지않아, 너희처럼 가난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데 에너지낭비하지 말고 교정이나 산책해, 가지마다 굳은 갈색 밀어올리는 연두를 봐. 아니면 교정의 건물들을 보거나. 그..

동행 2025.02.27

노년일기 247: 그때와 지금 (2025년 1월 30일)

지나간 시간 중 언제를 '그때'라 부르든,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다릅니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참 많은 일을 합니다. 저 개인으로 보면 짙은 갈색머리가 희게 변했고얼굴엔 주름, 손등엔 검버섯이 생겼습니다.허리와 다리는 굵어졌고 눈은 더 나빠졌고, 이는 삐뚤빼뚤해졌습니다. 웃음은 많아졌고 화내는 일은 줄었습니다.  책상이나 집 같은 무생물도 시간이 흐르며변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살아있는 것들의변화는 훨씬 더 두드러집니다. 윤동주 (1917-1945)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했던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평생을 포함하는 시간을 아일랜드에서 산 시인 제임스 스티븐스 (James Stephens: 1882-1950)는나뭇잎을 빌어 시간의 횡포를 고발했습니다. 대충 번역해..

나의 이야기 2025.01.30

노년일기 246: 기도에서 사라진 사람 (2025년 1월 17일)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기도 매트 위에무릎을 꿇으면 늘 울컥, 감정이 일어납니다.꿈이 현실이 되지 못할 때 하는 것이 기도이니그렇겠지요... 저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신, 그러나 이제이곳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의 자유와 평안을위해 기도한 후,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지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데  필요하고, 용기는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하니까요. 그다음엔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십사고  기도하고, 재해와 전쟁을그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게 해 주십사고기도하고, 양심적으로 ..

나의 이야기 2025.01.17

노년일기 245: 제사의 효용 (2025년 1월 11일)

1월은 언제나 9일을 기준으로 나뉩니다.9일 이전에는 외출을 삼가며 건강을 지키려 애쓰고9일 이후 며칠은 할 일을 미뤄두고 쉬며 지냅니다.9일이 무슨 날이냐고요? 9일은 제삿날입니다. 룸메의 부모님과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날입니다.아버님은 제가 뵙기 전에 돌아가셔서 모습과 인품을들은 얘기로만 짐작하지만, 어머님은 저와 함께 사신 적이 있어 더욱 그립습니다.  인간이 2,30대에 70대의 1년쯤을 미리 경험해 볼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자식이 훨씬 많아질 거고, 저도 어머님과 함께하던 시간 동안 어머님의 몸과 마음 상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노년을 미리 경험할 수는 없으니젊은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인을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행 2025.01.11

노년일기 244: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5년 1월 8일)

새해 초엔 늘 시를 읽게 됩니다.시로써 머릿속을 씻고 정리하고 새 마음으로 새해 살이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단골 카페에서 류시화 씨가 엮은 시집을보다가 낯익은 시를 발견했습니다.제 졸저 에 인용했던'인생을 다시 산다면'이었습니다. 그 시는 오랫동안 나딘 스테어 (Nadine Stair)의시로 알려져 왔는데, 사실은 나딘 스트레인(Nadine Strain)이 쓴 에세이에 나온 것입니다.저는 에 그 사실을 적고, 그 글이 1978년 미국의 여성 잡지 (Family Circle)>에 실리는 과정에서 작가 이름이 잘못 기재되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 시가 여전히 나딘 스테어의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제가 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도 나딘 스테어의 시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은 수십 쇄..

동행 2025.01.08

노년일기 243: 화는 천천히 (2025년 1월 6일)

늙는다는 건 한마디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겁니다.에너지가 줄어드니 많은 일을 하거나 신경 쓸 수가없습니다.  늘 하던 일만 하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지만,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거나 그런 일에 신경을써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날카로운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그 일에 대해말하면 곱게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금세 격앙되어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이 나라가 초고령국가가 되며 화내는 노인이 많아지는 건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화내는 건 가난한 사람이돈 쓰듯 해야 합니다. 화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화를 내고 나면, 감정에 휘둘려 돈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돈을 쓴 가난뱅이처럼 반드시 후회하게 되니까요. 새해 목표를 화내지 않는 것으로 정한 분들에게린다 엘리스(Lind..

동행 202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