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25

노년일기 268: 어리석은 부모들의 시대 (2025년 10월 15일)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놀라운얘기를 들었습니다. 체육시간에 아이들이 운동장에나가 뛰는 대신 교실에서 '오목'을 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둑돌을 갖고 노는 오목이 '체육'이 될 수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으니, 어떤 아이의 어머니가 교감에게 전화해서 자기 아이가 햇볕에 약하니 체육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그늘에 있게 하고, 다른 아이들은 햇살을 쬐며 '체육'이 뜻하는 대로 '신체 활동에의한 건강의 유지와 증진, 체력 향상을 도모' 하면 될 텐데,왜 다른 아이들까지 체육을 하지 못하게 한 걸까요? 그 어머니가 그렇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할 때, 왜 교감은 그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대신 체육을 오목으로 바꾸게..

동행 2025.10.15

노년일기 267: 메모의 이유 (2025년 10월 10일)

머리와 몸 속에 구름이 떠다니고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합니다. 남의 손 같은 제 손이 책상 위에 쌓인종이쪽 하나를 집어듭니다. 지난 4월 7일 월요일의메모입니다. "잘 작동하지 않는 몸이 조팝나무 흰 꽃이 보이는창을 바라본다. 단어들이 흩어진 꽃처럼 널려있지만, 그 단어들은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피로는 그림자일 뿐 친구는 아니다. 친구라면 가끔떠나줄 테니까. 길에는 무수한 햇빛 알갱이가 쏟아져 있지만내 몸의 바람 구멍들에 맞는 알갱이는 하나도 없다.당연히 길은 여전히 밝고 구멍들 속엔 어둠뿐이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 그날은 햇살이 가득했을 뿐,그날도 오늘처럼 머리 속에 구름과 파도가 일렁였나 봅니다. 그 출렁 머리를 들고 메모하길 참 잘했습니다. 메모는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힘을 주니까..

카테고리 없음 2025.10.10

노년일기 266: 행복한 하루(2025년 9월 29일)

비 오는 어제 아침 쌈배추 겉절이를 만들었습니다. 통배추는 너무 비싸 살 엄두가 안 나고 쌈배추도 비쌌지만 좀 시들어 싸게 파는 것을 샀습니다. 시든 배추도 다듬어 물에 담가 두면 대개 살아납니다. 사람은 늙어 시들면 다시 젊어지지 못하는데, 배추가 사람보다 낫구나 생각하니 잠시 우울했습니다. 겉절이를 조그만 통에 덜어 담아 가방에 넣어 메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 밖에 사는 둘째 수양딸이 오고 있었습니다.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를 걸어 옷을 단단히 입고 나오라고 말하기에 가방에 카디건 두 개를 넣었습니다. 자신이 한기를 느껴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지요. 무슨 색 옷을 입고 올지 모르니 대비되는 색으로 하나씩 넣어 어울리는 색을 입게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동행 2025.09.29

노년일기 265: 늙은 부자들의 걱정 (2025년 8월 25일)

늙어가는 부자들이 걱정한다병 들어 돈이 필요하게 될까 봐돈 쓰기가 겁난다고.돈이 없어 돈 걱정을 해 본 적이없는 나는 나에게 약간 분개한다. 저들이 대학 갈 때 대학 진학률은 7퍼센트, 대학 가는 건 특권이었는데그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자신과자식들을 모두 부자로 만든 후에 돈이 필요하게 될 때를 걱정하는데 평생 특권을 부끄러워하며 남의 가난을 걱정하던 나는 늙도록제 가난을 모르고 살다가 저만큼늙은 부자들 사이에서 생각한다바보 겁쟁이 늙은이가 되기 전아까운 나이에 떠난 친구들의 현명을 오, 천지신명이시여,이 어리석은 자에게 돈이 필요한 때가 오지 않게 하소서!

동행 2025.08.25

노년일기 264: 지상에서 영원으로 (2025년 8월 12일)

20세기 영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 중에1953년에 발표된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영국이 자랑하는 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 1865-1936)의 시 'Gentlemen-Rankers (특권층 출신 병정들)에서 처음 쓰였고, 제가 좋아하는 제임스 존스 (James Jones: 1921-1977)의 소설 제목이 되었다가 그 소설로 만든 영화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하면 얼핏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이 표현은 지상에서 살지 못해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 전쟁터에서 죽는 사람들, 매일 10.5명씩 자살하는 한국 노인들... 모두 지상에서..

동행 2025.08.12

노년일기 263: 용기를 내겠습니다! (2025년 8월 5일)

어려서부터 음력 생일에 미역국을 먹었습니다.양력 날짜를 알려면 달력에 작게 쓰인 음력 날짜를확인해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그 일을 하지 않게되었습니다. 태어난 날로부터 멀어지며 죽음을 가깝게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생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수양딸에게서 생일에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는 메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긴 인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생일이 든 달만 알 뿐 날짜도 모르는데, 바쁜 생활 중에 생일을 기억해 주니 이미 잔칫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메일을 보고 나서 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갈수록 성취가 드물어지는 데다 발전도 더뎌지고 투지도 약해집니다. 제가 맞서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바로 저입니다. 그런대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요동칠..

동행 2025.08.05

노년일기 262: 더 나쁠 수도 있었다 (2025년 7월 26일)

얼굴마다 열기가 어리고 풀마다 시든 여름,체온에 육박하는 기온을 타박하는 목소리가높습니다. 35, 6도가 이런데 40도 넘는 곳은어떨까요? 더워서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래도이 정도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덥지않아 다행일 뿐만 아니라 공기가 나쁘지않으니까요. 봄이 미세먼지 세상이 되면서 아침이면 먼지예보를 보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올 여름은거의 항상 '좋음'이나 '보통'입니다. 기온이 높아힘든데 미세먼지마저 '나쁨'이었다면 얼마나 더괴로웠을까요? 이글거리는 지상에서 파란 하늘을올려다볼 때마다 감사합니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더 나쁜 상황이 되었을수도 있음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버릇은 언제 생긴걸까요? 산전수전 겪으며 여러 십 년 살다 보니 저도 모르게생긴 것 같은데, 이 버릇은 고..

동행 2025.07.26

노년일기 261: 노노 케어 하우스 (2025년 7월 16일)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은 시각, 창문으로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합니다. 뒷산에서불어오는 바람은 더 시원하겠지요? 그러면 그렇지, 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시원할 뿐만 아니라 맛이 좋습니다. 학교에서는 공기가 무색, 무취의 기체라고 가르치지만, 움직이는 공기인 바람엔 빛깔도 있고 향기도 있습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지요. 창가에 서서 향긋한 공기를 호흡하면 오래된산에게 위로받는 느낌이 듭니다. '힘들지? 알아,그래도 잘 견뎌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산이 늙어 가는 저를 위로하는 것이지요. 우리 집은 '노노(老老)케어 하우스'입니다.'노노케어'는 노인이 노인을 돌봄을 뜻하는신조어입니다. 산의 케어를 받은 저는 수건을 찬물에 적셔 들고냉장고에게로 갑니다. 여..

카테고리 없음 2025.07.16

노년일기 260: 배우의 퇴장 (2025년 6월 22일)

겨우 며칠 누워 지내다 운동화를 신었는데발이 낯설다 합니다. 발의 불평을 못 들은 척밖으로 나갑니다. 골목도, 길가의 꽃들과 고양이들도모두 그대로인 듯합니다. 눕기 전에는 걸어다니던 시장, 버스를 타고 갑니다.채소와 과일을 싸게 파는 가게들, 쪽파를 다듬고마늘을 까놓고 팔던 할머니들의 노점도 그대로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 가던 채소 가게. 목청껏 호객하는사장님, 아무리 여러 가지 채소를 사도 금방 계산해내는계산원 아주머니, 비닐 봉지에 담긴 채 매대에 누운로메인과 깻잎과 청경채 모두 그대로입니다. 저는 삶의 무대 위에서 잠시 사라졌다 나타났지만 무대는 그대로입니다. 이번엔 누워 있다 일어났지만 언젠가는 일어나지 못하는 때가 올 거고, 그러면 저라는 배우가 무대에서 영영 사라지게 되겠지요. 우리는 모두..

동행 2025.06.22

노년일기 259: 감기 선생 (2025년 6월 19일)

남들 눈엔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하루하루인데도제 몸엔 버거운가 봅니다. 또 감기에 걸려 느리게흘러가는 시간 속을 유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감기의 증세가 심해진다는겁니다. 전에는 별다른 증세 없이 열만 올랐고타이레놀 몇 알 먹으면 호전되었는데, 이젠 기침까지하는 데다 타이레놀을 먹어도 물러갈 생각을하지 않습니다. '감기 선생, 내가 좀 부주의했소. 이제 조심할 테니좀 봐주시오!' 그러나 감기 선생은 듣는 둥 마는 둥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고약한 감기에게도 고마운 점은 있습니다.첫째는 감기 덕에 30도가 넘는 날에도 더위를 느끼지못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 몸의 노화에 대해 더 잘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위를 느끼지 못하니 선풍기도 켜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