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33

불을 끄면 (2023년 8월 3일)

수양딸 덕에 한국에서 가장 첨단적인 백화점이라는 '더현대' 구경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그냥 백화점이 아니라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2023년 현재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무수한 사람들, 지하 6층 주차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들... 그곳의 사람들은 그곳 밖의 사람들처럼 '다름'에 민감하겠지만, 그 '다름'은 불만 끄면 모두 사라지겠지요. 셸 실버스틴의 시가 얘기하듯... 다르지 않아요 땅콩처럼 작든, 거인처럼 크든, 우린 다 같은 크기에요 불을 끄면. 왕처럼 부유하든, 진드기처럼 가난하든, 우리의 가치는 다 같아요 불을 끄면. 붉든, 검든 주황 빛이든, 노랗든 하얗든, 우린 다 같아 보여요 불을 끄면. 그러니 모든 걸 제대로..

동행 2023.08.03

졸부들의 합창 (2023년 7월 27일)

한 동네에 오래 살면 동네를 닮는 걸까요? 오래된 동네의 주민들은 대개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옷으로 얘기하면 헌옷 같은 것이지요. 집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한 곳에 고층아파트 타운이 생기며, 본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새 동네의 주민들은 새옷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는데 덧붙여 티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입주한 아파트들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곳에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아파트들이 늘어나며 제 단골 카페에도 새로운 고객들이 늘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목소리가 크다는 겁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애, 너 뭐 먹을래?" "난 아아!" 하고 외치는 식인데 카페에 자리잡은 후, 즉 카페가 조그맣..

동행 2023.07.27

노년일기 176: 죽어라 살다가 (2023년 7월 15일)

전문적인 사기꾼이 아닌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모인 어제 점심 자리의 주제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월에 어머니를 잃은 친구, 며칠 전 아주버님과 사별한 친구, 남편이 아주 떠난 후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두 선배들... 죽음은 이 오랜 친구 모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돈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가 누울 공원묘지의 묫자리를 사려는데 몇 인 분짜리를 사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갖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건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식들이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

동행 2023.07.15

교도소의 셰익스피어 (2023년 7월 8일)

오랜만에 단골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셰익스피어의 을 읽었습니다. 옆방에서 떠드는 손님들 --나갈 때 보니 겨우 두명!--과 창가의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고 웃을 수 있었던 건 셰익스피어 덕입니다. 셰익스피어 생각을 하니 며칠 전 자유칼럼이 보내준 권오숙 박사의 글이 떠오릅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글...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셰익스피어를 읽고 달라지듯 카페를 소음 공장으로 만드는 이들도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달라질까요... 오늘 한국의 문학은 초입 난파의 풍경을 닮았지만 누군가는 문학의 본령을 살리려 인공호흡하듯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응원하며 권 박사의 글을 옮겨둡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자유칼럼으로 연결됩니다. http://www.freecol..

동행 2023.07.08

노년일기 173: 나쁜 일 속 좋은 일 (2023년 6월 28일)

공익법인 '아름다운서당'을 만들고 이사장으로 오래 일하신 선배님과, 그곳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사를 역임한 두 사람이 오랜만에 서울 시내 한복판 오래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작년 언젠가 만나고 처음입니다. 노년의 적조는 대개 노화와, 노화가 수반하는 질병과 관계가 있으니 만남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못 뵌 사이 선배님은 유명한 병의 환자로 병원 신세를 지셨고, 서당의 동료인 제 오랜 친구는 해외 여행 중에 다친 팔꿈치의 수술을 다시 받고 아직 재활 치료 중이었습니다. 저 또한 지난 주 내내 누워지내며 과연 오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으니, 세 사람 다 신고(身苦)를 겪은 셈입니다. 투병은 힘들었지만 투병을 회상하면서는 세 사람 모두 웃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과거에 두..

동행 2023.06.28

나는 솔로 (2023년 6월 20일)

텔레비전은 '바보 상자'라지만 세상과 세태를 반영하는 상자이기도 합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줄며 짝짓기 프로그램이 늘었습니다. 이혼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부부 상담 프로그램도 많아졌습니다. 배우나 탈렌트 아닌 사람들이 TV 화면을 채우는 일이 빈번한데, 그들이 화면에 나타나고 난 후 해당 프로그램의 댓글난은 그들의 신상 정보와 그들에 대한 평가로 가득 찬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출연하는 걸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출연해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밤이면 대개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봅니다.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특히 이것을 보는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방송국에서는 '나는 솔로이니 짝을 ..

동행 2023.06.20

너희가 해바라기다! (2023년 5월 13일)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가로수 아래 핀 꽃들을 보며 해바라기다! 아니다! 목청을 높입니다. 노란 꽃이 아니니 해바라기는 아니고 같은 국화목에 속하는 꽃으로 보이지만, 저도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도 한마디 거들고 싶은 건 아이들이 꽃만큼 예뻐서입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스마트폰만 보며 걷는데 이 아이들은 찻길 옆 보도에 심긴 나무 아래 옹기종기 핀 작은 꽃들을 본 것입니다. '얘들아, 그 꽃은 해바라기가 아니야. 너희가 바로 해바라기야!' 마음 속으로만 얘기하며 아이들의 앞날을 축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컴컴해도 해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포기하지 마! 꿋꿋하게 자라서 주변을 밝혀줘!'

동행 2023.05.13

밥과 리즈: Bob and Liz (2023년 5월 10일)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제 상관은 로버트 뱅크스 (Robert Banks)박사라는 문정관 (cultural attache)이고 그의 아내는 리즈 (Liz)였습니다. 기자 노릇 15년 후 7년간 칩거(?) 했는데 소위 IMF 사태 (금융위기)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주한 미국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대사관은 정부인데 저는 정부와 여러모로 다른 언론계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는 대사관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4년 3개월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뱅크스 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해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제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고, 기자생활만 한 까닭에 행정에 어두운 제게 행정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아..

동행 2023.05.10

시인의 가난 (2023년 5월 4일)

'가난한 시인'이란 말은 있어도 '부유한 시인'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가 있고 시집이 잘 팔려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개 현실적으로 무능하여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게 사회적 통념입니다. 시인의 가난은 아마도 '시'에 내재하는 즉흥성이나 자발성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시'는 현실적 계산이 없는 마음, 혹은 그런 계산을 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어느 순간 일어나는 '발로'의 기록이거나 그런 마음에 예고 없이 찾아 오는 천둥 번개나 봄비 같은 것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시 쓰는 법도 배우고 가르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시 작법을 배워 쓰는 시보다는 '시는 시인이 쓰는 글이며, 시..

동행 2023.05.04

삶은 헌 신발을 신고... (2023년 4월 24일)

삶은... 무엇일까요?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일까요?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기회'일까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 '시시한 그림일기'에서 만난 이기철 시인은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 가면 더 많은 시와 일러스트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illustpoet&skinType=&skinId=&from=menu&userSelectMenu=true 시 한편 그림 한장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종이에 색연필 ​ ​ ​ ​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 입니다 이기철 삶을 미워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자는 것이지요 저 길가..

동행 2023.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