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33

딸 (2023년 4월 22일)

제겐 몸으로 낳은 딸이 없지만 마음으로 맺은 딸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제 어머니의 딸입니다. 어머니가 처음 만난 딸로서 때로는 시행착오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보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딸'이며 딸 가진 어머니인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딸들'을 바라보는 눈엔 사랑과 안쓰러움이 가득합니다. 김일연 씨의 시집 는 바로 그 어머니이며 딸인 세상의 모든 딸들을 노래합니다. 이 한영대역 시집의 첫 시는 '딸'입니다. 딸 짐 빼고 집 내놓고 용돈 통장 해지하고 내 번호만 찍혀 있는 휴대전화 정지하고 남기신 경로우대증 품고 울고 나니 적막하다

동행 2023.04.22

울어야 할 시간 (2023년 4월 16일)

4월 한가운데 라일락은 향기롭고 나무마다 연둣빛 새 잎들 아름답지만 오늘은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9년... 아직도 우리는 왜 세월호의 승객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단원고의 수많은 학생들이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지미 스트레인의 영상/노래 'Time 2 Cry (울어야 할 시간)'...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옷깃을 여밉니다. 선생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v5a21bY7og&ab_channel=JimmyStrain

동행 2023.04.16

문창재 선배님, 떠나가시네 (2023년 4월 11일)

선배님 아주 떠나시는 날, 귀한 비 날립니다. 어제 아침에야 부고를 보고 놀란 가슴으로 강 건너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선배님이 떠나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보다 5년 앞서 한국일보사의 기자가 되신 선배님, 편집국이 달라 함께 일한 적은 없어도 스치며 뵙는 풍모가 넉넉하고 시원하여 절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던 선배님과 훗날 아름다운서당의 교수로 만났을 땐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럽던지요.. 선배님은 제주의 클라스를 맡으시고 저는 서울에 있어 자주 뵙진 못했지만, 선배님과 저의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전 선배님이 를 상재하신 후 선배님을 연희동 고미정에 모시고 점심 대접 올린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때 집밥 닮은 한식을 맛있게 잡수시고 ..

동행 2023.04.11

노년일기 159: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4월 3일)

몸과 마음이 고단해 거짓말 하나도 못하고 만우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플 때조차 웃지 않고 보내는 날은 없으니까요. 가을부터 줄곧 무덤처럼 침묵했던 꽃나무들이 색색의 꽃을 피웁니다. 꺽다리 토마토 나무엔 그새 더 많은 열매가 열렸습니다. 자스민의 보라꽃이 하얗게 변하며 온 집안을 절간으로 만듭니다. 모든 것... 모든 흉한 것들과 소음과 어리석은 소치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지만, 사는 데 바쁜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지난 3월 6일 노년일기에 인용했던 손턴 와일더의 , 그곳에서 잠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을 방문한 죽은 에밀리가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Oh, earth, you're too wonderful for anybody to realize you."..

동행 2023.04.03

성공이란 (2023년 3월 30일)

내일이면 3월도 끝이 납니다. 2023년의 4분의 1이 지나갔지만, '이것을 했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4월부터는 '성공'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실린 '임의진의 시골편지'에 인용된 '성공'을 하고 싶습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시골편지'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300300085 “성공이란 남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여유. 남이 살아내는 인생을 향해 격려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와 계획을 중단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것. 상처받을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 차갑고 쌀쌀한 이웃에 예의로 대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이 떠돌 때 귀를 닫는 것. 슬픔에 잠긴 이를 위로하고 함..

동행 2023.03.30

노년일기 158: 마지막 인사 (2023년 3월 26일)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94세, 만 나이로는 93세입니다. 타고난 미모와 피부 덕에 연세보다 젊어 보이시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 고생하십니다. 비싼 보청기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대화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얘기하면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작게 하느냐?"며 나무라시고, 크게 말하면 "왜 소리를 지르느냐?"고 야단치십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러시는지 어머니는 큰소리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소리들이 모여서 입으로 나오는가?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약골이셨지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잘 들으셨는데, 타고난 건강 체질인 어머니는 왜 청력이 바닥나 외롭고 힘든 말년을 보내시는 걸까요? 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시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동행 2023.03.26

노년일기 157: 추억여행 (2023년 3월 17일)

어젠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가 전에 한국일보사 일곱 개 신문사에서 일했던 동료 여자 기자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일보, The Korea Times, 서울경제신문, 일간스포츠... '장명수 칼럼'으로 한국일보의 지가를 올리시고 이제는 이화학당 이사장으로 활약하시는 장명수 선배님, 체육기자로 문명(文名)을 떨치시고 이젠 가드닝 전문가가 되신 성인숙 선배, 언론인과 외교관을 거쳐 화가로 살고 계신 지영선 선배,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맑은 물' 노릇을 하고 있는 옛 동료들과 후배들... 참석자들 모두 한목소리로 '한국일보사에서 일했으니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런 인연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얘기하니 이젠 이승에 계시지 않은 많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신문사보다 앞서 견습기자 제도를 실시하여..

동행 2023.03.17

네 잎 클로버, 세 잎 클로버 (2023년 3월 4일)

어젠 동네 큰길과 골목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가득했습니다. 학교 많은 동네에 사는 재미를 만끽했다고 할까요? 학교 옆 카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어머니들로 붐볐습니다. 전엔 카페 안팎을 종횡무진하는 아이들이 눈에 거슬렸는데 이젠 귀엽기만 하니, 제가 나이 덕을 보나 봅니다. 종일 온갖 배움터를 드나들며 바쁘게 지내던 아이들이 모처럼 쉬는 시간을 즐기는구나 생각하니 아이들이 행복한 쉼표들처럼 보였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자라거라! 행운과 행복을 누리면서!'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후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에서 아름다운 클로버 무더기를 만났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김수자 씨의 그림은 온통 행운..

동행 2023.03.04

노년일기 154: 사랑받는 노인, 사랑을 잃는 노인 (2023년 3월 1일)

이틀 후 어머니의 생신을 앞두고 아들딸들과 배우자들이 어머니와 점심을 함께합니다. 젊은이는 하나도 없는 식탁, 가장 어린 사람도 예순이 넘었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화제는 건강과 질병, 임플란트와 틀니 얘기를 넘나듭니다. 식사 후에 간 카페에서는 한 테이블엔 어머니가 사위와 아들들과 앉고 다른 테이블엔 며느리들과 딸들이 앉습니다. 어머니는 보청기를 끼셨지만 자기 테이블의 얘기도 잘 못 들으십니다. 며느리들은 어머니로 인해 서운했던 점을 시누이들에게 얘기하고 시누이들은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얘기하며 올케들을 위로합니다. 이야기는 어머니를 넘어 며느리들의 어머니들로 이어집니다. 어떤 노인은 늙어서도 사랑받지만 어떤 노인은 나이를 얻을수록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원인은 무엇보다 아집(我執)입니다...

동행 2023.03.01

황소, 얼룩소, 칡소, 젖소 (2023년 2월 27일)

경향신문을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데 엄민용 기자의 '우리말 산책'처럼 고마운 글 때문에 아직 보고 있습니다. 우리말이 엉망이 되어간다고 안타까워하는 제가 우리말에 얼마나 무식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엄 기자에게 감사하며 오늘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옮겨둡니다. 우리말 산책 얼룩소는 ‘젖소’가 아니라 ‘칡소’다 ‘황소’ 하면 누런 털빛의 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황소는 털빛과 상관없이 “큰 수소”를 뜻하는 말이다. ‘황소’는 15세기만 해도 ‘한쇼’로 쓰였는데, 이때의 ‘한’은 “크다”는 의미다. 황소와 닮은꼴의 말이 ‘황새’다. 황새도 키가 큰 새이지, 누런 털빛의 새는 아니다. 황새의 옛 표기 역시 ‘한새’였다. 황소가 누런 털빛과 상관없음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

동행 2023.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