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84

'마중'해야 '배웅'한다 (2023년 8월 14일)

2주 전인가 '나는 솔로'를 보다가 '뭐지?' 했던 적이 있습니다. 먼저 만남의 장소에 도착해 있던 사람이 새로 온 사람을 맞이하며 자신이 '배웅'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중'이라고 해야 할 때 배웅이라고 하는 게 매우 이상했지만 너무 긴장해서 실수하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후에도 마중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경우 언제나 배웅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놀라웠는데 더 놀라운 건 그 사람의 '자기 소개'였습니다. 어른들의 단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나 어울릴 '마중'과 '배웅'의 혼동을 거듭한 그 사람이 소위 서울 명문대 출신의 직장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실수 -- 같은 실수를 두 번 이상 하면 '실수'가 아니고 '실력'이라 하지요..

동행 2023.08.14

노년일기 180: 고통의 시한 (2023년 8월 6일)

어머니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 외출을 좋아하셨고 걷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주말에 밖에서 두 딸과 점심을 하시고 나면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귀가하시곤 했습니다. 중년엔 등산을 즐기셨고 노년 초입엔 건강을 위해 춤을 배우시기도 했습니다. 올봄 만 아흔셋을 넘기신 어머니가 얼마 전부터 다리가 아프고 고꾸라질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끔 통증의학과에 가서 주사를 맞으시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흘 전 집 앞 경로당에서 함께 사는 맏며느리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혼자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경로당에 와서 자신을 데리고 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100 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 이튿날 아침엔 아예 혼자 일어서는 일조차 어렵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런 상태가 되신 어머니는 극심..

동행 2023.08.06

불을 끄면 (2023년 8월 3일)

수양딸 덕에 한국에서 가장 첨단적인 백화점이라는 '더현대' 구경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그냥 백화점이 아니라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2023년 현재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무수한 사람들, 지하 6층 주차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들... 그곳의 사람들은 그곳 밖의 사람들처럼 '다름'에 민감하겠지만, 그 '다름'은 불만 끄면 모두 사라지겠지요. 셸 실버스틴의 시가 얘기하듯... 다르지 않아요 땅콩처럼 작든, 거인처럼 크든, 우린 다 같은 크기에요 불을 끄면. 왕처럼 부유하든, 진드기처럼 가난하든, 우리의 가치는 다 같아요 불을 끄면. 붉든, 검든 주황 빛이든, 노랗든 하얗든, 우린 다 같아 보여요 불을 끄면. 그러니 모든 걸 제대로..

동행 2023.08.03

졸부들의 합창 (2023년 7월 27일)

한 동네에 오래 살면 동네를 닮는 걸까요? 오래된 동네의 주민들은 대개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옷으로 얘기하면 헌옷 같은 것이지요. 집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한 곳에 고층아파트 타운이 생기며, 본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새 동네의 주민들은 새옷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는데 덧붙여 티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입주한 아파트들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곳에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아파트들이 늘어나며 제 단골 카페에도 새로운 고객들이 늘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목소리가 크다는 겁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애, 너 뭐 먹을래?" "난 아아!" 하고 외치는 식인데 카페에 자리잡은 후, 즉 카페가 조그맣..

동행 2023.07.27

노년일기 176: 죽어라 살다가 (2023년 7월 15일)

전문적인 사기꾼이 아닌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모인 어제 점심 자리의 주제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월에 어머니를 잃은 친구, 며칠 전 아주버님과 사별한 친구, 남편이 아주 떠난 후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두 선배들... 죽음은 이 오랜 친구 모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돈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가 누울 공원묘지의 묫자리를 사려는데 몇 인 분짜리를 사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갖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건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식들이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

동행 2023.07.15

교도소의 셰익스피어 (2023년 7월 8일)

오랜만에 단골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셰익스피어의 을 읽었습니다. 옆방에서 떠드는 손님들 --나갈 때 보니 겨우 두명!--과 창가의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고 웃을 수 있었던 건 셰익스피어 덕입니다. 셰익스피어 생각을 하니 며칠 전 자유칼럼이 보내준 권오숙 박사의 글이 떠오릅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글...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셰익스피어를 읽고 달라지듯 카페를 소음 공장으로 만드는 이들도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달라질까요... 오늘 한국의 문학은 초입 난파의 풍경을 닮았지만 누군가는 문학의 본령을 살리려 인공호흡하듯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응원하며 권 박사의 글을 옮겨둡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자유칼럼으로 연결됩니다. http://www.freecol..

동행 2023.07.08

노년일기 173: 나쁜 일 속 좋은 일 (2023년 6월 28일)

공익법인 '아름다운서당'을 만들고 이사장으로 오래 일하신 선배님과, 그곳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사를 역임한 두 사람이 오랜만에 서울 시내 한복판 오래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작년 언젠가 만나고 처음입니다. 노년의 적조는 대개 노화와, 노화가 수반하는 질병과 관계가 있으니 만남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못 뵌 사이 선배님은 유명한 병의 환자로 병원 신세를 지셨고, 서당의 동료인 제 오랜 친구는 해외 여행 중에 다친 팔꿈치의 수술을 다시 받고 아직 재활 치료 중이었습니다. 저 또한 지난 주 내내 누워지내며 과연 오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으니, 세 사람 다 신고(身苦)를 겪은 셈입니다. 투병은 힘들었지만 투병을 회상하면서는 세 사람 모두 웃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과거에 두..

동행 2023.06.28

나는 솔로 (2023년 6월 20일)

텔레비전은 '바보 상자'라지만 세상과 세태를 반영하는 상자이기도 합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줄며 짝짓기 프로그램이 늘었습니다. 이혼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부부 상담 프로그램도 많아졌습니다. 배우나 탈렌트 아닌 사람들이 TV 화면을 채우는 일이 빈번한데, 그들이 화면에 나타나고 난 후 해당 프로그램의 댓글난은 그들의 신상 정보와 그들에 대한 평가로 가득 찬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출연하는 걸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출연해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밤이면 대개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봅니다.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은데 특히 이것을 보는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방송국에서는 '나는 솔로이니 짝을 ..

동행 2023.06.20

너희가 해바라기다! (2023년 5월 13일)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가로수 아래 핀 꽃들을 보며 해바라기다! 아니다! 목청을 높입니다. 노란 꽃이 아니니 해바라기는 아니고 같은 국화목에 속하는 꽃으로 보이지만, 저도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도 한마디 거들고 싶은 건 아이들이 꽃만큼 예뻐서입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스마트폰만 보며 걷는데 이 아이들은 찻길 옆 보도에 심긴 나무 아래 옹기종기 핀 작은 꽃들을 본 것입니다. '얘들아, 그 꽃은 해바라기가 아니야. 너희가 바로 해바라기야!' 마음 속으로만 얘기하며 아이들의 앞날을 축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컴컴해도 해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포기하지 마! 꿋꿋하게 자라서 주변을 밝혀줘!'

동행 2023.05.13

밥과 리즈: Bob and Liz (2023년 5월 10일)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제 상관은 로버트 뱅크스 (Robert Banks)박사라는 문정관 (cultural attache)이고 그의 아내는 리즈 (Liz)였습니다. 기자 노릇 15년 후 7년간 칩거(?) 했는데 소위 IMF 사태 (금융위기)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주한 미국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대사관은 정부인데 저는 정부와 여러모로 다른 언론계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는 대사관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4년 3개월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뱅크스 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해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제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고, 기자생활만 한 까닭에 행정에 어두운 제게 행정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아..

동행 202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