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141: 치과, 무섭지 않아! (2022년 11월 6일)

한 2주 전 입안 오른쪽 깊숙한 곳에 있던 윗니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너무 낡아 자연히 부서져서인지 통증도 없었습니다. 가기 싫은 치과, 마침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감기를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영화 '캐스트어웨이 (Cast Away)'가 떠올라 용기를 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척 놀런드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데, 치과 치료를 미뤘던 까닭에 스케이트 날과 바위로 스스로 문제의 이를 빼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침내 어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양심 치과 명단'에 있는 치과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2대 째 하는 치과라 했습니다. 손님 수도 적당하고 직원들도 가만가만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제 이들도 꼭 저만큼 늙어 있었습니다. 우선 코로나 19로 하지 못했던 스케일링을 하..

나의 이야기 2022.11.06

노년일기 140: 신발의 주인들 (2022년 11월 2일)

며칠 전 몸에 들어온 감기가 아주 함께 살자 합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한 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감기의 힘이 더 강해지나 봅니다. 웬만하면 해 떠 있는 시간에는 눕지 않지만 직립이 힘들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까무룩 눈 감았다 깨어보니 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제 몸에 앉았습니다. 그 먼길을 왔는데도 햇살은 따스합니다. 문득 신문에서 본 이태원의 신발들이 떠오릅니다. 수십 켤레인지 수백 켤레인지 주인을 잃은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쪼르르 바랜 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신발들에도 이 햇살이 담기겠구나, 그 신발을 신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되었고, 애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흰머리와 ..

나의 이야기 2022.11.02

노년일기 139: 밤, 그 사랑 (2022년 10월 27일)

밤의 계절입니다. '어두운 밤'의 '밤'은 짧게 발음하고 '맛있는 밤'의 '밤'은 길게 발음해야 합니다. 밤을 보면 '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면 부자' 라던 어린 시절 남동생의 말이 떠오릅니다. 남동생은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밤을 마음껏 먹고 있을까요? 생밤을 익혀 먹기는 생쌀을 익혀 먹기보다 어렵습니다. 맨 바깥 가시껍질을 벗은 밤에도 두 겹 껍질이 있습니다. 바깥 껍질은 단단하고 속 껍질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밤 껍질을 벗기는 데는 수고와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밤을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먹으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개는 부모나 배우자, 자녀 등 가족에게 먹이려고 살 겁니다. 밤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고롭게 껍질을 벗겨 낸 밤을 자기 ..

나의 이야기 2022.10.27

노년일기 138: 달팽아, 미안해 (2022년 10월 23일)

따스한 가을 햇살 위로 가을바람이 스칩니다. 왜 '가을 햇살'은 두 단어이고 '가을바람'은 한 단어일까요? 때로는 표준국어대사전이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바람을 느끼며 걷다 보니 간판 없는 채소가게 앞입니다. 배추 세 통들이 한 망이 금세라도 구를 듯 놓여 있습니다. 겉껍질은 시들었지만 물에 담가 두면 푸르게 살아날 겁니다. 배추를 보는 저를 보았는지 가게 사장이 소리칩니다. "배추 6천 원!" 6천 원이면 한창때 가을배추 값입니다. 배춧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했더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달팽이가 두 마리나 나옵니다. 달팽이가 앉은 배춧잎 조각 채로 화분 흙에 옮겨둡니다. 하룻밤 물에 담가두니 시들었던 잎들이 본래의 초록으로 돌아옵니다. 한 통에 5, 6천 원 배추가 되었습니다. 절여두었던 배추를 씻는데..

나의 이야기 2022.10.23

노년일기 137: 다음 카카오처럼은 (2022년 10월 19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13년 전에 포털사이트 '다음'에 블로그를 열었습니다. 사교를 좋아하지 않아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은 만큼 블로그를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다음 블로그'에 글을 쓰는 동안 '다음 블로그'는 여러 차례 변화를 꾀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변화는 늘 개선 아닌 개악이었습니다. 지난 9월 '다음 블로그'가 없어지니 '티스토리'로 이전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고 티스토리로 이전하면서도 늘 불안했습니다. 이번 변화는 또 어떤 개악으로 끝날까... 그런데 지난 주말 다음 카카오 데이터센터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화재는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카카오그룹에 속한 128개 회사들이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

나의 이야기 2022.10.19

노년일기 136: 사이좋은 모녀 (2022년 10월 12일)

며칠 전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카페 입구에서 바라본 너른 창가 자리에 중년 여인이 신을 신지 않은 발을 의자 팔걸이에 걸쳐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맨 다리가 팔걸이에 걸쳐진 채 덜렁거리는 모양이 끔찍했습니다. 여인의 건너편에는 젊은 여인이 앉아 있는데 그 모양이 아무렇지 않은 듯 한참 대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지만 그 집의 커피와 음악을 따라올 곳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들어갔습니다. 두 여인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는데 그들의 큰 목소리가 거기까지 오니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나 나가니 카페 주인 정진씨가 배웅차 따라나왔습니다. "저 사람들... 끔찍하네요. 내가 가서 얘기할까요? 발 내리라고?" 제가 말하자 저보다 현명한 정진..

나의 이야기 2022.10.12

노년일기 135: 제일 좋은 친구 (2022년 10월 4일)

'좋은 친구'는 누구일까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친구? 얘기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 그러면 '제일 좋은 친구'는 누구일까요? 제 생각에 그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입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 때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게 하는. '당신의 제일 좋은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이름이나 호칭을 댑니다. 아버지, 어머니, 영희, 철수 등 등. 하지만 제게 제일 좋은 친구는 늘 죽음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죽고 싶을 땐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지금 죽지는 말자, 이보다 더 힘들 때 죽자'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죽음을 시도했다가 운명 덕에 살아남은 후에도 죽음은 변함없이 힘든 상황을 견디게 ..

동행 2022.10.04

노년일기 134: 할머니 노릇 (2022년 10월 1일)

둘째 수양딸이 지난 오월 둘째 아기를 낳았습니다. 정신없이 구월을 보내다 문득 아기의 백일이 되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금반지를 사 보내고 싶어 금은방에 갔습니다. 한 돈짜리는 너무 비쌀 것 같아 반 돈 짜리 값을 물었더니 제 또래거나 저보다 조금 더 나이들었을 주인이 스마트폰으로 시세를 알아보곤 말했습니다. "16만 5천 원. 하나 줘요?" 16만 5천 원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 "아니오" 하고 금은방을 벗어나는데, 돈이 없으니 사람 노릇도 할 수가 없구나...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금은방에 있던 수많은 금붙이와 보석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인이 무례한 게 그가 가진 비싼 것들 때문일까 생각하니 더욱 씁쓸했습니다. 금은방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에 가서 두 아기와 부모의 양말을 골랐습니다. ..

나의 이야기 2022.10.01

노년일기 133: 화려한 결혼 (2022년 9월 5일)

어젠 조카의 결혼식 날, 늘 웃는 얼굴의 조카라 그런지 비가 와도 걱정이 되진 않았습니다. 옥외와 옥내를 아우르는 결혼식장은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아름다웠습니다. 의식은 옥외에서 진행되었는데 머리 위 높이 쳐 놓은 차양 덕에 신랑신부도 옥외 좌석에 앉은 하객들도 비를 맞지 않았습니다. 옥내에 앉은 하객들은 통유리를 통해 의식을 보았습니다. 종일 비가 내리다 멈췄다를 반복했지만 비도 결혼식의 화려함을 지우진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형제들, 조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반가웠습니다. '낳아 놓으면 큰다'는 말은 옛말... 저 아이들을 저만큼 키우느라 바쁘고 힘들었을 아이들 부모들이 대견하고 안쓰러웠습니다. 결혼식장이 커서 그런지 일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주차장 관리부터 뷔페 관리까지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

동행 2022.09.05

노년일기 132: 전문가 (2022년 8월 29일)

아래층 목욕탕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지 20일...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래층에 사는 분들은 세수하다가 뒷머리에 똑똑 떨어지는 물을 맞았으니 얼마나 불쾌했을까요? 우리 가족들은 삼십 도가 넘는 더위에 목욕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영 불편했습니다. 물 떨어지는 것을 보러 아래층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현관문엔 '0000교회'라 쓰인 작은 명찰 같은 게 붙어 있고 문을 여니 정면에 크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증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왔는데 문제에 대한 걱정이 큰 만큼 초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그 집들 모두 예수님의 초상을 입구에 걸어두진 않을 테니까요. 두 명의 '누수 전문가'가 다녀갔지만 문제를 찾아내지 ..

동행 202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