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131: 빚 갚기 (2022년 8월 25일)

젊은 시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얻고 또 돈을 빌려 집을 샀습니다. 그리곤 제법 열심히, 즉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참고 하면서 간신히 은행 빚을 갚았습니다. 다 갚고 보니 저는 젊지 않았습니다. 가끔 거울 속 흰머리를 빗으며 '그래도 빚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갚지 못한 빚이 제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봄이 끝나갈 땐 봄에 받은 사랑 빚을 갚지 못하고 여름을 맞으니 어쩌나 했는데 서늘한 바람이 아침을 가르니 이 한 해 동안 받은 사랑도 또 갚지 못하겠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전에는 '빚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빛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젠 '아무리 해도 이 生에서 진 빚을 갚지 못하고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건 부끄러움뿐입니다. ..

나의 이야기 2022.08.25

노년일기 130: 고무줄 (2022년 8월 19일)

몇 년 전만 해도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는 건 몹시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올여름은 반바지 두 벌로 버텼습니다. 다리 절반이 노출되니 시원한데다 뜨거운 직사광선이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말도 들어서입니다. 한 벌은 가족이 입던 것으로 엉덩이 부분이 해어져 꿰매어 입었지만, 헌옷수거함 출신인 다른 한 벌은 출신지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새 것입니다. 삼사 년 묵은 초가지붕 색과 짙은 남색인데, 두 바지 모두 면을 꼬아 만든 띠로 허리둘레를 조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허리밴드가 신축성이 없다 보니 바지를 입고 벗을 때마다 띠를 묶었다 풀었다 해야 해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띠를 빼내고 고무줄을 넣었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아, 또 하나 닮고 싶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고무줄 같은 ..

나의 이야기 2022.08.19

노년일기 129: 요섭의 속눈썹 (2022년 8월 10일)

오른쪽 눈의 속눈썹이 눈꺼풀을 찔러 상처가 났습니다. 나이들며 눈꺼풀이 내려오는데다 더위로 인해 피부가 거의 항상 젖어 있으니 속눈썹처럼 약한 자극에도 상처가 나는 것이겠지요. 쌍꺼풀의 겹진 부분이라 남의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쓰라립니다. 속눈썹 하면 요섭이 떠오릅니다. 경향신문 정치부 정요섭 기자...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던 그와 저는 1980년대 중반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출입기자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기자들이었고, 저는 당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에 있던 외무부 기자실에 출입하던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요섭과 저는 가끔 8층 창가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기자실의 큰 테이블에 앉아 뭔..

나의 이야기 2022.08.10

노년일기 128: 포기하겠습니다 (2022년 7월 25일)

오래 전 제게 보약을 지어주시던 선생님은 '나쁜 점은 하루라도 젊을 때 빨리 고쳐야 한다. 나이들면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꼭 나쁜 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기질은 나이들며 점차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흔 넘은 어머니와 일흔이 가까워지는 딸의 만남이 자꾸 삐그덕거리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하루라도 집에 머물면 병이 나신다는 어머니와 달리 저는 가능한 한 집안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많은 물건이 있는 곳을 매우 싫어하는데 어머니는 사교와 백화점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부르시면 싫다는 말을 못하고 백화점에 동행하곤 했습니다. 다녀와서 앓는 것은 저와 함께 사는 가족들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흔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외출을 좋아하시고 그 외출에..

나의 이야기 2022.07.25

노년일기 127: 절교 무심 (2022년 7월 15일)

전에도 이 블로그에 밝힌 적이 있지만 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 새끼'의 팬입니다. 아니 그 프로그램이 언제 방영되는지조차 모르니 프로그램의 팬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중심인 오은영 박사의 팬입니다. 밝고 자연스러운 얼굴, 정확한 우리말, 경청하는 태도, 전문가적 처방... 모든 전문가들이 오 박사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 나라 국민 모두 그의 프로그램을 보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오 박사의 프로그램을 볼 때면 언제나 부모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적인 능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힘은 물론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예의까지도 다 부모를 통해 습득하니까요. 그 '습득'은 태어난 후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시..

동행 2022.07.15

노년일기 126: 노인의 얼굴 (2022년 7월 9일)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려 하지만 어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엔 모기에 네 곳을 물렸고 오전엔 아름다운서당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사회 참석 중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오빠가 응급실에 갔는데 꽤 오래 입원해야 할 것 같으니 집에 혼자 계실 어머니를 챙겨달라는. 칠십 대의 이사장 님은 '전엔 즐겁게 하던 일이 이젠 힘에 부친다'며 이사장 직을 내려놓겠다고 하셨고, 이사 중 한 분은 생애 처음으로 깁스를 했던 왼팔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힘겨워 했습니다. 오후. 오전에 치과에 다녀오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치료에 대해 여쭈니 질문엔 답변을 안하시고 딴소리만 하셨습니다. 새로 산 보청기가 이상해 안 들리신다기에 목소리를 크게 하여 대화를 시도했더니 금세 목이 갈라지고 머리가 빙빙 돌아 쓰러질 것 ..

동행 2022.07.09

노년일기 125: 해후 (2022년 6월 23일)

살아 있어 좋은 점 한 가지는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의 어머니는 기억, 어머니 덕에 이번 주엔 두 번이나 귀한 해후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44년 만에 만난 신문사 후배는 그새 성공한 회사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 신문사에 견습기자로 들어와 머문 시간은 고작 6개월, 그때 함께 일했던 선배 중에 두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라고 했습니다. 으리으리한 호텔 식당에서 아름답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가 사준 고급 카스텔라를 들고 돌아오는데 참 기뻤습니다.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북악도 아름다웠지만 출세가 바꾸지 못한 그 얼굴의 맑음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사람에겐 아홉 개의 얼굴이 있다고 하고 저는 그의 얼굴 중 하나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코끼리보다는 한라산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코..

나의 이야기 2022.06.23

노년일기 124: 말하지 말고 (2022년 6월 14일)

첫 직장에서 만 12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때로는 교사로서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제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 실력 있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 기자로서는 존경스러웠지만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를 잘 못 쓰는 기자들을 꾸짖는 태도가 특히 거슬렸습니다. 잘못을 야단치는 데서 벗어나 '국민학교는 나왔냐?'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했으니까요. 그 선배에게 늘 당하던 기자 하나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을 때는 그 선배로 인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는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여성들로부터 전화가 자주 왔습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회사로 전화가 왔고 그러면 제일 후배인 제가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줄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2.06.14

노년일기 123: 사랑의 수명 (2022년 6월 5일)

아흔둘과 아흔셋 사이를 걷고 계신 어머니와 점심을 먹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나니 "여보세요?" 낯익은 음성이 들립니다. 반가움과 함께 슬픔이 밀려듭니다. 언젠가 이 번호에 전화를 걸어도 이 목소리가 안 들릴 때가 올 겁니다. 어머니 댁으로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태우고 식당으로 갑니다. 연희동의 중국식당을 고르신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길에 바뀝니다. "저기, 저 까만 건물에 있는 식당에 가자!" 고 하십니다. 늘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이 길다는데 오늘은 줄이 없습니다. "일요일엔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묵묵부답이신 걸 보니 보청기를 끼셨어도 들리지 않나 봅니다. 차에서 내려 입구로 가니 문이 잠겨 있습니다. 차는 이미 떠났으니 주변의 식당을 찾아 봐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새로..

나의 이야기 2022.06.05

노년일기 122: 옛 친구 (2022년 6월 2일)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이 있지만 오래된 친구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엔 열심히 자신을 탐구하고 이웃에 도움되는 삶을 지향해 영감을 주던 친구가 나이들며 일신의 안락만을 좇아 실망을 주기도 하고, '이 나이에 무슨 책을 읽느냐'며 무지를 자랑하거나 '이제 칠십이 코앞이니 내 맘대로 편하게 살겠다'며 안하무인적으로 행동해 부끄럽게 만드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날 때는 작은 선물과 함께 실망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엊그제 삼십 여 년 전 한 직장에서 근무했던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몇 년에 한 번씩 만났던 터라 그 친구의 변함없는 맑음을 알고 있었지만, 노년에 가까워지며 갑작스런 변화를 보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친구..

나의 이야기 2022.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