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1

노년일기 48: 땀과 눈물 (2020년 8월 30일)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8월이 끝나갑니다. 무지와 은사망상으로 무장한 채 세상을 누비는 하룻강아지들로 인해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꼴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분연히 나서서 어리석음을 꾸짖는 백성의 스승 한 분이 없으니, 그 결핍이 너무나 아픕니다. 아니 어쩌면 스승은 여러 분이되 그분들 모두 ‘난세엔 나서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나, ‘은거부하구隱居復何求 무언도심장无言道心長’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려는가? 말없는 가운데 도심이 자라네) 하는 주희의 시구를 실천하고 계신 것인지 모릅니다. 스승들이 그러하실 때 저 같은 질인이 할 일은 그저 제 자신을 들여다보며 뒷걸음질 치지나 않게 경계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은 나아감과 뒷걸음질을 반복하지만 몸은 나이 덕에 나아가고 있음을 땀 덕에 느낍니다. 아무리..

나의 이야기 2020.08.30

노년일기 47: 오빠의 길, 장손의 길 (2020년 8월 19일)

저는 동생은 셋이지만 오빠는 하나뿐입니다. 아들이 대접받고 종손은 더 대접받던 시절 종손으로 태어난 오빠는 부모님의 극진한 정성 속에 자랐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 지도를 보고 그린 지도는 원화를 능가했고, 삼국지의 본문 밖 여백에 그려넣은 만화는 본문보다 재미있어 동생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음악을 두루 좋아하고 노래도 잘했습니다. 이라는 노래책을 펼쳐놓고 바로 아래 동생인 저와 노래를 부르면 오빠는 늘 화음을 담당했는데, 처음 부르는 노래에도 화음을 참 잘 넣었습니다. 마음속으론 미술이나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오빠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팝송 모임에 나가고 월간 에 칼럼을 연재하여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가 되었습니다. 오..

동행 2020.08.19

노년일기 46: 사이좋은 부부 (2020년 8월 11일)

구순의 어머니와 점심을 먹는 건 주례행사입니다. 너무 덥거나 폭우가 내려 한 주쯤 거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 전부터 ‘집콕’을 좋아하는 저와 달리 어머니는 ‘매일 나가야 하는’ 분이니까요. 요즘 어머니와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사이좋은 부부를 여럿 보았습니다. 대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한 아이들을 대동한 40대 부부였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삼계탕 집에서 본 부부에겐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몇 인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계탕과 전기구이통닭으로 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 옆에는 빈 맥주병 세 개가 있는데 제가 도착한 후 바로 한 병을 더 주문했습니다. 큰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느라 바쁘고 작은 아이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꾸 소리를 질렀지만 아버지는 맥..

동행 2020.08.11

노년일기 44: 겉으로 보면 (2020년 8월 2일)

젖은 여름은 쨍쨍 마른 여름보다 덜 덥지만 수많은 걱정을 자아냅니다. 가장 괴로운 건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일 겁니다. 눅눅한 방에서 외로이 고통과 싸우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우울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도 걱정이고, 지각 출현한 매미들이 폭우로 인해 편히 울 곳을 찾지 못할 테니 마음이 아픕니다. 물난리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저만치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그저 생활을 마비시키고 가재도구를 쓸어가 버리는 재난으로 보이겠지만, 물난리는 훨씬 중요한 삶의 기록들을 지웁니다. 삶에 깃든 불행 중엔 물난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거의 평생 계속되는 불행도 있습니다. ..

나의 이야기 2020.08.02

노년일기 43: 빗물, 사라지는 (2020년 7월 29일)

새벽 두 시 거울과 욕조가 있는 방에서 누군가 부릅니다 낡은 잠옷을 입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빠안히 이편을 바라봅니다 여자는 잠옷보다 낡았습니다 누구신데 이 시각에 잠도 안 자고 어두운 거울 속에서 부르시나요? 내가 웃으니 낡은 입이 웃습니다 우린 전생 어느 구비쯤 친구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부자리는 그이의 미소처럼 낯익은데 누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이의 눈엔 왜 빗물이 고였을까요? 눈을 감으니 그이도 나도 빗물도... 모두 사라집니다

나의 이야기 2020.07.29

노년일기 42: 고전음악의 힘 (2020년 7월 23일)

귀가 들리는 사람에게 세상은 소리의 세계입니다. 빗소리와 새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있는가 하면 거칠고 큰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소음도 있습니다. 대개 도시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적고 그 소리마저 소음이 삼켜 버리는 일이 흔합니다. 얼마 전부터 귀가 자꾸 아프더니 마침내 며칠 전 소음에 지친 두 귀가 속삭였습니다. ‘제발 우리 몸의 더께를 씻어내 주오.’ 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가 듣기를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오페라 아리아들을 들었습니다.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 ‘Una Furtiva Lagrima(남 몰래 흐르는 눈물)’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 귀가 행복해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은 소프라노 송..

나의 이야기 2020.07.23

노년일기 41: 매미 같은 사람, 물고기 같은 사람 (2020년 7월 21일)

7월이 깊어가는데 매미가 울지 않는다고 끌탕하는 제 목소리를 매미들이 들었나 봅니다. 창문에 서서 외출하는 가족을 배웅하는데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어디쯤에서 매미가 웁니다. 야호! 시계를 보니 1014. 제게만 의미 있는 숫자가 탄생합니다. 20207211014. 세계에는 1500여 종의 매미가 있고 그 중 15종쯤이 한국에 사는데, 한국의 매미들은 대개 1년에서 5년까지 애벌레로 산 후 날개 달린 성충이 되어 한 달 안팎을 산다고 합니다. 긴 준비기간을 보낸 후 지상에 나와 매앰 맴 쓰르르 공기를 흔드는 매미들은 어설픈 공연을 싫어하는 완벽주의자 뮤지션 같습니다. 그래서 옛 유학자들이 매미는 다섯 가지 덕을 갖추었다며 칭송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무위키의 매미 항목에 보면, “머리에 홈처럼 파인..

나의 이야기 2020.07.21

노년일기 40: 불행을 광고하라(2020년 7월 18일)

어제는 제헌절, 뜨거운 햇빛 아래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오래된 질문을 소환했습니다. 법은 무엇인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자 붙은 직업인, 특히 법 집행에 종사하는 검사, 판사, 변호사는 결혼상대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면 ‘법은 권력의 시녀’라 그렇다며 웃으셨지요. 짧지 않은 시간 지구인으로 살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볼 때면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선행은 법과 상관없이 일어나며 악행은 법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믿고, 약은 사람은 이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법은 종교를 닮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법과 무관한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습니다. 제게 이 영악무도한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어린 자녀가 있다면 저는 결..

나의 이야기 2020.07.18

노년일기 39: 소나무여, 소나무여 (2020년 7월 7일)

아침에 창문을 열면 뒷산의 산내음이 흘러들고 거의 온종일 새소리가 들립니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뒷산 덕에 시간의 흐름과 시간이 하는 일을 시시각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집이 산기슭에 기대앉은 모양새이니 집안에 앉아 산의 품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기온도 지하철역이 있는 곳보다 2~3도 낮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아파트는 한 평당 가격이 매우 낮습니다. 고층이 아니고, 100세대 조금 넘는데 평수가 다양해 가격 형성이 어렵다고 합니다. 주민들 중에 아파트 값이 왜 이렇게 싸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보다 최근에 이사 온 사람들의 불평이 높습니다. 집 값이 싸서 온 사람들이 오자마자 싸다고 불평하니 실소가 나옵니다. 조경을 하면 보기에도 좋고 아파트..

나의 이야기 2020.07.07

노년일기 38: 이별은 어려워라 (2020년 7월 4일)

마침내 2G폰과 이별했습니다. 오래된 관계가 끝날 때에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어젠 하루 꼬박 누워서 지냈습니다.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한 건 2000년 어느 날입니다. 그때는 그게 2G폰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휴대전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회사 업무에 필요하니 소지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휴대전화가 싫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2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휴대전화가 ‘진화’되며 3G폰, LTE, 5G폰 등으로 바꾸라는 회유와 종용이 이어졌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이 블로그에 쓴 적이 있지만, 새로 나오는 전화기들이 너무 크고 비싼데다가 성능도 너무 많아 싫었습니다. 제게..

나의 이야기 202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