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6

노년일기 259: 감기 선생 (2025년 6월 19일)

남들 눈엔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하루하루인데도제 몸엔 버거운가 봅니다. 또 감기에 걸려 느리게흘러가는 시간 속을 유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감기의 증세가 심해진다는겁니다. 전에는 별다른 증세 없이 열만 올랐고타이레놀 몇 알 먹으면 호전되었는데, 이젠 기침까지하는 데다 타이레놀을 먹어도 물러갈 생각을하지 않습니다. '감기 선생, 내가 좀 부주의했소. 이제 조심할 테니좀 봐주시오!' 그러나 감기 선생은 듣는 둥 마는 둥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고약한 감기에게도 고마운 점은 있습니다.첫째는 감기 덕에 30도가 넘는 날에도 더위를 느끼지못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 몸의 노화에 대해 더 잘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위를 느끼지 못하니 선풍기도 켜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나의 이야기 11:25:53

노년일기 258: 박수의 힘 (2025년 6월 13일)

가끔 바느질을 합니다. 오늘은 집에서 입는 검정 원피스에 주머니를 답니다. '걸음'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 전화기에 유일하게 깔려 있는 앱은'걸음 앱'인데, 전화기가 몸의 움직임을 감지해 제 걸음 수를 기록합니다. 하루의 끝, 목표 걸음 수를 채우면 전화기화면에서 꽃가루 같은 게 쏟아지며 박수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아주기분이 좋습니다. 박수 받을 일이 거의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오랜만에 박수 소리를 듣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박수 소리를 들으며 결심합니다. 내일 또 걸음 수를 달성해 이 소리를 들으리라! 그런데 검정 원피스엔 주머니가 없어전화기를 넣고 다닐 수 없으니 주머니를다는 겁니다. 박수가 실질을 유도하는구나,이게 바로 칭찬의 힘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어설퍼도 무언가..

나의 이야기 2025.06.13

노년일기 257: 나의 꿈은 전문가 (2025년 6월 7일)

지난달 독일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 주자로활동하는 지인이 한국에 왔을 때였습니다.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 동네 제 단골 카페로커피를 마시러 갔습니다. 조금 늦게 가서인지 카페에 손님이 없었습니다.커피를 마시고 맛을 칭찬하고 난 음악가는 생후 9개월된 아들 루드비히를 안고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루드비히?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떠올랐습니다. 조금 있다 아기가 엄마에게 가겠다며 보채자 아이를아내에게 안겨준 후 그가 카페 주인에게 영어로 물었습니다. "여기 이 악기 만져봐도 되나요?"카페 주인이 그러라며 오래 쓰지 않아 쓸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카페의 단골이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악기가 그 자리를 벗어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악기를 만지작거리던..

동행 2025.06.07

노년일기 256: 돈은 어디로 갔을까? (2025년 5월 29일)

고등학생 때 동네 초등학생을 가르쳤습니다. 대학생 때도 저보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거나사회조사원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벌었고, 대학 졸업 전 신문기자가 되어 돈을벌었습니다. 결혼 전에 번 돈은 그대로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결혼 후에는 어려운 친정에 거의 매일 뭔가를사들고 들렀습니다. 저는 명품을 산 적이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께는 좋은 것만 사드렸습니다. 직장생활에서나 직장 밖 생활에서나 돈은 거의 사람에게 썼습니다. 후배들의 월급이저보다 적으니, 저 사람이 나보다 어렵게 사니,밥을 사는 식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방송을 진행하고 글을 쓰고 번역하여 돈을 벌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오랫동안 돈을 벌었는데저는 여전히 '가난'하다는 겁니다. 제 '가난'은 집을 소유한 ..

나의 이야기 2025.05.29

노년일기 255: 독수리처럼 (2025년 5월 20일)

대통령 후보들의 경력을 보며 짧지 않은 제 생애를 돌아봅니다. 신문기자, 통신기자,대사관 전문위원, 방송 진행자, 칼럼니스트, 아름다운서당 교수,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자, 출간되지 않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온 줄 알았는데 제가 한 일은 오직 하나,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남과 있어도 홀로 있는 일, 매 순간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엔 관성이 있으니사람들의 인생 또한 관성을 보여 줍니다.사기꾼들이 죽을 때까지 사기를 치는 식이지요. 그러니 저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글을 쓸 겁니다.가능하면 미국 시인 엘리너 와일리 (Elinor Wylie: 1885-1928)가 노래했던 '독수리'처럼 살면서. 독수리와 두더지 악취..

나의 이야기 2025.05.20

노년일기 254: 층계참에서 (2025년 4월 8일)

타이레놀을 먹어도 열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신을 구속 당한 듯꼼짝 못 하고 누워 보냈습니다. (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과로라고 할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 거지? 남의 몸 같은 제 몸을 관찰 또 관찰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노화는 계단식으로 진행된다는 말을생각했습니다. 평평한 듯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나타나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 그게노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계단에서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느다란 난간을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위태로운 계단을 몇 개 내려가고 나면 다시 평평한 길이 나오지만,살 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계단이 나타납니다.  두꺼운 계단 두어 개를 내려가 층계참에 이른..

나의 이야기 2025.04.08

노년일기 253: 깨어나라! (2025년 3월 31일)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장점과 단점을 두루 가진인간입니다. 장점은 아마도 책임감일 겁니다.어떤 일을 하기로 하면 가능한 한 주어진 시간  안에 잘해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단점은 장점에 비해 훨씬 많은데, 그중에서도 문제가되는 것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것입니다. 열이 올라도 웬만큼 올라서는 신경 쓰지 않고살던 대로 살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고열에 잡혀  잘하던 노래를 못하게 되었지만, 습성은 잘 변하지않는 것 같습니다. 그 습성 때문에 이틀여를 꼬박 누워 있다 일어나 보니눕기 전에 사다둔 봄동이 저처럼 시들어 있습니다.봄동을 물에 담가 놓고, 누워 보낸 시간과 그 앞뒤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 시간이 제게 해준 말은 무엇보다 살던 대로 살지 말고 관성에서 '깨어나라!'입니다. 어..

나의 이야기 2025.03.31

노년일기 252: 토마토 거울 (2025년 3월 22일)

창가의 토마토 나무에 다섯 개의 열매가 열린 건한겨울이었습니다. 손톱만한 열매를 처음 보았을 땐방울토마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겨울 햇살도 햇살이라 열매가 자꾸 커졌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난 방울토마토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빛깔은 짙푸른 채 변하지 않았습니다.몸집이 커지는 데는 햇살로 족하지만, 몸이 익는 데는햇살의 온도가 중요한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겨울 날씨와 봄 날씨가 엎치락뒤치락하더니한낮엔 봄에 여름 몇 방울이 섞인 듯 더워졌습니다.그러더니 대번에 토마토의 색깔이 달라졌습니다.푸름에 붉음이 섞이기 시작한 겁니다.   창밖에 눈 내리는 날 짙푸른 토마토를 보면안쓰러웠는데, 푸름과 붉음이 보기 좋은 모습을보면 대견합니다. 오늘 같은 날씨가 며칠 계속되면..

나의 이야기 2025.03.22

노년일기 251: 즐거운 취미 활동 (2025년 3월 12일)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독서를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있고 노래 부르기가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여행이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취미는김치 담그기입니다. 직장생활을 오래했지만, 김치는 선물로 받았을 때를빼고는 거의 항상 담가 먹었습니다.  '아니, 김치 담그기가얼마나 힘든데 그게 취미라니요?'하는 사람이 있을지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힘든 건 그 일이 힘에 부칠 때입니다.저는 김치를 힘에 부치게 '전문적으로' 담그지 않고조금씩 재미를 느낄 만큼씩만 담급니다. 어여쁜 배추를 한두 포기 사거나 올망졸망 귀여운 총각무 (알타리무) 두어 다발, 오이 한두 봉을 사서 담급니다. 물론 김장할 땐 좀 더 많은 양을 하지만, 그래 봤자 배추 세 통, ..

나의 이야기 2025.03.12

노년일기 250: 그의 어머니 (2025년 3월9일)

가끔 가는 베이커리카페의 사장님으로부터시집을 선물받았습니다. 라는 제목에 마음이덜컹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떤 구절들이 돌부리 되어저를 주저앉혔습니다. 어려운 시어도 없고 세련된기교도 없는 단어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부끄러워하며 꺼내놓은 진심이었습니다.  은평구에서 금은방을 한다는 시인, 빛나는 것들사이에 앉아 오히려 마음과 표현을 벼렸을 시인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졸저 에도 썼지만, 우리는 모두 시인입니다.사는 데 바빠 자신이 시인임을 잊은 사람들이 많지만, 조성찬 님은 자신이 시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이 모두 조성찬 님처럼 시를 쓰며 살면 세상은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겁니다. 그의 시 '어머니의 전화' 속 '어머니 49재 지낸 게엊그제였는데/뻔히 알면..

동행 202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