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6

노년일기 217: 사일러스 마너 (2024년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 나라를 위해 전사하거나 순직한 사람들, 즉 나라를 사랑하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조기를 걸며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을 생각하니어제 읽기를 끝낸 책이 떠오릅니다.조지 엘리엇 (George Eliot: 1819-1880)의입니다. 2024년에 1861년에 출판된 소설을 읽는다는 건무슨 뜻일까요? 독자가 19세기 영문학 전공자라는 뜻? 지금 자신을 둘러싼 21세기적 현상들보다 19세기를 더 편하게 느낀다는 뜻? 저는 영문학자가 아니니 후자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그러나 19세기 또한 21세기만큼 불합리했던--불합리의유형만 다를 뿐--시대임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시대에 태어나도 그 시대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저는 그들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럼에도..

나의 이야기 2024.06.06

노년일기 216: 숫자 게임 (2024년 5월 28일)

그 사람과 나는 4에서 시작했지요.5, 7, 3, 9... 우리는 두서없이 달렸지요. 그 사람과 나는 70에서 시작했지요.80, 30, 100... 우리는 띄엄띄엄 그네를 탔지요. 그 사람과 나는 301에서 시작했어요.오래된 시간들이 우리 사이로 흘렀지요.우린 느리지만 빠르게 흘렀어요.1003, 4012, 8654... 때로 시간은 우리를집어삼키고 우리는 깊은 바다의물고기들처럼 떠오르고 가라앉아요. 숫자마다 얼굴, 숫자마다  훌쩍임, 노오력, 신기루, 뒷걸음질... 숫자에서 도망치다 보면 또 다른 숫자의 구멍에 빠지는 거예요. 이 게임은 언제 어떻게 끝이 날까요...

나의 이야기 2024.05.28

노년일기 213: 보청기를 끼세요! (2024년 5월 2일)

오랜만에 간 은행은 노인정 같았습니다.기다리는 사람의 80퍼센트는 노인이었습니다.직원이 없는 창구가 2~30퍼센트쯤 되니기다림은 길었습니다. 은행은 큰 영업 이익을기록했지만 창구 직원을 많이 줄였다고 합니다. 오전인데도 창구의 직원들이 지쳐 보여안쓰러웠습니다. 저도 머리가 하얀 노인이지만어떤 노인들은 미웠습니다.  미운 노인들 중엔 귀가 안 들리는 노인이많았습니다. 은행원이 큰소리로 말해도 안 들린다며 같은 말을 대여섯 번 하게 하는 노인이 흔했습니다.  혼자 은행에 올 정도로 건강하다면 보청기를 맞춰 낄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은행원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힘겨움을 다소나마 덜어 줄 수 있을 텐데...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 중엔 듣지 못함을한탄할 뿐, 듣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주변인들이얼마나 ..

동행 2024.05.02

노년일기 212: 풍선껌 부는 '예쁜' 노인 (2024년 4월 29일)

어젠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의정부에 다녀왔습니다.제 인생은 여러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데, 오래된빚쟁이 중 한 분인 이모를 뵈러 간 것입니다.  용민동에서 제일 좋다는 요양원에 계신 이모가휠체어를 타신 채 나타나셨습니다."이모!" 소리치는 제게 이모는 "아이구 예뻐라! 어쩜 이렇게 예뻐!" 하셨습니다. 윤석열식 나이로 곧 70세가 되는 흰머리에게 예쁘다니요?! 그리고 곧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눈 속에 있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더니, 이모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1981년 초 어느 날 어머니를 만나러 친구분 댁에갔다가 그 친구분의 고교 동창생인 이모를 처음만났습니다. 제가 떠난 후 이모가 저에 대해 물었고, 동창인 집주인이 제가 신..

동행 2024.04.29

노년일기 211: 그 방이 자꾸 가라앉는 이유 (2024년 2월 7일)

1415호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한 침대 주인의 84년 한 침대 주인의 94년 한 침대 주인의 58년 한 침대 주인의 87년 리베로 간병인의 77년 작은 방에 400년이 실려 있습니다. 꼬마 문병객 둘이 바쁜 경비원 뒤로 숨어듭니다. 꼬마들은 애드벌룬이 되어 1415호를 밀어올립니다. 침대의 주인들과 간병인의 웃음이 날개를 단 듯 솟구칩니다. 꼬마들이 떠난 1415호는 길고 무거운 침묵입니다. 꼬마들 뒤에 놓인 짧은 시간과 꼬마들 앞에 놓인 긴 시간이 거주자들의 뒤에 놓인 긴 시간과 앞에 놓인 짧은 시간과 오버랩되어 낡은 몸들이 뒤척입니다.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주자들 모두 기억해 낸 것이지요. 결국 세계의 배들은 모두 침몰하거나 해체된다는 걸.

동행 2024.02.07

노년일기 210: 이웃 사람, 이웃 선생 (2024년 2월 5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2024년 한국에서는 '이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던 이웃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서둘러 카페를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이웃 복'이 필요한 곳이 또 하나 있음을 어머니 덕에 알았습니다. 바로 병실입니다. 몇 년 전 2인실에 입원한 환자를 돌보느라 병실에서 며칠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있던 이웃 환자는 가끔 신음소리를 낼 뿐이었는데, 뒤이어 들어온 이웃은 특정종교와 관련된 말과 노래를 크게 틀어놓아 잠을 잘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었습니다. 직접 얘기했다가 싸움이 될까봐 간호사실에 얘기하자 간호사실에서 병실 규칙을 들어 중단시켰습니다. 어머니 병상 바로..

동행 2024.02.05

노년일기 209: 낡은 것은 몸뿐 (2024년 1월 25일)

병원 침상에 누우신 어머니의 몸을 만지다 보면 이 몸이 우리 어머니 것인가 낯설기만 합니다. 탄탄하시던 근육이 한두 달 만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매끄럽던 피부는 막대기를 덮은 낡은 옷 같으니까요. 그러나 시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영혼은 여전히 낯익은 사랑입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몸이 낡고 피부엔 주름이 생기지만, 그 몸에 깃든 영혼은 낡음과 주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일까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1865-1939)도 그렇게 느꼈던가 봅니다.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동행 2024.01.25

노년일기 208: 잠시 숨어 있는 순간 (2024년 1월 22일)

어머니가 입원하신 지 17일째... 병원에 드나들다 보면, 특히 연세가 많아 회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분들 사이에 있다 보면 자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다가 죽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혼자 죽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죽음은 아픔처럼 혼자 겪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의 순간도 살던 방식대로 맞으려 하는가 봅니다. 부디 각자가 원하는 죽음을 맞기를, 아니 그 죽음을 맞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생生을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안락사를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의사 베르테 케이제르는 수많은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쓴 책 에서, 밤 사이에 홀로 죽은 반 리에트 씨에 대해 얘기합니다. 케이제르..

동행 2024.01.22

노년일기 207: 강물이 흘러가는 곳 (2024년 1월 17일)

가끔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는데, 근래엔 한참 그러지 못했습니다. 강물을 바라보는 건 생生을 바라보는 것인데... 그러다 헌책방에서 산 작은 책을 읽었습니다. 팀 보울러(Tim Bowler)의 . 표지에 강이 있어 이 책을 집어든 건지 모릅니다. River Boy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강물 소년'이 될 수도 있고 '강의 소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소설의 '강'은 인생을 은유한다고 합니다. 소설의 첫 장이 시작하기 직전 페이지에 구약성경의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Ecclesiastes 1:7 All the rivers run into the sea; yet the sea is not full; unto the place from whence the rivers c..

동행 2024.01.17

노년일기 206: 재활용 어려움 (2024년 1월 11일)

선물받은 수분크림을 다 썼습니다. 빈 통을 재활용품 수거함에 넣으려다 보니 통 표면에 통은 PET, 뚜껑은 Other라고 표기되어 있고 Other 아래에 '재활용 어려움'이라고 써 있습니다. 며칠 전 선물받은 다른 수분크림을 꺼내 봅니다. 통은 플라스틱, 뚜껑은 PP '재활용 우수'라고 써 있습니다. 혹시 사서 쓰게 된다면 이 제품을 써야겠습니다. 병원에 드나들며 고령의 환자들을 많이 보아서 일까요? 전 같으면 공분을 일으켰을 '재활용 어려움'이 어머니 병실의 노인들을 상기시켜 슬픔을 일으킵니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그 방의 모든 분들은 각자 타고난 능력은 물론 타고나지 못한 능력까지 동원하며 죽어라 살아내신 후에 지금에 이르렀을 겁니다. 언젠간 내 몸도 재활용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

동행 202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