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2

노년일기 171: 어떤 자서전 (2023년 6월 11일)

태어난 직후는 절망의 시기: 또 태어나다니! 십대는 절망과 도피의 시기: 어차피 죽을 텐데 왜 늙어 죽도록 살아야 할까... 책 속으로 도피. 이십대 삼십대는 가면의 시기: 온 힘을 다해 죽음에의 욕구를 누르며 남들과 같은 척하기. 사십대는 조롱의 시기: 아직 살아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한편 삶과 죽음을 어렴풋이 파악함. 오십대는 가끔 웃는 시기. 육십대는 조금 더 자주 웃는 시기. 칠십은 낯익은 절망과 만나는 시기. 희망이 보이는 시기.

나의 이야기 2023.06.11

노년일기 170: 큰 나무 아래 (2023년 6월 7일)

이 나라는 아직 건설 공화국이라 자꾸 큰 나무를 베거나 뽑고 작은 나무를 심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교 앞에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이 많았는데, 학교 앞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게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 한 귀퉁이에 있는 산인데 아직 한 번도 가 보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지금의 룸메이트가 제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그때이지만 제 꿈은 지금과 같았습니다. 늘 큰 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남편이 가난한 아내의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이니 전국에서 가장 값이 싼 산이었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살다가 힘들 땐 그 산을 생각했습니다. 난 언제든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나의 이야기 2023.06.07

노년일기 169: 유월의 기도 (2023년 6월 1일)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늘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지혜는 버릴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용기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겠지요.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 쓰지 말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한 발씩 앞으로!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 AD)의 명상록 9권 33번 째 문단이 친구 같습니다. 33. All that your eyes behold will very quickly pass away, and those who saw it passing will themselves also pass away very quickly; and he who di..

나의 이야기 2023.06.01

노년일기 168: 나의 전생 (2023년 5월 28일)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전생을 불러냅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生에서 저는 비였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서는 목마른 풀이었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선 젖은 풀 사이를 킁킁대는 떠돌이 개였고, 적어도 두어 번은 젖은 잎새에 매달린 무당벌레였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래 못 본 친구처럼 반갑고 남들이 잡초라 하는 풀들이 제 눈엔 그리 아름다운 거겠지요. 그러니 남의 손에 이끌리는 개들과 풀잎 위 위태로운 무당벌레 모두 그리도 애틋하겠지요. 사람으로 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살 때 새긴 작은 브이 (V)자가 지금도 제 이마엔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살았기에 파스타를 여러 끼 먹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중국, 프랑스, 일본, 영국, 독일, 인도, 쿠바, 베트남, 남아프리카,..

나의 이야기 2023.05.28

노년일기 167: 나의 노래 2 (2023년 5월 26일)

지난 5월 20일 이 블로그에 월트 위트먼의 시 'Song of Myself' 일부를 '나의 노래 1'이라는 제 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그 글의 속편입니다. 제가 자꾸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시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게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음에 시달린 귀, 쓸데없는 것들을 보느라 지친 눈, 불필요한 말을 하느라 피로한 입, 무엇보다 세상을 떠돌면 떠돌수록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2: I think I could turn and live with animals, they are so placid and self-contain'd, They do not sweat and whine about their condition, They do not..

오늘의 문장 2023.05.26

노년일기 166: 나의 노래 1 (2023년 5월 20일)

오랜만에 응급실 카페에 앉아 월트 휘트먼 (1819-1892)의 'Song of Myself (나의 노래)'를 읽으니 아주 오래된 평화가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오십 년 전 갓 입학한 대학의 텅 빈 도서관에서 묵은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행복과 평화... 나의 행복은 이런 순간에 피어나는 꽃이고, 이 꽃은 50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습니다.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그의 시집 에 실려 있는데, 1855년 자비 출판한 1판에는 제목 없이 실렸고 역시 자비 출판한 2판에는 'Poem of Walt Whitman, an American (미국인 월트 휘트먼의 시)'로 실렸다가 1881~1882년에야 '나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52편 중 30편의 몇 구절이 특별히 와닿아 아래에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나의 이야기 2023.05.20

노년일기 165: 운전면허 없이 (2023년 5월 15일)

친구의 남편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10만 원이 들어있는 교통카드를 받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몇 해 전 쓰러져 시야가 좁아졌는데 시야는 회복되었지만 몸은 그 시간만큼 나이 들었겠지요. 아직 70대 초반인데 뭘 벌써 면허를 반납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면허가 '자유' 면허라고 생각하거나 자가용을 '자아의 확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면허를 반납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자동차일뿐 자유도 자아도 아니라고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1970년 대 후반 신문기자 시절 운전을 배웠습니다. 기자 노릇을 하려면 여기저기 다녀야 하니 배워두라고 신문사에서 서부자동차학원에 등록해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운전석에 앉아 클러치, ..

나의 이야기 2023.05.15

노년일기 164: 살아 있는 사람들은 왜? (2023년 5월 11일)

지난 4월 말 아파트 회장이 된 후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대표자회의 구성원들과 하루에 한두 번씩 회의를 하고 그래도 미진한 얘기는 전화로 하며 지난 회장이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습니다. 저 혼자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만 다른 분들의 지혜와 지식 덕에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합니다. 다행인 건 이런 상황에서도 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예기치 않은 나쁜 일에 휘말리면 일의 복잡성에 비례한 두통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제는 풍경을 바라보듯 상황을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습니다. 제가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된 데는 여러 친구들의 공이 큽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 친구들과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책 친구들... 요즘 바로 옆에서 저를..

나의 이야기 2023.05.11

노년일기 163: 아카시아 (2023년 5월 7일)

뒷산에 아카시아가 흐드러진 줄도 모른 채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어느 날 앞창을 여니 아카시아 향기가 와락 저를 감쌌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안아주는 향기가 저절로 눈을 젖게 했습니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을 피운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데도 그들은 화내는 대신 산을 내려 돌아와 포옹을 해주었으니까요. 이튿날엔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지겠구나 마음을 졸이면서도 뒷산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 이틀 후 내다보니 떨어진 흰 꽃들이 무수히 산의 배께를 덮고 있지만, 나무마다 떨어지지 않은 꽃들이 환했습니다. 꽃의 수가 준 데다가 습기를 머금어 향기는 줄었어도 뒷산은 여전히 아카시아 천지였습니다. 아카시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비를 ..

나의 이야기 2023.05.07

노년일기 162: 그의 한마디 (2023년 5월 2일)

저의 무능함을 높이 산 사람들이 저를 우리 아파트 회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숫자, 특히 돈에 관해 문외한인데다 어떤 사안 앞에서도 재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반응하는 저의 '투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본디 이런 사람으로 살아왔고 세상살이에서 이것은 약점이지 장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숫자가 잔뜩 적힌 문서 앞에서 망연할 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멀리서 수양딸이 보내준 짧은 문자가 저를 위로합니다. "또 공덕을 쌓으시겠네용ㅋ 아파트 사람들은 좋겠어요^^ 무리하지만 마세요~ㅎ"

나의 이야기 2023.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