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163: 아카시아 (2023년 5월 7일)

뒷산에 아카시아가 흐드러진 줄도 모른 채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어느 날 앞창을 여니 아카시아 향기가 와락 저를 감쌌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안아주는 향기가 저절로 눈을 젖게 했습니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을 피운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데도 그들은 화내는 대신 산을 내려 돌아와 포옹을 해주었으니까요. 이튿날엔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지겠구나 마음을 졸이면서도 뒷산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 이틀 후 내다보니 떨어진 흰 꽃들이 무수히 산의 배께를 덮고 있지만, 나무마다 떨어지지 않은 꽃들이 환했습니다. 꽃의 수가 준 데다가 습기를 머금어 향기는 줄었어도 뒷산은 여전히 아카시아 천지였습니다. 아카시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비를 ..

나의 이야기 2023.05.07

노년일기 162: 그의 한마디 (2023년 5월 2일)

저의 무능함을 높이 산 사람들이 저를 우리 아파트 회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숫자, 특히 돈에 관해 문외한인데다 어떤 사안 앞에서도 재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반응하는 저의 '투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본디 이런 사람으로 살아왔고 세상살이에서 이것은 약점이지 장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숫자가 잔뜩 적힌 문서 앞에서 망연할 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멀리서 수양딸이 보내준 짧은 문자가 저를 위로합니다. "또 공덕을 쌓으시겠네용ㅋ 아파트 사람들은 좋겠어요^^ 무리하지만 마세요~ㅎ"

나의 이야기 2023.05.02

노년일기 161: 오래 살아 좋은 점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제가 지금의 나이까지 살 줄은 몰랐습니다. 힘든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언제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살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십 대 신문기자 시절 만난 미국인 사회복지학 교수 샤츠 박사-- 성만 떠오르고 이름은 떠오르지 않네요-- 덕에 마흔여덟까지 살아도 괜찮겠구나 생각했고, 마흔여덟에 만난 사회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서 예순여덟에도 멋질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 나이를 넘겨서까지 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은 자꾸 떠나가시고, 세상의 짐 또는 젊은이들의 짐이 될 것 같은 동년배들이 늘어나는 걸 보며 오래 사는 것은 무서운 일이구나, 축복 아닌 형벌이나 재앙이구나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어제 새벽 오래 살아..

나의 이야기 2023.04.30

노년일기 160: 4월의 고민 (2023년 4월 27일)

되도록이면 밖으로 나가거나 복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을 피하고 조용히 살았는데... 질문이 일어납니다. 이대로 나 혼자 평화롭게 살아? 다른 사람들도 평화로운 미래 혹은 노년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되는 데는 두 여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제 어머니입니다. 외출을 즐기시던 어머니가 아흔 넘어 마음껏 외출할 수 없게 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어 하시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중년에 이르신 때부터 일흔, 여든 되실 때마다 집안에서 즐기는 연습을 하시자고 권유했지만, 어머니는 귀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외출해도 아무렇지 않은 어머니의 튼튼한 체질이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또 한 사람은 최근에 잠깐 한자리에 앉았던 50대 여성입니다. 제가 ..

나의 이야기 2023.04.27

노년일기 159: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4월 3일)

몸과 마음이 고단해 거짓말 하나도 못하고 만우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플 때조차 웃지 않고 보내는 날은 없으니까요. 가을부터 줄곧 무덤처럼 침묵했던 꽃나무들이 색색의 꽃을 피웁니다. 꺽다리 토마토 나무엔 그새 더 많은 열매가 열렸습니다. 자스민의 보라꽃이 하얗게 변하며 온 집안을 절간으로 만듭니다. 모든 것... 모든 흉한 것들과 소음과 어리석은 소치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지만, 사는 데 바쁜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지난 3월 6일 노년일기에 인용했던 손턴 와일더의 , 그곳에서 잠시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을 방문한 죽은 에밀리가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Oh, earth, you're too wonderful for anybody to realize you."..

동행 2023.04.03

노년일기 158: 마지막 인사 (2023년 3월 26일)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94세, 만 나이로는 93세입니다. 타고난 미모와 피부 덕에 연세보다 젊어 보이시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 고생하십니다. 비싼 보청기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대화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얘기하면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작게 하느냐?"며 나무라시고, 크게 말하면 "왜 소리를 지르느냐?"고 야단치십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러시는지 어머니는 큰소리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소리들이 모여서 입으로 나오는가?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약골이셨지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잘 들으셨는데, 타고난 건강 체질인 어머니는 왜 청력이 바닥나 외롭고 힘든 말년을 보내시는 걸까요? 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시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동행 2023.03.26

노년일기 157: 추억여행 (2023년 3월 17일)

어젠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가 전에 한국일보사 일곱 개 신문사에서 일했던 동료 여자 기자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일보, The Korea Times, 서울경제신문, 일간스포츠... '장명수 칼럼'으로 한국일보의 지가를 올리시고 이제는 이화학당 이사장으로 활약하시는 장명수 선배님, 체육기자로 문명(文名)을 떨치시고 이젠 가드닝 전문가가 되신 성인숙 선배, 언론인과 외교관을 거쳐 화가로 살고 계신 지영선 선배,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맑은 물' 노릇을 하고 있는 옛 동료들과 후배들... 참석자들 모두 한목소리로 '한국일보사에서 일했으니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런 인연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얘기하니 이젠 이승에 계시지 않은 많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신문사보다 앞서 견습기자 제도를 실시하여..

동행 2023.03.17

노년일기 156: 궁금합니다 (2023년 3월 13일)

허리 아프다던 첫째, 목이 아프다던 둘째, 이제 괜찮아졌을까요? 회사 일이 버겁다던 젊은 친구는 아직 그 회사에 다닐까요, 떠났을까요? 하나뿐인 아들의 일탈로 반쪽이 된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막 사별을 겪은 선배는 어떠실까요? 팔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요? 예전에 궁금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보려 했지만, 이젠 가만히 기도만 합니다. 아픈 동생들, 회사 일에 부대끼던 젊은이, 반쪽이 되어 버린 친구, 사별을 겪은 선배 모두 부디 견딜 만하기를, 부디 아무렇지 않게 되기를... 아버지, 내일은 이승에 당신 태어나셨던 날... 팔년은 팔일 같고 저는 여전히 아버지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도 저희가 궁금하신가요?

나의 이야기 2023.03.13

노년일기 155: 누군가가 나를 추모할 때 (2023년 3월 10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친구 같은 책 몇 권이 있을 겁니다. 제게도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거나 숲 속에 들어앉고 싶을 때면 린다 엘리스(Linda Ellis)와 맥 앤더슨 (Mac Anderson)이 함께 만든 책 를 음미합니다. 는 아무개가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죽었음을 나타낼 때 쓰는 표시 (ㅡ)입니다. 예를 들어 '1900ㅡ2000' 가운데의 표시로서 바로 그 사람의 생애를 뜻합니다. 2010년 12월 이 귀한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김광호 선생님께 감사하며, 책의 제목이 된 시 'The Dash'의 마지막 연을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봄은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는 계절, 생과 함께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So when your eulogy is b..

나의 이야기 2023.03.10

노년일기 154: 사랑받는 노인, 사랑을 잃는 노인 (2023년 3월 1일)

이틀 후 어머니의 생신을 앞두고 아들딸들과 배우자들이 어머니와 점심을 함께합니다. 젊은이는 하나도 없는 식탁, 가장 어린 사람도 예순이 넘었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화제는 건강과 질병, 임플란트와 틀니 얘기를 넘나듭니다. 식사 후에 간 카페에서는 한 테이블엔 어머니가 사위와 아들들과 앉고 다른 테이블엔 며느리들과 딸들이 앉습니다. 어머니는 보청기를 끼셨지만 자기 테이블의 얘기도 잘 못 들으십니다. 며느리들은 어머니로 인해 서운했던 점을 시누이들에게 얘기하고 시누이들은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를 얘기하며 올케들을 위로합니다. 이야기는 어머니를 넘어 며느리들의 어머니들로 이어집니다. 어떤 노인은 늙어서도 사랑받지만 어떤 노인은 나이를 얻을수록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원인은 무엇보다 아집(我執)입니다...

동행 202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