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9

노년일기 136: 사이좋은 모녀 (2022년 10월 12일)

며칠 전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카페 입구에서 바라본 너른 창가 자리에 중년 여인이 신을 신지 않은 발을 의자 팔걸이에 걸쳐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맨 다리가 팔걸이에 걸쳐진 채 덜렁거리는 모양이 끔찍했습니다. 여인의 건너편에는 젊은 여인이 앉아 있는데, 그 모양이 아무렇지 않은 듯 한참 대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지만 그 집의 커피와 음악을 따라올 곳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들어갔습니다. 두 여인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는데 그들의 큰 목소리가 거기까지 오니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나 나가니 카페 주인 정진씨가 따라나왔습니다."저 사람들... 끔찍하네요. 내가 가서 얘기할까요?발 내리라고?" 제가 말하자 저보다 현명한 정진씨가 말했습..

나의 이야기 2022.10.12

노년일기 135: 제일 좋은 친구 (2022년 10월 4일)

'좋은 친구'는 누구일까요?내게 좋은 것을 주는 친구? 얘기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 그러면 '제일 좋은 친구'는 누구일까요?제 생각에 그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입니다.사는 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 때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게 하는. '당신의 제일 좋은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이름이나 호칭을 댑니다. 아버지, 어머니, 영희, 철수 등 등. 하지만 제게 제일 좋은 친구는 늘  죽음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죽고 싶을 땐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지금 죽지는 말자, 이보다 더 힘들 때 죽자'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죽음을 시도했다가 운명 덕에 살아남은 후에도 죽음은 변함없이 힘든 상황을 견디게 해주는 ..

동행 2022.10.04

노년일기 134: 할머니 노릇 (2022년 10월 1일)

둘째 수양딸이 지난 오월 둘째 아기를 낳았습니다. 정신없이 구월을 보내다 문득 아기의 백일이 되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금반지를 사 보내고 싶어 금은방에 갔습니다. 한 돈짜리는 너무 비쌀 것 같아 반 돈 짜리 값을 물었더니 제 또래거나 저보다 조금 더 나이들었을 주인이 스마트폰으로 시세를 알아보곤 말했습니다. "16만 5천 원. 하나 줘요?" 16만 5천 원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 "아니오" 하고 금은방을 벗어나는데, 돈이 없으니 사람 노릇도 할 수가 없구나...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금은방에 있던 수많은 금붙이와 보석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인이 무례한 게 그가 가진 비싼 것들 때문일까 생각하니 더욱 씁쓸했습니다. 금은방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에 가서 두 아기와 부모의 양말을 골랐습니다. ..

나의 이야기 2022.10.01

노년일기 133: 화려한 결혼 (2022년 9월 5일)

어젠 조카의 결혼식 날, 늘 웃는 얼굴의 조카라 그런지 비가 와도 걱정이 되진 않았습니다. 옥외와 옥내를 아우르는 결혼식장은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아름다웠습니다. 의식은 옥외에서 진행되었는데 머리 위 높이 쳐 놓은 차양 덕에 신랑신부도 옥외 좌석에 앉은 하객들도 비를 맞지 않았습니다. 옥내에 앉은 하객들은 통유리를 통해 의식을 보았습니다. 종일 비가 내리다 멈췄다를 반복했지만 비도 결혼식의 화려함을 지우진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형제들, 조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반가웠습니다. '낳아 놓으면 큰다'는 말은 옛말... 저 아이들을 저만큼 키우느라 바쁘고 힘들었을 아이들 부모들이 대견하고 안쓰러웠습니다. 결혼식장이 커서 그런지 일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주차장 관리부터 뷔페 관리까지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

동행 2022.09.05

노년일기 132: 전문가 (2022년 8월 29일)

아래층 목욕탕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지 20일...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래층에 사는 분들은 세수하다가 뒷머리에 똑똑 떨어지는 물을 맞았으니 얼마나 불쾌했을까요? 우리 가족들은 삼십 도가 넘는 더위에 목욕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영 불편했습니다. 물 떨어지는 것을 보러 아래층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현관문엔 '0000교회'라 쓰인 작은 명찰 같은 게 붙어 있고 문을 여니 정면에 크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증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왔는데 문제에 대한 걱정이 큰 만큼 초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그 집들 모두 예수님의 초상을 입구에 걸어두진 않을 테니까요. 두 명의 '누수 전문가'가 다녀갔지만 문제를 찾아내지 ..

동행 2022.08.29

노년일기 131: 빚 갚기 (2022년 8월 25일)

젊은 시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얻고 또 돈을 빌려 집을 샀습니다. 그리곤 제법 열심히, 즉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참고 하면서 간신히 은행 빚을 갚았습니다. 다 갚고 보니 저는 젊지 않았습니다. 가끔 거울 속 흰머리를 빗으며 '그래도 빚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갚지 못한 빚이 제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봄이 끝나갈 땐 봄에 받은 사랑 빚을 갚지 못하고 여름을 맞으니 어쩌나 했는데 서늘한 바람이 아침을 가르니 이 한 해 동안 받은 사랑도 또 갚지 못하겠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전에는 '빚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빛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젠 '아무리 해도 이 生에서 진 빚을 갚지 못하고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건 부끄러움뿐입니다. ..

나의 이야기 2022.08.25

노년일기 130: 고무줄 (2022년 8월 19일)

몇 년 전만 해도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는 건 몹시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올여름은 반바지 두 벌로 버텼습니다. 다리 절반이 노출되니 시원한데다 뜨거운 직사광선이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말도 들어서입니다. 한 벌은 가족이 입던 것으로 엉덩이 부분이 해어져 꿰매어 입었지만, 헌옷수거함 출신인 다른 한 벌은 출신지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새 것입니다. 삼사 년 묵은 초가지붕 색과 짙은 남색인데, 두 바지 모두 면을 꼬아 만든 띠로 허리둘레를 조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허리밴드가 신축성이 없다 보니 바지를 입고 벗을 때마다 띠를 묶었다 풀었다 해야 해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띠를 빼내고 고무줄을 넣었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아, 또 하나 닮고 싶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고무줄 같은 ..

나의 이야기 2022.08.19

노년일기 129: 요섭의 속눈썹 (2022년 8월 10일)

오른쪽 눈의 속눈썹이 눈꺼풀을 찔러 상처가 났습니다. 나이들며 눈꺼풀이 내려오는데다 더위로 인해 피부가 거의 항상 젖어 있으니 속눈썹처럼 약한 자극에도 상처가 나는 것이겠지요. 쌍꺼풀의 겹진 부분이라 남의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쓰라립니다. 속눈썹 하면 요섭이 떠오릅니다. 경향신문 정치부 정요섭 기자...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던 그와 저는 1980년대 중반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출입기자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기자들이었고, 저는 당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에 있던 외무부 기자실에 출입하던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요섭과 저는 가끔 8층 창가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기자실의 큰 테이블에 앉아 뭔..

나의 이야기 2022.08.10

노년일기 128: 포기하겠습니다 (2022년 7월 25일)

오래 전 제게 보약을 지어주시던 선생님은 '나쁜 점은 하루라도 젊을 때 빨리 고쳐야 한다. 나이들면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꼭 나쁜 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기질은 나이들며 점차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흔 넘은 어머니와 일흔이 가까워지는 딸의 만남이 자꾸 삐그덕거리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하루라도 집에 머물면 병이 나신다는 어머니와 달리 저는 가능한 한 집안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많은 물건이 있는 곳을 매우 싫어하는데 어머니는 사교와 백화점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부르시면 싫다는 말을 못하고 백화점에 동행하곤 했습니다. 다녀와서 앓는 것은 저와 함께 사는 가족들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흔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외출을 좋아하시고 그 외출에..

나의 이야기 2022.07.25

노년일기 127: 절교 무심 (2022년 7월 15일)

전에도 이 블로그에 밝힌 적이 있지만 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 새끼'의 팬입니다. 아니 그 프로그램이 언제 방영되는지조차 모르니 프로그램의 팬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중심인 오은영 박사의 팬입니다. 밝고 자연스러운 얼굴, 정확한 우리말, 경청하는 태도, 전문가적 처방... 모든 전문가들이 오 박사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 나라 국민 모두 그의 프로그램을 보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오 박사의 프로그램을 볼 때면 언제나 부모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적인 능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힘은 물론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예의까지도 다 부모를 통해 습득하니까요. 그 '습득'은 태어난 후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시..

동행 202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