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2

노년일기 107: 주름살 지운 교수님 (2022년 2월 17일)

제 주변에는 교수가 제법 여러 명입니다. 제 오빠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교수가 있는가 하면 장사꾼보다 돈을 잘 버는 교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주름살을 지우는 교수들도 적지 않습니다. 주름살을 지우는 건 물론이고 코를 오뚝하게 세우거나 듬성듬성해진 눈썹을 짙게 만들어 무서워 보이는 교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주름을 지운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젊은 애들하고 있으려니 너무 늙어 보이면 안 되겠더라고." 단골 문방구 사장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흰머리가 참 멋있는데, (저는) 노상 손님들을 접해야 하니 할 수 없이 염색을 해야 해요." 그곳은 아주 큰 문방구이고 손님들은 대개 필요한 뭔가를 사러 오는데, 사장님의 머리 색깔이 왜 문제가 될까... 의아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젊음 강박 혹은 추구..

나의 이야기 2022.02.17

노년일기 106: 내 몸은 소인국 (2022년 2월 14일)

콕콕콕 쿡쿡쿡 싸알싸알 탕 보이지 않는 일꾼들은 보이는 일꾼들보다 성실합니다 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내 몸은 릴리퍼트 사람들보다 작은 일꾼들로 가득합니다 머리카락을 헤집어 보지만 콕콕콕 손은 보이지 않습니다 쿡쿡 싸알싸알 종아리 속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은 일꾼들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고통의 생산이 부(富)나 성장과 통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일하느라 바빠 그날이 오는 걸 끝내 알지 못하는 걸까요 고통이 막강한 무기가 되어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는 날?

나의 이야기 2022.02.14

노년일기 105: 노인과 원로 (2022년 2월 4일)

오늘은 올해의 첫 절기인 입춘(立春), 봄이 들어서는 날이지만 기온은 한낮에도 영하를 맴돌 거라 합니다. 이름은 대개 명칭일 뿐 이름이 현실과 일치하는 건 오히려 드문 일입니다. 아침 신문에서 한 '원로'의 책 광고를 보았습니다. 워낙 오래 사신 분이라 제 생애 전체가 그분 생애의 일부에 해당되고 제 친구들 중엔 그분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분은 수십 년 동안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며 사시는데 이번에 나온 책에도 그런 말씀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자가 원로인데다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유명한 출판사이니 잘 팔리겠지요. 그런데 그 소식을 접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건 왜 그럴까요? 연세가 많은 분이면 으레 '원로'라 부르는 게 우리 사회의 풍토이지만 노인이라고 다 '원로'는 아닐 ..

나의 이야기 2022.02.04

노년일기 104: 고민 (2022년 2월 2일)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런 느낌을 받으면 그 느낌을 얘기할까 말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입이 말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아 아버지를 바꿔드리곤 "아버지, 이 사람은 멀리 하시는 게 좋겠네요"라고 말한 적도 있고, 기자 시절 제 아기를 키워 주시는 이모님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모, 이분에게 돈 빌려 주지 마세요"한 적이 있는가 하면, 녹차 마시는 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초면의 승려에게 "스님, 안경 하나 쓰시지요?" 한 적도 있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하시기에 '그냥' 그 사람은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하시는 중이라며 "허, 너..

나의 이야기 2022.02.02

노년일기 102: 월든 (Walden) (2022년 1월 18일)

生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했던 대학 1학년 때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같은 초월주의 시인들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회의'를 '결심'으로 누르며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결심' 위로 '피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거운 피로를 밀어올리며 중력의 세계에 계속 존재해야 하는가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걸까요? 지난 연말부터 자꾸 소로우의 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모든 책꽂이를 다 뒤져도 원서도 번역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학가에 살지만 서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장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헌 책방에 들러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보다는 책을 직접 만..

나의 이야기 2022.01.18

노년일기 101: 금쪽같은 내 새끼 (2022년 1월 15일)

사과를 먹지만 사과를 모릅니다. 지구에 살지만 지구를 모릅니다.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마이스키도 첼로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 중에서도 알기 어려운 건 자신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투쟁에 시달린 탓이었다는 걸 훗날에야 알았습니다. 저는 가급적 여럿이 모이는 자리나 시끄러운 곳을 피하는데 어린 시절 좁은 집에서 오 형제가 복대기며 자란 탓이 클 겁니다. 저 자신을 잘 알진 못했지만 제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타인과 한 집에서 산다는 건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얹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상황은 의지를 압도합니..

동행 2022.01.15

노년일기 100: 두 세계의 만남 (2022년 1월 9일)

만남 중에 쉬운 만남은 없습니다. 아니, 의미 있는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겠지요. 오늘 저녁 어머님아버님과 만나기 위한 준비도 며칠 전에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뵌 아버님, 한참씩 저희와 동거하신 어머님, 아버님은 룸메의 십대 중반 떠나시고 어머님은 2014년에 떠나셨습니다. 작년에 뵈었으니 꼭 일 년 만입니다. 적어도 9시부터는 두 분께 대접할 음식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사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두 분과 저희 가족이 상 앞에서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일 년 처음 하는 일을 하여 돈을 번 두 분의 손자가 제사 비용을 내주어 오늘 제사상엔 구경만 하고 산 적은 없었던 샤인머스캣도 올라갑니..

나의 이야기 2022.01.09

노년일기 99: 내일은 새날 (2021년 12월 31일)

연말은 늘 우울합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그런데 오늘 새벽 기도를 하다가 문득 웃었습니다. '내일은 새날'이라는 평범한 깨달음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쉬이 지치는 육체와 금세 흐트러지는 정신을 탓하며 그때, 자고 나면 바로 회복되던 시절에 좀 더 열심히 살지 그랬냐고 저를 꾸짖곤 했는데,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아흔에 타계하신 아버지나 백 번째 생신 지나 별세하신 어머님, 올해 아흔 셋이 되시는 어머니처럼 산다면 제게는 아직도 많은 '새날'들이 남아 있습니다. 부스러지는 육체와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태어날 때 지니고 왔으나 살며 잃어 버린 지혜와 현명을 다시 찾으려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그분들만큼 살지 못한다 해도, 그래..

나의 이야기 2021.12.31

노년일기 98: 무지 일기 (2021년 12월 29일)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온 걸까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안다는 말을 버려야 하네 하루도 빼지 않고 살았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삶은 학교가 아니네 지나간 날들이 그렇다면 오는 날들은 어떨까 오 년이 오면 십 년이 오면 무언가 알게 될까 무지가 빙하 같으니 정신은 새벽 버스 꼴 넉넉한 건 오직 겨울 해 얼리는 한숨뿐이네!

나의 이야기 2021.12.29

노년일기 97: 누구나 겪는 일 (2021년 12월 22일)

가끔 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픽 웃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을 혼자 겪는 것처럼 곱씹으며 슬퍼하거나 화 내는 걸 볼 때입니다. 감기부터 암까지 몸과 정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질병들, 시험 낙방, 투자 손해, 텅 빈 지갑, 행인을 넘어뜨리거나 놀래키는 보도블럭, 횡단보도를 침범해 들어온 자동차, 불친절한 식당 주인이나 마트 직원, 어깨에 뽕을 넣은 공무원, 직책이 요구하는 일은 잘못하면서 직책이 부여한 권한 이상을 휘두르는 사람,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상사, 친구인 척하지만 '친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남보다 나를 모르는 가족, 연애나 결혼 실패, 이별과 사별... 누구나 이런 일을 겪고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얕고 깊은 상처가 자리를 잡아 두고두고 괴롭습니다. 이 모..

나의 이야기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