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151: 겨울 다음 봄 (2023년 2월 12일)

겨울 동안 집안을 환히 비추던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이 자꾸 떨어지며 푸른 꽃대에서 손톱보다 작은 새 잎들이 돋아납니다. 봄이 오는 겁니다. 꽃과 잎이 묻습니다. 겨울이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을까? 봄 다음에 봄 또 봄 다음에 봄이 와도 가버린 시간을 털어낼 수 있을까?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사위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몸에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겨울 덕에 봄을 생각합니다. 제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_copa7lBCg&t=4s&ab_channel=JimmyStrain

나의 이야기 2023.02.12

노년일기 150: 달, 달, 무슨 달... (2023년 2월 6일)

어젠 정월대보름. 달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나쁜 제 눈에도 밝고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둥두렷했습니다. 제 손 좀 잡아주세요! 하고 외치면 잡아줄 듯 다정해 보였습니다. 달을 올려다보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둥글긴커녕 비죽비죽 날카로운 성정, 어둠을 밝히긴커녕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 같은 노인... 달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당신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빌었습니다. 빛을 내되 햇살처럼 날카롭지 않게 하소서. 어둠을 밝히되 스스로 너무 밝지 않게 하소서. 당신처럼... 차별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이야기 2023.02.06

노년일기 149: 젊은이는... (2023년 1월 19일)

젊은이는 빛이 납니다. 이목구비 균형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도 머리끝서 발끝까지 반짝입니다. 노인은 집에서 키운 하늘소 같아 이목구비 균형이 아무리 좋아도 빛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황금뇌를 떼어 팔며 살다 죽은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노인은 제 빛과 시간을 바꾼 사람입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이 그 분야 전문가가 되듯 긴 시간을 제정신으로 산 노인은 인생을 제법 알게 되고 젊어서 씨름하던 문제의 답을 얻기도 합니다. 젊음을 부러워하는 노인이 많지만 모든 노인들이 그러지 않는 건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빛나던 시절엔 몰랐으나 빛을 잃으며 알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노년을 흥미롭게 하고 살 만한 나날로 만듭니다. 그러면 젊음이 부럽다며 늙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뭐냐고요? 글..

나의 이야기 2023.01.19

노년일기 148: 잘 살고 싶으면 (2023년 1월 6일)

어떤 책을 읽다가 혹은 읽고 나서 다른 책을 이어 읽는 일이 흔합니다. 책의 한 구절이 다른 책을 부를 때도 있고 그 책의 한 생각이 다른 책을 펼치게 할 때도 있고, 책의 주제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읽게 하기도 합니다. 안락사를 선택한 지인의 마지막 시간을 스위스에서 함께하고 쓴 신아연 씨의 책 를 읽다 보니 두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과 네덜란드 의사 Bert Keizer (베르트 케이제르)의 입니다. 세 저자는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이고 살아온 배경과 종교도 다르지만, 그들의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후회 적은 삶을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으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프기 전에는 죽는 것이 무척 두려웠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3.01.06

노년일기 147: 크리스마스날 (202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부고를 받았습니다. 뜬금없이... '새로 태어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울지마 톤즈'를 방영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 영화를 보던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개인의 안락을 목표로 하는 대신 더 높은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할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선의와 선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이름... 그분 덕에 말갛게 씻긴 눈을 닦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얀 눈은 사라지고 거뭇거뭇한 눈만 가로수 아래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눈은 흰눈일 때 눈 대접을 받고 사람은 의식이 제..

나의 이야기 2022.12.25

노년일기 146: 아이와 노인 (2022년 12월 6일)

이 나라엔 태어나는 아이가 적어 큰일이라는데 태어난 아이는 외롭게 살거나 시달리거나 방치되거나 학대받곤 합니다. 노인들이 오래 살게 된 이유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라는데 이 나라의 노인들은 먹고 사느라 혹은 여생을 즐기느라 바쁘고 젊은이들 중엔 노인들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쁜 젊은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노인들이 돌보며 어울리면 아이들은 덜 외롭고 노인들은 기쁨과 보람을 느낄 텐데... 이 나라는 이래저래 낭비 많은 나라입니다. 아래의 시를 보면 제가 좋아하는 셸 실버스틴도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The Little Boy and the Old Man Said the little boy, "Sometimes I drop my spoon." Said the lit..

동행 2022.12.06

노년일기 145: 그녀의 비늘 (2022년 12월 4일)

아흔 넘은 어머니를 누르는 중력 아주 눌린 노부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다가 오히려 하늘로 돌아가시고 슬픔을 식량삼아 버티던 노모는 비척비척 십이월 젖은 낙엽 1분에 하던 일을 10분 걸려 하면서 왜 자꾸 채근하냐고 야속해 하는 어머니 혹은 낡은 비늘집 어제는 한 조각 오늘은 두 조각... 빛나던 비늘들 바래어 떨어지네 남의 집 같던 그 마음 이제야 알 것 같은데 그 목마름 그 성마름 먼지 털 듯 털어내시며 어머니 자꾸 사라지시고 내 손엔 빛바랜 비늘만...

나의 이야기 2022.12.04

노년일기 144: 나이테 (2022년 11월 25일)

낙엽 몰려다니는 길을 걷다 보면 문득 고개 들어 저 높이 나무의 정수리께를 보게 됩니다. 높아지느라, 속으로 영그느라 이렇게 버리는구나... 인생의 겨울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개 자라기를 멈추지만, 나무는 겨울에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구나... 20년 넘는 억울한 옥살이, 그 겨울 같은 시절에도 자신을 키우신 신영복 선생. 선생의 에서 같은 마음을 발견했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1984년 12월 28일 대전교도소에서 쓰신 글에 '나이테'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2016년 1월 15일 저세상으로 떠나신 선생님, 지금은 어디에서 '자라고' 계신지요?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동행 2022.11.25

노년일기 143: 아름다운 것이 스러질 때 (2022년 11월 21일)

세상에서 제일 빠르던 엄마의 걸음이 자꾸 느려질 때 스승 같은 선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 용서 대장이 어느 날부터 노여움 대장이 될 때 새 절 기와 같던 머리칼에 눈꽃 하얀 걸 볼 때 명문 자랑하던 친구가 저잣거리 흔한 여인이 될 때 여러 날 걸려 핀 꽃이 하루 환하다 지기 시작할 때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집이 굉음 속에 무너질 때 가슴 속에 무엇 무거운 것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 나도 엄마처럼 느려지다가 .. 가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니 문득 가볍네!

나의 이야기 2022.11.21

노년일기 142: 시선 (2022년 11월 12일)

아버지가 뗏목 같은 요에 누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시기 전 앉으시던 안락의자, 그 의자 아래 방바닥에 앉아 자꾸 붓는 아버지의 종아리와 발을 내 어깨 위에 올려두고 죽어라 주무르던 날들, 짐짓 명랑한 척 종알대는 나를 내려다보시던 그 시선, 그 시선 뒤 영영 떠날 마음, 그 외로움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고 잔잔히 웃으시던... 언제부턴가 내 시선 속에 그 시선 같은 것이 안개처럼 혹은 초미세먼지처럼 스미어, 살아갈 사람들은 앞과 위를 보지만 살아온 사람들의 시선은 뒤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지기 시작한 꽃의 마른 목처럼 길에 뒹구는 낡은 돌 끌어안는 저녁 이슬처럼... 아버지의 약한 육신은 굳건하고 청청한 정신을 몹시도 괴롭혔지만 아버지는 평생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 고통 또한 그 ..

나의 이야기 2022.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