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9

노년일기 178: 두 가지 질문 (2023년 7월 21일)

지난 주 모임에서 한 친구가 토로했습니다. 이제는 이룰 것이 없어 살맛이 나지 않고 우울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연했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는지는 모르나 제가 보기에 그는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자신과 자녀들의 윤택한 생활을 성취, 보장했을 뿐 인생에 대해 모르기는 일곱 살 아이와 같으니까요... 그에게 무엇을 이루었느냐고 물으니 목표했던 것을 다 이뤘다고 말했습니다. 교수 노릇을 하다 은퇴했고 여러 개의 건물을 소유했으니 다 이룬 걸까요? 생각하기 전에 제 입이 묻는 소릴 들었습니다. "혹시 그 목표들이 너무 사소한 것들 아닌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목표'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 건 이 나라가 '목표' 지향 국가라 그럴까요? 지난 19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KIAS)에 문을 연 허준..

나의 이야기 2023.07.21

노년일기 177: 노년의 적 1 (2023년 7월 18일)

'적 (敵)'은 '해를 끼치는 요소' 또는 '승부를 겨루는 상대편'을 뜻합니다. 공적으로 노년에 들어선 지금 저의 첫 번째 적은 저 자신입니다. 자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제가 저를 괴롭힙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입을 옷을 꺼내놓았어야 하는데 꺼내놓지 않아 짜증이 날 때가 있고, 옷을 벗고 입는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손이 둔해진 것을 느끼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부엌에서 일하다 양파를 가지러 베란다에 가서는 베란다 빨랫줄의 빨래만 걷고 빈손으로 올 때가 있는가 하면,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해 베란다를 청소한 후 판판하게 펼쳐 널어야지 하고 빨랫줄 한쪽에 걸쳐 놓았던 손수건을 그냥 두고 올 때도 있습니다. 오래 산 집인데도 집안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조금만 오래 서서..

나의 이야기 2023.07.18

노년일기 176: 죽어라 살다가 (2023년 7월 15일)

전문적인 사기꾼이 아닌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모인 어제 점심 자리의 주제가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유월에 어머니를 잃은 친구, 며칠 전 아주버님과 사별한 친구, 남편이 아주 떠난 후 모임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두 선배들... 죽음은 이 오랜 친구 모임의 보이지 않는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돈이 많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걱정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들어가 누울 공원묘지의 묫자리를 사려는데 몇 인 분짜리를 사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갖가지 답을 내놓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건 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동안 자식들이 편히 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

동행 2023.07.15

노년일기 175: 배웅 (2023년 7월 10일)

어젠 아침 일찍 조계사에 갔습니다. 이 세상을 바꾸려 했던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가는 길, 위로차 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 대웅전과 마당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90년대 어느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이미 세상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 쪽으로 기운 사람이었지만 희망과 낙관으로 진력하는 그는 감동적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그를 돕겠다 마음먹었고 그의 노력은 꽤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성공의 값은 그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를 좋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염원과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먹구름을 끌어안고 있던 하늘이 모든 의식이 끝나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눈물에 온몸을 적시며 떠돌다 돌아왔습니다. 배웅의 후유증은 허기와 무기력... 살구 다섯 개를 먹고 잉그..

나의 이야기 2023.07.10

노년일기 174: 초콜릿 (2023년 7월 4일)

혈당이 떨어져 힘들 때 먹으라고 친구가 사준 초콜릿을 오래 먹지 않아 녹을 기미가 보일 때 앓아누웠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려서 듣던 어른들의 얘기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입이 쓰다'는 말의 뜻도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입이 쓰니 먹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약을 먹어야 하니 뭔가를 먹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평소에 먹지 않던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먹고 더위 탓에 물렁해진 초콜릿도 먹었습니다. 하나만 먹어야지 했는데 먹다 보니 한 봉을 다 먹었습니다. 초콜릿을 이렇게 많이 먹다니 바보가 되려는 건가, 아이가 되려는 건가... 며칠 앓고 일어나 초콜릿을 검색합니다. 네덜란드의 의학 저널에 실린 연구를 보니 초콜릿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인지력 쇠퇴를 예방하며, 심혈관계 위험을 ..

나의 이야기 2023.07.04

노년일기 173: 나쁜 일 속 좋은 일 (2023년 6월 28일)

공익법인 '아름다운서당'을 만들고 이사장으로 오래 일하신 선배님과, 그곳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사를 역임한 두 사람이 오랜만에 서울 시내 한복판 오래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작년 언젠가 만나고 처음입니다. 노년의 적조는 대개 노화와, 노화가 수반하는 질병과 관계가 있으니 만남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못 뵌 사이 선배님은 유명한 병의 환자로 병원 신세를 지셨고, 서당의 동료인 제 오랜 친구는 해외 여행 중에 다친 팔꿈치의 수술을 다시 받고 아직 재활 치료 중이었습니다. 저 또한 지난 주 내내 누워지내며 과연 오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했으니, 세 사람 다 신고(身苦)를 겪은 셈입니다. 투병은 힘들었지만 투병을 회상하면서는 세 사람 모두 웃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과거에 두..

동행 2023.06.28

노년일기 172: 영화가 끝난 후 (2023년 6월 26일)

며칠 동안 고통에 잡혀 있다 일어나면 긴 영화를 보고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중력 아래 오롯이 빈 종이처럼 존재하던 시간을 채운 건 무수한 상념과 기억입니다. 젊은이에겐 포기할 수 없는 꿈과 계획이 있겠지만, 낡은 몸에 담긴 오래된 정신에게 미래는 말 그대로 '미래(未來)', 오지 않은 혹은 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상념과 기억을 털며 다시 직립하는 인간으로 돌아가려 준비하다 보면 앞서간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임기는 우리의 생김처럼 다른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는 아예 상관없는 것인가...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듯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 책상 앞에 앉습니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잡일들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 좋은 점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나의 이야기 2023.06.26

노년일기 171: 어떤 자서전 (2023년 6월 11일)

태어난 직후는 절망의 시기: 또 태어나다니! 십대는 절망과 도피의 시기: 어차피 죽을 텐데 왜 늙어 죽도록 살아야 할까... 책 속으로 도피. 이십대 삼십대는 가면의 시기: 온 힘을 다해 죽음에의 욕구를 누르며 남들과 같은 척하기. 사십대는 조롱의 시기: 아직 살아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한편 삶과 죽음을 어렴풋이 파악함. 오십대는 가끔 웃는 시기. 육십대는 조금 더 자주 웃는 시기. 칠십은 낯익은 절망과 만나는 시기. 희망이 보이는 시기.

나의 이야기 2023.06.11

노년일기 170: 큰 나무 아래 (2023년 6월 7일)

이 나라는 아직 건설 공화국이라 자꾸 큰 나무를 베거나 뽑고 작은 나무를 심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교 앞에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이 많았는데, 학교 앞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게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 한 귀퉁이에 있는 산인데 아직 한 번도 가 보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지금의 룸메이트가 제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그때이지만 제 꿈은 지금과 같았습니다. 늘 큰 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남편이 가난한 아내의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이니 전국에서 가장 값이 싼 산이었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살다가 힘들 땐 그 산을 생각했습니다. 난 언제든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나의 이야기 2023.06.07

노년일기 169: 유월의 기도 (2023년 6월 1일)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늘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지혜는 버릴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용기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겠지요.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 쓰지 말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한 발씩 앞으로!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 AD)의 명상록 9권 33번 째 문단이 친구 같습니다. 33. All that your eyes behold will very quickly pass away, and those who saw it passing will themselves also pass away very quickly; and he who di..

나의 이야기 202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