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2

노년일기 191: 어머니의 고스톱 (2023년 10월 3일)

일주일 전 어머니를 만나고 온 후 아팠습니다. 어제 어머니를 만나고 온 후엔 펑 젖은 옷을 다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리 다려도 옷에선 자꾸 물이 나왔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러 경로당에 가니 어머니는 다른 분들이 고스톱하는 걸 구경하고 계셨습니다. "난 이제 못해. 계산을 빨리빨리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거든." 경로당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고스톱은 어머니의 취미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친구분들과 고스톱을 치셨고 그 자리는 늘 웃음바다였습니다. 고스톱을 못 치는 제게 어머니는 늘 이담에 무슨 재미로 살 거냐고 힐난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경로당에서 어머니의 집까지는 전봇대 두어 개 거리지만 어머니는 한 번에 걸어내실 수 없었습니다. 중간 지점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앉아 차를 마시..

나의 이야기 2023.10.03

노년일기 190: 구름(2023년 9월 22일)

내일은 추분, 이제야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엔 흰구름이 대가의 붓질 같습니다. 저 큰 화면에 큰 붓으로 쓱쓱 그려 넣는 마음은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파란 하늘이 아름답다 하지만 흰구름이 없다면 파랑의 아름다움이 부각되기 어렵겠지요. 가끔은 구름에 훅! 큰 숨 불어넣어 하얀 구름이 포말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가을 하늘은 인생을 은유합니다. 육체가 겪는 고통은 육체가 평화로울 때 할 수 있는 일들의 즐거움을 부각시키고 정신이 겪는 힘겨움은 오히려 정신의 고양을 격려합니다. 젊은이들은 파란 하늘의 아름다움에 취하지만 노안은 구름의 아름다움에 감사합니다. 늙어가는 일은 깨닫는 일,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일! 눈, 코, 입, 귀... 가을이 스며듭니다. 여름내 지친 사람들 위로하는..

나의 이야기 2023.09.22

노년일기 189: 고통 없이 사는 비결 (2023년 9월 10일)

입원해 있는 룸메이트 덕에 매일 병원에 드나들다 보니 제 인생에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빌빌대던 제가 하루 두 번씩 병원을 오가니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입원하면 저는 그의 병상에 틱 낫 한 (Thích Nhất Hạnh: 1926-2022) 스님의 작은 책 를 갖다 두곤 합니다. 병자가 책을 읽든 읽지 않든 그 책의 초록색 표지가 병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환자 옆에 그 책을 갖다 놓았지만 환자는 책 보기보다 유튜브 시청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튜브보다 책을 좋아하니 가끔 환자 곁에서 그 책을 봅니다. 엊그제는 거기서 본 소제목이 저를 빙그레 웃게 했습니다. "When You Feel Grateful, ..

나의 이야기 2023.09.10

노년일기 188: 나의 잘못! (2023년 9월 6일)

먹는 것, 그중에서도 단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제 룸메이트가 단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흰밥, 떡, 팥빵, 과자, 유과, 곶감, 수박, 잼, 고구마, 콜라 등... 오래 좋아하던 것들과는 멀어지고 양배추, 토마토, 버섯, 우유, 오이, 당근, 미역, 두부, 톳, 콩 등과 더 돈독한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혈당이 많이 높아져서 식이요법이 필수가 된 지금, 룸메는 어떤 마음일까요? 좋아하는 떡과 잼 바른 빵을 먹지 못하게 되어 기분이 나빠졌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아직 먹을 수 있는 게 많으니 다행이라고 안도할까요? 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제가 그의 혈당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지요. 그가 어린 아이였을 때, 막내아들 귀엽다며 사탕을 물려주시던 아..

동행 2023.09.06

노년일기 187: 아이러니 (2023년 8월 30일)

가끔 '저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음식점만은 안 했으면 좋겠어' 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일은 다 해도 좋으니 아기 돌보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음식점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할 때는 대개 그 사람이 깔끔하지 않거나 인상이 너무도 험악하여 소화불량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을 때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아기 돌보는 일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맡은 일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말도 있지만, 그 일만은 안 했으면 좋을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가족 덕에 매일 병실에 드나들며 다양한 환자들과 의료종사자들을 접하다 보니 ..

동행 2023.08.30

노년일기 186: 당신을 생각합니다 (2023년 8월 28일)

칠십여 년 생애 처음으로 병원에서 밤을 보내게 된 당신을 생각합니다. 수전 손택은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고 했지만, 당신을 입원시킨 질병은 무수한 해석을 품은 은유이겠지요. 당신은 평생 생각해 보지 않았던 당신의 몸에 대해 생각할 겁니다. 당신은 잊고 살다시피한 당신의 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할 겁니다. 그 생각이 당신의 이성을 고양시키길, 우울이나 비관을 부추기진 않기를 바랍니다. '제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빨랐던 당신이니, 당신의 몸은 제 몸의 서너 배쯤 일해야 했을 겁니다. 부디 당신 몸의 노고를 위로해주길 바랍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은 다양한 '처음'을 경험하겠지만, 어떤 '처음'에도 겁먹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전에 겪었던 모든 처음들처럼 지금 겪는 처음들도 곧 익숙해질 테니까요. 아무..

동행 2023.08.28

노년일기 185: 칠순 잔치 (2023년 8월 27일)

회갑, 칠순...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로 생각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연세가 되고 마침내 내 것이 되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칠순: 일흔 살'이라는 정의 아래 "옆집 할머니께서는 칠순이 훨씬 넘으셨는데도 아직 정정하시다."는 예문이 있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어머니가 두 딸의 생일을 맞아 호텔 식당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저는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호텔이 동네에 있고 한 주에 생일을 맞은 동생이 가자고 하는데다 외출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이달 초부터 갑자기 외출 불능 상태가 되셨던 것을 생각해 가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새 많이 호전되시어 느리게나마 다시 걷게 되셨습니다. 네 사람이 모이니 식탁 위엔 네 가지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직원들의 서비스와 상관없이 음식은 훌륭했습니..

나의 이야기 2023.08.27

노년일기 184: 우리는 하나 (2023년 8월 24일)

노년은 발견의 시기입니다. 내 몸에 이렇게 많은 기관이 있었던가, 이렇게 다양한 고통이 숨어 있었던가... 끝없이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손목에서 어깨 사이 어디를 눌러도 아픕니다. 무릎과 발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내야지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먹으면 배를 채우고 있는 각종 장들이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혼자 샤워를 하실 수 없게 된 어머니를 씻어 드리고 오면 제 몸 이곳저곳에 파스를 붙이고도 밤새 끙끙 소리를 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도 대개 몸의 불평을 듣습니다. 타고난 튼튼 체질 덕에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갑자기 태업에 들어간 당신의 다리를 내려다 보며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탄식하십니다. 젊은 시절 훈련 한 번 받지 않고도 기록적 속도로 100미터를 주..

나의 이야기 2023.08.24

노년일기 183: 사랑 때문에? (2023년 8월 20일)

몇 군데 돈을 보내야 할 곳이 있어서 텔레뱅킹을 하는데, 암호 숫자를 두 번이나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세 번 잘못하면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는 투의 ARS 협박을 들었습니다. 마트에 생강을 사러갔습니다. 흙생강은 100그램에 2,300원인데 바로 옆 '깐 생강'은 698원이라기에 한 봉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 찬물로 땀을 씻고 나서야 698원이 아니라 6980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본래 숫자에 어둡고 눈도 몹시 나쁘지만 깐 생강이 흙생강보다 비싼 게 당연한데 그런 실수를 하다니... 부끄러웠습니다. 저녁밥을 해 주겠다는 아들에게 찬밥이 많으니 달걀볶음밥을 해 달라고 했는데 아들이 밥을 볶으려 하니 찬밥이 없었습니다. 찬밥 있던 것을 점심에 먹고도 냉장고에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다행히 텔레뱅킹 ..

나의 이야기 2023.08.20

노년일기 182: 닮은 눈 저편 (2023년 8월 15일)

8월 한가운데 햇볕 쨍쨍한데 우리 엄마 또 주무시네 기쁨 슬픔 원망 분노 감긴 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네 아프네 아프네 하지만 정말 죽을 때 되면 아픈 데 없다더라 하시더니 눈 뜬 엄마 아픈 곳 없다네 얼마 전만 해도 서운한 것 많더니 이젠 8년 전 떠나가신 아버지 얘기뿐 그 옆에 가 누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왜 안 가는 걸까 뭐가 그리 급하셔요 천천히 가셔요 엄마 가시면 나는 고아 되는데 불효한 딸은 엄마 닮은 눈 저편에 눈물 숨기며 엄마 발을 붙드네 https://www.youtube.com/watch?v=PwbdzarEoNg&ab_channel=JHChung

나의 이야기 2023.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