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232: 문방구가 있던 자리 (2024년 10월 4일)

divicom 2024. 10. 4. 11:17

나이가 들수록 삶이 가벼워집니다. 제가 어른 행세를 

하며 사회생활을 할 때 제 안에 숨죽이고 있던 아이가

기지개를 펴더니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고 저 하늘 좀 봐,

저 구름 좀 봐, 합니다.

 

오늘은 제게 천사가 되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이 

'천사' 데이라는 겁니다. 오늘 날짜를 숫자로 쓰면 '1004'!

젊은이라면 천사와의 만남을 꿈꾸겠지만, 나이 든 사람은

누군가의 천사가 될 궁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 안의 아이 덕에 노인치고는 제법 자주 문방구를

들락거렸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문방구 세 곳이 있는데,

둘은 제법 크고 초등학교 초입에 있는 하나는 그 학교 아이들의

준비물에 특화된 조그만 가게입니다.

 

제 안의 아이가 좋아하는 곳은 당연히 다양한 물건이 있는

두 곳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카드 몇 장을 사거나 서류 봉투를

샀지만,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한참씩 물건들 사이의 골목을

서성이곤 했습니다. 노트와 스케치북, 우비, 실내화는

물론이고 젤리, 초콜릿, 쇼핑백과 벽지, 쿠션도 있었습니다.

 

서점에 머물면서 책들의 얼굴을 보거나 들춰 보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픈 어깨를 생각해

얇은 시집 한 권을 사 들고 오는 게 보통이지만, 책 사이에서

보낸 시간의 여운은 머물렀던 시간보다 오래갑니다. 

문방구 골목의 시간은 서점의 시간을 닮았습니다.

서점의 시간이 사유를 불러내는 데 비해 문방구의

시간은 '명랑'을 불러낸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18년 전 이 학교 많은 동네로 이사왔을 때 제일 좋았던 건

서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교 정문 맞은편의

오래된 서점이 반가워 자주 들러 시집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 서점은 곧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서점에

마지막으로 갔던 날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때는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습니다. 

 

맨 아래 책꽂이에서 먼지 쓴 <티베트 사자의 서>를 발견하고

낡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한참 머리를 박고

읽었습니다. 책을 사겠다고 마음 먹고 주머니를 털었지만

책의 정가엔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인에게 조금 깎아달라고

해보자, 오래 안 팔려 먼지 앉은 책이니 깎아 줄 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초로의 남자 주인에게 쭈뼛쭈뼛 사정을 말하고

값을 깎아 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경멸적 표현으로 답했습니다. 너무도 무안해서 얼른 서점을

벗어났습니다. 한동안 가지 않던 어느 날 그 집이 카페로

바뀐 걸 보았습니다. 참 슬펐습니다.

 

최근 큰 문방구 두 곳이 그때 그 서점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이제 제 안의 아이가 갈 곳은 매미들이 울다

죽은 개천가와 초록잎들이 녹슬고 있는 뒷산, 그리고 영어학원

봉고들이 바쁘게 오가는 골목뿐입니다. 저 봉고차 안의 아이들이

늙어 지금 제 나이쯤 되면 그때 그 노인들 속에도 아이들이

있을까요? 그때 그 아이들은 어디서 '명랑'을 찾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