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패배시키지 못하는 적은 나를 강화시킨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더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더위는 저를 죽이지 못했을 뿐, 저를 무기력하게 하고
약화시켜 시간을 닝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케이블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무료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는
호주 감독 소피 하이드 (Sophie Hyde)가 2022년에 발표한 '19금'
로맨틱 코미디로, 영국이 자랑하는 배우 엠마 톰슨 (Emma
Thompson)과 그녀보다 34세 어린 아일랜드 배우 다릴 맥코맥
(Daryl McCormack)이 주연합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하는 전직 윤리 교사 낸시는 2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데 멀리 있는 아들딸은 필요할 때만
엄마를 찾습니다. 삼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며 오직 남편하고만
성관계를 해 본 낸시는 오르가즘을 느낀 척만 해 보았을 뿐
정말로 느껴 본 적은 없습니다.
다릴 맥코맥이 연기하는 리오 그랜드는 웹사이트를 통해
친밀한 관계 (성관계 포함)를 원하는 여성들을 만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데, 낸시가 그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그와 호텔 방에서 만남으로써 영화가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답게 잦은 웃음을 제공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부부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안다는 건 무엇인가, 옳다는 건 무엇인가, 젊음이란
무엇이며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엠마 톰슨은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전라를
보여 주는데, 올해 65세인 그녀의 몸은 31세인 다릴 맥코맥의
근육질 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엠마의 몸이 노화를
증언한다면 다릴의 몸은 젊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노화는 더위처럼 불편을 초래하며 짜증과 고통을 일으킵니다.
더위는 늦게나마 가을이 오면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만,
노화는 살아 있는 한 내내 계속되고 불편과 고통을 악화시켜
포기와 절망을 초래할 겁니다. 그러니 노화는 더위보다 강하고
고약한 적입니다.
영화의 제목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행운을 빌어,
리오 그랜드'이지만, 리오도 결국은 낸시처럼 늙을 겁니다.
누구도 늙지 않는 '행운'을 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노화에 패배하지 않고 강화될 수 있을까요?
더위를 피해 달아났던 '생각'이 이 영화 덕에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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