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0

노년일기 243: 화는 천천히 (2025년 1월 6일)

늙는다는 건 한마디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겁니다.에너지가 줄어드니 많은 일을 하거나 신경 쓸 수가없습니다.  늘 하던 일만 하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지만,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거나 그런 일에 신경을써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날카로운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그 일에 대해말하면 곱게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금세 격앙되어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이 나라가 초고령국가가 되며 화내는 노인이 많아지는 건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화내는 건 가난한 사람이돈 쓰듯 해야 합니다. 화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화를 내고 나면, 감정에 휘둘려 돈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돈을 쓴 가난뱅이처럼 반드시 후회하게 되니까요. 새해 목표를 화내지 않는 것으로 정한 분들에게린다 엘리스(Lind..

동행 2025.01.06

노년일기 242: 그가 떠난 후에도 (2024년 12월 16일)

가끔 꿈이 깨달음을 줄 때가 있습니다.엊그제 꿈은 죽음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죽는 사람, 오로지 그 한 사람의 것이라고얘기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 죽음의방식 또한 그 사람만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채운 상자의 뚜껑을 닫는 것. 삶이 그 사람만의것이듯 죽음 또한 그만의 것이겠지요. 누군가 이곳에서 떠났을 때 그와의 이별과 그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부재(不在)를이유로 자신의 나날을 낭비하는 것은 자신의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의 의미에도 부합하는 게 아닐 겁니다. 2024년의 끄트머리에서 돌아보니 참 많은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2월에떠나셨고 4월엔 사촌동생 이정자와 팀북투>의 작가 폴 오스터(Paul Aus..

동행 2024.12.16

노년일기 241: 과장된 슬픔 (2024년 12월 10일)

한국 소설이든 영미 소설이든 소설을 읽을 땐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사전을 찾지 않습니다. 단어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 두긴 합니다.그래야 나중에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부인>을 읽다가, 91쪽에서 lugubriously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단어인데, 무슨 뜻일까 하며 적어 두었습니다. 저녁에 책상에 앉아 사전을 찾아보려는데 메모 하나가 보였습니다. 11월 1일, 같은 작가의 (등대로)>를 읽으며 적어 둔 단어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보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적어 둔 lugubriously에서 'ly'를 뗀 형용사 lugubrious였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11월 1일에 본 단어를 오늘 아침40일 만에 다시 만났는데, 처음..

나의 이야기 2024.12.10

노년일기 240: 노화에 대한 보상 (2024년 12월 8일)

나이가 들어가며 실수가 잦아집니다.어딘가에 부딪혀 다치고 뭔가를 떨어뜨리고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놓치는가 하면 티비에서 나오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늙어간다는 건 바보가 되어가는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데 그런 실수는 젊어서도 하지 않았던가자문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노인' 칭호를 듣는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나이 탓으로 돌리기일쑤입니다. 힘은 빠지고 아픈 곳은 많아지고 정신은 멍해지고...이 모든 부정적 노화 증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보상이 있긴 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에서 피터 월쉬의입을 빌어 보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보상은 바로자신의 경험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 봄으로써 '존재자체만으로  충분'하여, '타인이 필요치..

동행 2024.12.08

노년일기 239: 엄마의 속옷 (2024년 12월 1일)

동네 밖 외출을 거의 하지 않지만, 할 때는 어머니의옷이나 모자를 착용합니다. 그러면 지난 2월 돌아가신어머니와 동행하는 것 같으니까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날엔 어머니가 입으시던 속옷을입었습니다. 늘어난 목 부분을 어머니가 군데군데꿰매어 줄이신 걸 보니 괘 오래 입으셨던 옷입니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승에서 함께했던 시간, 어머니는 부드러움이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세상으로 가시고 나니 그때 알아채지못하고 흘려보낸 따스함이 새록새록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빨아 널며보니 옆구리에 꽤 큰 구멍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저처럼 그 구멍의 존재를 모르고 무심히 입으셨던걸까요? 아니면 그 구멍을 발견하셨을 ..

나의 이야기 2024.12.01

노년일기 238: 눈과 바람의 날개 (2024년 11월 26일)

여름이 떠나지 않는다고 단풍이 들지 않는다고끌탕했는데, 11월 말에 찾아온 추위가 산을물들이고 도시의 보도를 낙엽으로 덮었습니다. 오늘 새벽엔 비 내려 대지를 식히더니 거센 바람이짧았던 가을의 흔적을 지웁니다. 자연의 순환앞에서 인간이 일으킨 기후 변화는 맹수 앞의토끼 꼴입니다. 소설가 공지영 씨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는단편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 할머니를 묘사했지만,소설 밖 할머니들은 결국 다 죽습니다. 올여름처럼오래 지지부진 지속되는 생生이 있을 뿐이지요. 요양원 등 장기요양시설에 머무는 노인의 87퍼센트가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해 살아서 잊힌 노인들이떠오릅니다.  지금 창밖에서 우는 북풍아, 내일 새벽 내릴 눈아, 살아서 죽은 노인들에게도 그대들 ..

동행 2024.11.26

노년일기 237: 평생 통틀어 지금이 제일! (2024년 11월 21일)

TV에서 89세 할머니를 보았습니다.평생 음악가를 꿈꾸다가 89세에 음악가가되셨답니다. 아버지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자랐고, 할머니도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되어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밭에서 일하고 방과 부엌을 들락거리며 아이 여섯을 키우셨답니다.  허리를 펴 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그래도 행복했답니다. 늘 외로웠는데 가족이많으니 정말 좋았고, 종일 일을 해도 상관없었답니다. 남편이 죽고 아이들이 결혼해 떠나자할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답니다. 변하지 않은 건 할머니의 꿈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코디언을 샀습니다. 아코디언을연주하며 노래하다 보니 오르간이 필요했습니다. 할머니는 오르간을 샀습니다. 악보 보기는 힘들지만 할머니는 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나날이 행복합니다. '평생..

동행 2024.11.21

노년일기 236: 집에서 살다 죽으려면 (2024년 11월 18일)

노인들의 반 정도는 몸이 아파도 병원이나 요양원에가기보다 집에 있고 싶어한다는 '2023년 노인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집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면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90세에, 어머니는94세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 연세까지 집에서 사셨다니복이 많은 분들이라고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이나 시설에 가지 않고 죽는 날까지집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려면 긴 준비가 필요하다는것을 부모님을 보며 배웠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인다.     아버지는 연설을 하여 돈을 벌 정도로 말씀을 잘하시던    분이지만 연세가 드실수록 말씀을 줄여 최소한만    하셨습니다.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도 늙으면 가족의    온기가 필..

동행 2024.11.18

노년일기 235: 나쁜 친구 (2024년 11월 10일)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입니다.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아니니 친구 중엔 좋은 친구도 있고 나쁜 친구도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하자는 대로 하는 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듣기 싫은 말을 해도 좋은 친구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엔 다 좋은 사람만 있습니다. 제 눈에 좋지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가깝게 오래' 사귀지않으니까요. 그런데 엊그제 친구 모임에 갔다가 고민에 빠지고말았습니다. 제가 정기적으로 나가는 모임은그 모임 하나 뿐인데 그 모임의 친구 하나가 저를 고민에 빠뜨린 겁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고,인류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가르면 분명좋은 ..

동행 2024.11.10

노년일기 234: 전화 (2024년 11월 3일)

머리 아픈 회의 끝 참석자들과 헤어지는데전화벨이 울립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바지주머니의 전화기를 꺼냅니다.  번호를 보니 3월에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친구입니다. 제 어머니 돌아가신 걸 뒤늦게 알았다며 미안해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제 몸과 마음이 좀 편해진 후에만나자고 하고는 7개월이나 소식을 전하지못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연거푸불렀지만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만 났습니다.친구가 저와 통화하려고 번호를 누른 게아니고 동작 중에 제 번호가 눌리었나 봅니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아직은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설 연휴 끝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릅니다.어머니도 가끔 그러셨습니다. 전화벨이 울리고낯익은 번호가 보이면 반가워..

동행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