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216

노년일기 249: 고맙다, 청춘! (2025년 3월 6일)

볼 것 많은 계절, 봄! 초중고교가 개학하고 대학이 개강하니 동네가 계절입니다. 거리마다 어린이 젊은이가 가득하고 식당과 카페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마른 나무마다 눈물처럼 작은 봉오리들이 아름답지만,그들에게 눈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이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학교 많은 곳에 살길잘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던 20년 전저를 칭찬합니다. 대학 주변은 아시아 거리입니다. 한국 젊은이처럼생겼는데 입을 열면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일본...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담소하는 한국과 이국의학생들을 보면 국적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어쩌면 국적은 총 들고 싸우는 전쟁이나총 없이 싸우는 외교에나 필요할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저들이 국적..

동행 2025.03.06

노년일기 248: 후배들에게 (2025년 2월 27일)

TV 화면에 피켓 든 대학생들의 격앙된 모습이보입니다. 연둣빛 번지는 모교 교정에서 후배들이두 갈래로 나뉘어 싸웁니다. 마이크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목소리가 대포알 같습니다. 아름다운 젊은얼굴을 추하게 만든 나이 든 사람들이 밉습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범죄라면 저는 범죄인입니다. 개가 가장 심하게 모욕을 느낄 때는 뺨을 맞을 때라고 하던데, 투명망토가 있다면 그것을 입고 저 개만도 못한 늙은 거짓말쟁이들의 뺨을 때리고 싶습니다. 얘들아, 너희끼리 싸울 것 없어. 너희들이 각기 편드는 그 사람들, 너희만큼 순수하지 않고 너희만큼 정의롭지않아, 너희처럼 가난하지도 않고. 쓸데없는 데 에너지낭비하지 말고 교정이나 산책해, 가지마다 굳은 갈색 밀어올리는 연두를 봐. 아니면 교정의 건물들을 보거나. 그..

동행 2025.02.27

노년일기 247: 그때와 지금 (2025년 1월 30일)

지나간 시간 중 언제를 '그때'라 부르든,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다릅니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참 많은 일을 합니다. 저 개인으로 보면 짙은 갈색머리가 희게 변했고얼굴엔 주름, 손등엔 검버섯이 생겼습니다.허리와 다리는 굵어졌고 눈은 더 나빠졌고, 이는 삐뚤빼뚤해졌습니다. 웃음은 많아졌고 화내는 일은 줄었습니다.  책상이나 집 같은 무생물도 시간이 흐르며변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살아있는 것들의변화는 훨씬 더 두드러집니다. 윤동주 (1917-1945)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했던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평생을 포함하는 시간을 아일랜드에서 산 시인 제임스 스티븐스 (James Stephens: 1882-1950)는나뭇잎을 빌어 시간의 횡포를 고발했습니다. 대충 번역해..

나의 이야기 2025.01.30

노년일기 246: 기도에서 사라진 사람 (2025년 1월 17일)

하루는 기도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기도 매트 위에무릎을 꿇으면 늘 울컥, 감정이 일어납니다.꿈이 현실이 되지 못할 때 하는 것이 기도이니그렇겠지요... 저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신, 그러나 이제이곳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의 자유와 평안을위해 기도한 후,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지혜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데  필요하고, 용기는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하니까요. 그다음엔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십사고  기도하고, 재해와 전쟁을그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게 해 주십사고기도하고, 양심적으로 ..

나의 이야기 2025.01.17

노년일기 245: 제사의 효용 (2025년 1월 11일)

1월은 언제나 9일을 기준으로 나뉩니다.9일 이전에는 외출을 삼가며 건강을 지키려 애쓰고9일 이후 며칠은 할 일을 미뤄두고 쉬며 지냅니다.9일이 무슨 날이냐고요? 9일은 제삿날입니다. 룸메의 부모님과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날입니다.아버님은 제가 뵙기 전에 돌아가셔서 모습과 인품을들은 얘기로만 짐작하지만, 어머님은 저와 함께 사신 적이 있어 더욱 그립습니다.  인간이 2,30대에 70대의 1년쯤을 미리 경험해 볼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자식이 훨씬 많아질 거고, 저도 어머님과 함께하던 시간 동안 어머님의 몸과 마음 상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노년을 미리 경험할 수는 없으니젊은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인을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행 2025.01.11

노년일기 244: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5년 1월 8일)

새해 초엔 늘 시를 읽게 됩니다.시로써 머릿속을 씻고 정리하고 새 마음으로 새해 살이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단골 카페에서 류시화 씨가 엮은 시집을보다가 낯익은 시를 발견했습니다.제 졸저 에 인용했던'인생을 다시 산다면'이었습니다. 그 시는 오랫동안 나딘 스테어 (Nadine Stair)의시로 알려져 왔는데, 사실은 나딘 스트레인(Nadine Strain)이 쓴 에세이에 나온 것입니다.저는 에 그 사실을 적고, 그 글이 1978년 미국의 여성 잡지 (Family Circle)>에 실리는 과정에서 작가 이름이 잘못 기재되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 시가 여전히 나딘 스테어의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제가 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도 나딘 스테어의 시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은 수십 쇄..

동행 2025.01.08

노년일기 243: 화는 천천히 (2025년 1월 6일)

늙는다는 건 한마디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겁니다.에너지가 줄어드니 많은 일을 하거나 신경 쓸 수가없습니다.  늘 하던 일만 하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지만,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거나 그런 일에 신경을써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날카로운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그 일에 대해말하면 곱게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금세 격앙되어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이 나라가 초고령국가가 되며 화내는 노인이 많아지는 건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화내는 건 가난한 사람이돈 쓰듯 해야 합니다. 화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화를 내고 나면, 감정에 휘둘려 돈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돈을 쓴 가난뱅이처럼 반드시 후회하게 되니까요. 새해 목표를 화내지 않는 것으로 정한 분들에게린다 엘리스(Lind..

동행 2025.01.06

노년일기 242: 그가 떠난 후에도 (2024년 12월 16일)

가끔 꿈이 깨달음을 줄 때가 있습니다.엊그제 꿈은 죽음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죽는 사람, 오로지 그 한 사람의 것이라고얘기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 죽음의방식 또한 그 사람만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채운 상자의 뚜껑을 닫는 것. 삶이 그 사람만의것이듯 죽음 또한 그만의 것이겠지요. 누군가 이곳에서 떠났을 때 그와의 이별과 그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부재(不在)를이유로 자신의 나날을 낭비하는 것은 자신의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의 의미에도 부합하는 게 아닐 겁니다. 2024년의 끄트머리에서 돌아보니 참 많은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2월에떠나셨고 4월엔 사촌동생 이정자와 팀북투>의 작가 폴 오스터(Paul Aus..

동행 2024.12.16

노년일기 241: 과장된 슬픔 (2024년 12월 10일)

한국 소설이든 영미 소설이든 소설을 읽을 땐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사전을 찾지 않습니다. 단어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 두긴 합니다.그래야 나중에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부인>을 읽다가, 91쪽에서 lugubriously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단어인데, 무슨 뜻일까 하며 적어 두었습니다. 저녁에 책상에 앉아 사전을 찾아보려는데 메모 하나가 보였습니다. 11월 1일, 같은 작가의 (등대로)>를 읽으며 적어 둔 단어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보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적어 둔 lugubriously에서 'ly'를 뗀 형용사 lugubrious였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11월 1일에 본 단어를 오늘 아침40일 만에 다시 만났는데, 처음..

나의 이야기 2024.12.10

노년일기 240: 노화에 대한 보상 (2024년 12월 8일)

나이가 들어가며 실수가 잦아집니다.어딘가에 부딪혀 다치고 뭔가를 떨어뜨리고앞에 앉은 사람의 말을 놓치는가 하면 티비에서 나오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늙어간다는 건 바보가 되어가는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데 그런 실수는 젊어서도 하지 않았던가자문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노인' 칭호를 듣는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나이 탓으로 돌리기일쑤입니다. 힘은 빠지고 아픈 곳은 많아지고 정신은 멍해지고...이 모든 부정적 노화 증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보상이 있긴 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는 에서 피터 월쉬의입을 빌어 보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보상은 바로자신의 경험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 봄으로써 '존재자체만으로  충분'하여, '타인이 필요치..

동행 2024.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