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2

노년일기 201: 역설적 십계명 (2023년 12월 24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오늘이 오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작은 책 을 읽다가 예수님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부분에서 정말 손바닥이 견딜 수 없이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가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니... 그분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흉내 내며 살았으면, 적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분을 흉내 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님은 켄트 키스(Kent M. Keith)의 저서 를 읽으시고 그 내용을 요약해 보내셨는데, 그 핵심은 '지도자를 ..

오늘의 문장 2023.12.24

노년일기 200: 내 인생의 칭찬거리 (2023년 12월 22일)

책 많이 읽는 동생이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 중에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는 , 저자는 마리아 포포바 (Maria Popova)입니다. 포포바는 11명의 '앞서 나간 자들'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삶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지무지하게 많은 책을 읽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터득한 지식에 사유를 곁들여 태피스트리와 같은 글을 자아낸 것이지요. 제게 사람은 풍경과 같은데 이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대개 역사를 만든 이들입니다. 그러니 몇 쪽만 읽어도 노벨상 수상자들의 강연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벌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 (Maria Mitch..

나의 이야기 2023.12.22

노년일기 199: 은서 어머니께 (2023년 12월 20일)

은서 어머니, 오늘도 그 베이커리 카페에 오시겠지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의 예쁜 얼굴은 언제나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하늘빛이니까요.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는 당신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두 딸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당신의 얼굴을 어둡게 만드는 것 같아서입니다. 은서... 2013년 태어난 여자 아이 이름 중에서 열 번째로 많은 이름이라지요? 은서가 태어난 2015년에는 그 이름이 인기 있는 여자 아이 이름 순위표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그 사실과 은서의 행복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을 겁니다. 그 시끄럽지만 커피값이 싼 카페에서 나는 여러 차례 당신과 두 딸의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

나의 이야기 2023.12.20

노년일기 198: 나이 든 친구들 (2023년 12월 10일)

지난 열흘 동안 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저처럼 비사교적인 사람이 이럴 때 사교적인 사람들의 연말은 얼마나 바쁠까요? 한 그룹은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이 반의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이 마흔이 넘었으니 우리 중 가장 어린 사람도 세는 나이로 일흔이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은퇴하여, 이제 이 모임은 손자손녀를 키우며 할머니 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손주 없이 할머니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아이들 얘기, 저세상으로 갔거나 이 세상에 있는 남편 얘기부터 대법원장 후보와 대통령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넘나듭니다. 또 한 그룹은 옛 직장의 친구들과 그들 덕에 알게 된 친구 모임이었습니다. 최근에 아들을 잃은 친구를 위로하다 각자가 겪은 상실에 대해 얘..

동행 2023.12.10

노년일기 197: 테헤란에서의 죽음 (2023년 11월 11일)

인생은 우연과 필연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연은 없다, 우연은 형태가 다른 필연일 뿐이다라고도 합니다. 필연, 즉 운명을 만드는 것은 성격이라고도 하지요. 어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그들을 처음 만났던 30년 전을 돌아보았습니다. 아이들 키우는 얘기를 하던 입들이 손자손녀 얘기를 하던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제는 거의 항상 늙음과 죽음 얘기를 합니다.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순간의 해프닝이 아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는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죽음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106-107쪽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오늘의 문장 2023.11.11

노년일기 196: 간헐적 고문 (2023년 11월 5일)

어머니가 스물넷에 저를 낳아 어머니와 저는 띠동갑이 되었습니다. 띠가 같은 사람은 성격도 비슷할 것 같지만 어머니와 저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어머니는 외출과 여행을 좋아하시지만 저는 좋아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맛'과 '멋'이 제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다른 만큼 부딪치며 살았습니다. 저는 어리고 어머니는 어른인 기간 동안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게 가해하는 사람이었고 저는 피해자인 줄 모르는 피해자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늘 어머니의 불운을 상기하며 어머니를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계셨으면 저렇게 되시지 않았을 거라고, 어머니가 나만큼 교육을 받으셨으면 말씀을 저런 식으로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우리집 형편이 나..

나의 이야기 2023.11.05

노년일기 195: 사랑의 충고 (2023년 10월 21일)

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저를 '위해서' 한 말이 여러 날 잠을 방해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충고를 가장한 비판을 하시지만, 근래에 제 잠을 방해할 정도의 충고를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겐 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그만큼 살았으면 본인도 본인의 장단점을 알 테고 충고를 해도 고치지 않거나 고치지 못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지요. 불면을 초래한 충고 덕에 지난 삶을 돌이켜볼 수 있었으니,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삶은 변명 가능한 삶이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태어나 자라 나이 든다면 또 다시 그때와 다르지 않은 선택들을 하며 지금과 다르지 않은 흰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충고의 후유증은 오래갔습니다. '긴 시간동안 제법..

나의 이야기 2023.10.21

노년일기 194: 시장 사람들 (2023년 10월 12일)

아이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니 사는 곳이 중요하고, 저처럼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의 경우엔 생활을 영위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사는 지역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운이 좋습니다. 시장이 가까우니까요. 엊그제 시장에 가니 가끔 들르던 청과물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 아픈가... 40대 부부를 걱정했는데, 오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세 개에 천 원이라 쓰인 골판지가 꽂혀 있는 상자의 파프리카를 고르며 옆에 있는 남자 주인에게 "엊그제 문 닫았지요? 왔다가 허탕 쳤어요" 하며 웃으니 "집에 일이 좀 있었어요" 심상하게 답하고는 골판지를 집어들었습니다. '3개 1,000원'이라 쓰인 것을 쓱쓱 지우며 "지금부터 파프리카 다섯 개 천 원!' 소리치더니 골판지에도 '5개..

동행 2023.10.12

노년일기 193: 아들의 흰머리 (2023년 10월 9일)

저는 젊어서도 머리가 아주 검지 않았는데 아들의 머리는 푸른 빛이 돌 정도로 검었습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보면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받는 감동 같은 감동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들의 머리칼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검던 머리가 갈색으로 변하고 윤기가 없이 꺼칠해 보이기 일쑤입니다. 밤 새우기를 밥 먹듯 하는데다 밤낮으로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아들의 머리칼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기에 저렇게 셀까 안쓰러워한 적도 있고, 젊어서부터 멜라닌 색소가 부족했던 나 때문인가 미안한 적도 있었지만, 그가 이뤄가는 것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세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아들의 머리를 보면 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제 머리가 희어지는 걸 견디..

동행 2023.10.09

노년일기 192: 인류의 '베프' (2023년 10월 6일)

얼마 전 처음 만나는 후배와 얘기하다가 제 주변에 머물다 저세상으로 간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싫어하던 사람도 있고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연히 들춘 옛 노트에서 모차르트가 죽음에 대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226쪽 모차르트가 삶의 끝 무렵에 아버지에게 쓴 글입니다. 제 곁을 떠난 사람들중에도 죽음에 대해 모차르트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겠지요... "죽음이란 우리 삶의 진실로 궁극적인 목적이기에 지난 몇 년간 나는 이 가장 진실되고 가장 좋은 인류의 친구인 죽음과 친하게 되어서,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않고 마음이 놓이게 하고 위로를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죽음이란... 우리의 진정한 축복의 열쇠입니다."

오늘의 문장 202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