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9

노년일기 126: 노인의 얼굴 (2022년 7월 9일)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려 하지만 어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엔 모기에 네 곳을 물렸고 오전엔 아름다운서당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사회 참석 중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오빠가 응급실에 갔는데 꽤 오래 입원해야 할 것 같으니 집에 혼자 계실 어머니를 챙겨달라는. 칠십 대의 이사장 님은 '전엔 즐겁게 하던 일이 이젠 힘에 부친다'며 이사장 직을 내려놓겠다고 하셨고, 이사 중 한 분은 생애 처음으로 깁스를 했던 왼팔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힘겨워 했습니다. 오후. 오전에 치과에 다녀오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치료에 대해 여쭈니 질문엔 답변을 안하시고 딴소리만 하셨습니다. 새로 산 보청기가 이상해 안 들리신다기에 목소리를 크게 하여 대화를 시도했더니 금세 목이 갈라지고 머리가 빙빙 돌아 쓰러질 것 ..

동행 2022.07.09

노년일기 125: 해후 (2022년 6월 23일)

살아 있어 좋은 점 한 가지는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의 어머니는 기억, 어머니 덕에 이번 주엔 두 번이나 귀한 해후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44년 만에 만난 신문사 후배는 그새 성공한 회사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 신문사에 견습기자로 들어와 머문 시간은 고작 6개월, 그때 함께 일했던 선배 중에 두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라고 했습니다. 으리으리한 호텔 식당에서 아름답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가 사준 고급 카스텔라를 들고 돌아오는데 참 기뻤습니다.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북악도 아름다웠지만 출세가 바꾸지 못한 그 얼굴의 맑음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사람에겐 아홉 개의 얼굴이 있다고 하고 저는 그의 얼굴 중 하나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코끼리보다는 한라산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코..

나의 이야기 2022.06.23

노년일기 124: 말하지 말고 (2022년 6월 14일)

첫 직장에서 만 12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때로는 교사로서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제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 실력 있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 기자로서는 존경스러웠지만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를 잘 못 쓰는 기자들을 꾸짖는 태도가 특히 거슬렸습니다. 잘못을 야단치는 데서 벗어나 '국민학교는 나왔냐?'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했으니까요. 그 선배에게 늘 당하던 기자 하나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을 때는 그 선배로 인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는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여성들로부터 전화가 자주 왔습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회사로 전화가 왔고 그러면 제일 후배인 제가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줄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2.06.14

노년일기 123: 사랑의 수명 (2022년 6월 5일)

아흔둘과 아흔셋 사이를 걷고 계신 어머니와 점심을 먹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나니 "여보세요?" 낯익은 음성이 들립니다. 반가움과 함께 슬픔이 밀려듭니다. 언젠가 이 번호에 전화를 걸어도 이 목소리가 안 들릴 때가 올 겁니다. 어머니 댁으로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태우고 식당으로 갑니다. 연희동의 중국식당을 고르신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길에 바뀝니다. "저기, 저 까만 건물에 있는 식당에 가자!" 고 하십니다. 늘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이 길다는데 오늘은 줄이 없습니다. "일요일엔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묵묵부답이신 걸 보니 보청기를 끼셨어도 들리지 않나 봅니다. 차에서 내려 입구로 가니 문이 잠겨 있습니다. 차는 이미 떠났으니 주변의 식당을 찾아 봐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새로..

나의 이야기 2022.06.05

노년일기 122: 옛 친구 (2022년 6월 2일)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이 있지만 오래된 친구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엔 열심히 자신을 탐구하고 이웃에 도움되는 삶을 지향해 영감을 주던 친구가 나이들며 일신의 안락만을 좇아 실망을 주기도 하고, '이 나이에 무슨 책을 읽느냐'며 무지를 자랑하거나 '이제 칠십이 코앞이니 내 맘대로 편하게 살겠다'며 안하무인적으로 행동해 부끄럽게 만드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날 때는 작은 선물과 함께 실망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엊그제 삼십 여 년 전 한 직장에서 근무했던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몇 년에 한 번씩 만났던 터라 그 친구의 변함없는 맑음을 알고 있었지만, 노년에 가까워지며 갑작스런 변화를 보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친구..

나의 이야기 2022.06.02

노년일기 120: 큰일이네,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2022년 5월 23일)

아침에 일어나면 잠시 눈을 씻고 제가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이름들을 떠올리다 보면 돌부리가 발을 붙잡듯 저를 붙잡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럴 땐 한참 그 이름에 머뭅니다. 그리곤 둘째 수양딸이 보내준 공진단 한 알을 먹습니다. 금빛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보면 누군가의 약손이 몸과 마음을 두루 어루만져주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기 출산을 준비하느라 바쁜 중에 제 건강을 걱정해 보내준 약입니다. 혈색 좋은 얼굴로 아기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밥은 무안의 최 선생님이 보내주신 우렁이쌀로 지은 것입니다. 고소한 귀한 쌀밥을 먹다보면 '밥이 보약'이라는 옛말이 참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친구가 가져다준 참기름은 아깝지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좋아할 테니까요...

나의 이야기 2022.05.23

노년일기 119: 나, 수레국화 (2022년 5월 20일)

홍제천변을 잉크빛으로 물들인 수레국화들을 보면 아주 작은 몸이 되어 그 사이에 들어가 서고 싶습니다. 수레국화들 사이에서 시치미 떼고 그들과 함께 바람을 그리고 싶습니다. 함께 걷던 친구가 풀밭에 떨어진 수레국화 한 송이를 집어 줍니다. "보셨지요? 꺾은 게 아니고 떨어진 걸 주운 거예요." 결벽증도 때로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장 작은 병도 수레국화 한 송이에겐 너무 큰집. 하얀 휴지 한 장을 접어 넣고 물을 담습니다. 휴지를 딛고 선 수레국화가 제법 꼿꼿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가' 탄식합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저 선명한 잉크 꽃잎이 마냥 지속될 것만 같습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어느 날 문득 꽃잎의 끝이 하얗게 바래기 시작합니다. 하양이 아래로 아래로 흘..

나의 이야기 2022.05.20

노년일기 117: 4월 끝 붉은 눈 (2022년 4월 30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거짓말로 즐겁게 시작했던 4월... 붉은 눈으로 지난 한 달을 돌아봅니다. 꽃과 나무, 대지, 사람... 갈증을 느끼지 않은 존재가 하나도 없었을 한 달, 억울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날들... 나날이 중력이 가중되어 이것 저것 버렸지만 새 화분들이 들어오며 가족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무릎 꿇을 힘이 있는 날은 매일 아침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십사'고 기도했지만 기도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눈의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처음 보는 빨강이 흰자위를 물들였는데 세상의 빛깔은 여전합니다.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며 4월의..

나의 이야기 2022.04.30

노년일기 116: 이방인 (2022년 4월 28일)

매일의 습관 중에 잠만큼 신기한 게 또 있을까요? 늘 눕는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은 채 어둠을 응시하면 검은 먹물이나 연기 같은 것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부터 서서히 퍼지고, 마침내 시야 전체가 검정에 먹히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죽음 비슷한 삶, 혹은 잠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래 전 죽은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산과 산 사이를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의 끝은 언제나 각성. 이불을 걷고 일어납니다. 때로는 낮에 본 풍경들과 얼굴들이 응시를 방해합니다. 잠은 완성할 수 없는 그림으로 남고 새벽이 졸린 눈을 비빕니다. 그럴 땐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하듯 오늘 못 잔 잠은 내일 자면 됩니다. 일어나 앉은 사람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습니다. 푹..

나의 이야기 2022.04.28

노년일기 115: 낙타처럼 걷기 (2022년 4월 20일)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아직도 장애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입니다. 정신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 장애 또한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도 장애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위 건강한 신체를 가진 비장애인이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젊어서 건강했던 사람이 나이 들며 각종 장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장애인들이 출근 시간 지하철의 운행을 방해하는 시위를 벌여 비난받은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신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텐데... 참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애가 생기면 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할 ..

나의 이야기 2022.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