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2

노년일기 96: 책 읽는 노인 (2021년 12월 9일)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오래 전에 졸업한 학교를 상기시킵니다. 십 대, 이십 대... 몸은 지금보다 나앗겠지만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 날이 드물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준 건 도서관의 친구들, 바로 책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취직이 되던 시절이라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텅 빈 도서관에 앉아 에머슨과 소로우를 읽으면 괴로운 실존과 피로한 현실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동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그런 위로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7퍼센트만이 대학에 간다고 했으니까요.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에 보탰다고 해도 대학에 다닌다는 건 선택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1.12.09

노년일기 95: 아름다운 지우개 (2021년 11월 18일)

산소는 무색, 무취라지만 산 사람은 유색, 유취입니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게 삶이니 삶에도 빛깔이 있고 냄새가 있습니다. 어떤 냄새는 코를 막게 하고 어떤 냄새는 숨을 들이쉬게 합니다. 어떤 냄새는 따뜻한 손 같고 어떤 냄새는 매질 같습니다. 담 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는 평화를 나릅니다. 제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여러 십년 쌓인 먼지 냄새? 붉고 푸른 감정의 재 냄새?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랑의 냄새? 나무 냄새가 나면 좋겠지만 잡식의 냄새가 나겠지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비만 오면 제 영혼이 제 몸을 끌고 나가는지 비, 아름다운 지우개!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악취를 씻어내는 지우개 같은 사람이 ...

나의 이야기 2021.11.18

노년일기 94: 시부모 흉보기 (2021년 11월 10일)

어제 낮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응급실' 카페에 갔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창가 자리엔 두 여인이 담소 중이고, 왼쪽 방엔 손님 하나가 노트북과 씨름 중이었습니다. 저는 두 여인과 멀리 떨어진, 벽에 면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응급실'에 가는 재미 중 하나는 '라디오 스위스'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대개의 동네 카페에서 들을 수 없는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 라흐마니노프나 쇼팽의 음악이 나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저만치 왼쪽으로 난 통창 밖 풍경을 보면 저절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제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창가 자리 두 여인의 대화가 때때로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사람..

동행 2021.11.10

노년일기93: 노인의 웃음 (2021년 11월 7일)

형편이 너무도 팍팍하여 웃을 수 없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운좋은 저는 적당히 가난하여 웃을 수가 있습니다. 저의 웃음은 흰머리와 함께 늘어가는데 대개는 저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입니다. 집안을 오가며 부딪치는 일이 흔하고 그럴 때면 비명을 지르자 마자 웃게 됩니다. '십여 년을 산 이 집이 아직도 낯선가?' 웃음이 나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러 가다가 도중에 다른 일을 발견해 그 일을 하고 애초의 일을 잊는 일도 많습니다. 뭔가 꺼림칙하다는 느낌이 들면 처음 가던 길로 갑니다. 그제야 처음에 하려던 일이 떠오릅니다. '이봐, 정신차리게!' 저를 꾸짖으며 웃습니다. 바닥에 앉아 있다 일어서려면 힘이 듭니다. '아이구'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 소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웃음을 자아냅니다. 파스를 붙..

나의 이야기 2021.11.07

노년일기 92: 검버섯 (2021년 10월 27일)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제 또래 여인을 보았습니다. 화장도 하고 염색도 해서 썩 늙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검버섯이 자꾸 생겨요. 손에도 생기고 팔에도 생기고 얼굴에도 생겨요. 검버섯을 볼 때마다, 아 나도 이젠 늙었구나,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이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큰 걱정이 없는 사람일 테니까요. 저도 검버섯이라면 제법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이와 비슷하게 손등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팔, 얼굴, 콧등에도 생겼습니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에도 꽤 있고, 생기려는 징후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검버섯은 아주 작고 옅은, 분홍과 자주 사이의 어떤 빛깔 점으로 태어나 점점 짙어져 다양한 농도의 갈색으로 자리잡습니다. 저..

동행 2021.10.27

노년일기 90: 숨바꼭질 (2021년 10월 19일)

이른 아침 산책길 마스크 위 안경에 자꾸 김이 서려 걷다 멈추고 걷다 멈춰야 했습니다. 시야가 흐려지니 걷는 게 영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보도블럭 중엔 잘못 놓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기분이 나빠지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동쪽에 낮게 뜬 해를 보았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요 해는 밝은데 젖어 보였습니다. 슬프지만 명랑한 아이나 노인처럼.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 올려다보니 해가 느릿느릿 나뭇가지 사이로 숨었다 나오고 다시 숨었다가 나왔습니다. 숨바꼭질 덕에 김 서린 안경 뒤의 눈과 마스크 속 입이 웃었습니다. 흰색과 검은 색 사이 모든 빛을 끌어안은 듯한 얼굴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내가 네게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알아?' 오늘도 또 부끄러운 하루의 시작입니다.

나의 이야기 2021.10.19

노년일기 87: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2021년 8월 12일)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나를 아는 당신을 알 뿐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당신이 무엇으로 빚어졌는지 당신의 시간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을 애인으로만 알았습니다 당신 눈길의 열기 당신 손길의 온도를 재는 데 급급했습니다 당신의 세포에 깃든 외로움 좌절 희망 사랑 부끄러움 거의 모든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당신을 시어머니로만 알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늦게 얻은 정체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는 당신을 아버지로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잘해내려 무진 애썼던 역할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는 당신을 존경받는 선배로만 알았습니다 굶주렸던 어린 시절 눈칫밥 먹던 사춘기 인정받기 위해 사력하던 청년은 몰랐습니다 나에게 아무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나는 그이를 모릅니다 비늘 하나를 보고 물..

나의 이야기 2021.08.12

노년일기85: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2021년 7월 30일)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더위도 추위도 담아두지 않고 비와 바람도 다만 흐르게 하는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주름 늘어가는 몸집에 더위가 들어앉아 주인 노릇을 하니 사지는 절인 배추꼴이 되고 정신은 젖은 손수건처럼 제 할 일을 못하여 에고 칠월은 낭비로구나 한 뼘도 자라지 못하고 한 낱도 영글지 못했구나 탄식 중에 화분 사이를 거닐다 깜짝! 오월 초에 피었던 재스민 활짝 핀 보라 여섯 송이 음전한 봉오리 하나 처음 겪는 더위는 마찬가진데 내겐 낭비인 칠월이 재스민에겐 부활이로구나 나의 각성은 늘 부끄러움이구나

나의 이야기 2021.07.30

노년일기 84: 노년의 적들 (2021년 7월 19일)

아흔둘 어머니는 그대로 스승입니다. 칭찬은 박하고 비판은 후하던 어머니의 성격은 여전하시지만 그때 '엄만 왜 저럴까?' 하며 속상해하던 저는 이제 저 부분은 유전자, 저 부분은 자신감, 저 부분은 열등감의 소산이구나, 분석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에 잠시 불쾌할 때는 있지만 오래가는 상처를 받는 일은 드뭅니다. 그런 말은 어머니가 극복하지 못한 문제를 드러낼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머니의 문제는 늘 제게 질문을 던집니다. 어머니의 문제가 저것이라면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저런 것이 어머니의 성숙을 방해한다면 나의 성숙을 방해하는 오래된 적들은 무엇일까... 그러니 어머니가 무엇을 하든 어머니는 제 스승인 거지요. 요즘 어머니가 가장 많이 일깨워주시는 건 외로움입니다. 저는 홀로 있는 ..

나의 이야기 2021.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