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62

노년일기 166: 나의 노래 1 (2023년 5월 20일)

오랜만에 응급실 카페에 앉아 월트 휘트먼 (1819-1892)의 'Song of Myself (나의 노래)'를 읽으니 아주 오래된 평화가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오십 년 전 갓 입학한 대학의 텅 빈 도서관에서 묵은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행복과 평화... 나의 행복은 이런 순간에 피어나는 꽃이고, 이 꽃은 50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습니다.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그의 시집 에 실려 있는데, 1855년 자비 출판한 1판에는 제목 없이 실렸고 역시 자비 출판한 2판에는 'Poem of Walt Whitman, an American (미국인 월트 휘트먼의 시)'로 실렸다가 1881~1882년에야 '나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52편 중 30편의 몇 구절이 특별히 와닿아 아래에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나의 이야기 2023.05.20

노년일기 165: 운전면허 없이 (2023년 5월 15일)

친구의 남편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10만 원이 들어있는 교통카드를 받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몇 해 전 쓰러져 시야가 좁아졌는데 시야는 회복되었지만 몸은 그 시간만큼 나이 들었겠지요. 아직 70대 초반인데 뭘 벌써 면허를 반납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면허가 '자유' 면허라고 생각하거나 자가용을 '자아의 확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면허를 반납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자동차일뿐 자유도 자아도 아니라고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1970년 대 후반 신문기자 시절 운전을 배웠습니다. 기자 노릇을 하려면 여기저기 다녀야 하니 배워두라고 신문사에서 서부자동차학원에 등록해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운전석에 앉아 클러치, ..

나의 이야기 2023.05.15

노년일기 164: 살아 있는 사람들은 왜? (2023년 5월 11일)

지난 4월 말 아파트 회장이 된 후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대표자회의 구성원들과 하루에 한두 번씩 회의를 하고 그래도 미진한 얘기는 전화로 하며 지난 회장이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습니다. 저 혼자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만 다른 분들의 지혜와 지식 덕에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합니다. 다행인 건 이런 상황에서도 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예기치 않은 나쁜 일에 휘말리면 일의 복잡성에 비례한 두통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제는 풍경을 바라보듯 상황을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습니다. 제가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된 데는 여러 친구들의 공이 큽니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 친구들과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책 친구들... 요즘 바로 옆에서 저를..

나의 이야기 2023.05.11

노년일기 163: 아카시아 (2023년 5월 7일)

뒷산에 아카시아가 흐드러진 줄도 모른 채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어느 날 앞창을 여니 아카시아 향기가 와락 저를 감쌌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안아주는 향기가 저절로 눈을 젖게 했습니다.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을 피운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데도 그들은 화내는 대신 산을 내려 돌아와 포옹을 해주었으니까요. 이튿날엔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다 떨어지겠구나 마음을 졸이면서도 뒷산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 이틀 후 내다보니 떨어진 흰 꽃들이 무수히 산의 배께를 덮고 있지만, 나무마다 떨어지지 않은 꽃들이 환했습니다. 꽃의 수가 준 데다가 습기를 머금어 향기는 줄었어도 뒷산은 여전히 아카시아 천지였습니다. 아카시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비를 ..

나의 이야기 2023.05.07

노년일기 162: 그의 한마디 (2023년 5월 2일)

저의 무능함을 높이 산 사람들이 저를 우리 아파트 회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숫자, 특히 돈에 관해 문외한인데다 어떤 사안 앞에서도 재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반응하는 저의 '투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본디 이런 사람으로 살아왔고 세상살이에서 이것은 약점이지 장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숫자가 잔뜩 적힌 문서 앞에서 망연할 때,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멀리서 수양딸이 보내준 짧은 문자가 저를 위로합니다. "또 공덕을 쌓으시겠네용ㅋ 아파트 사람들은 좋겠어요^^ 무리하지만 마세요~ㅎ"

나의 이야기 2023.05.02

노년일기 161: 오래 살아 좋은 점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제가 지금의 나이까지 살 줄은 몰랐습니다. 힘든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언제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살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십 대 신문기자 시절 만난 미국인 사회복지학 교수 샤츠 박사-- 성만 떠오르고 이름은 떠오르지 않네요-- 덕에 마흔여덟까지 살아도 괜찮겠구나 생각했고, 마흔여덟에 만난 사회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서 예순여덟에도 멋질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 나이를 넘겨서까지 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은 자꾸 떠나가시고, 세상의 짐 또는 젊은이들의 짐이 될 것 같은 동년배들이 늘어나는 걸 보며 오래 사는 것은 무서운 일이구나, 축복 아닌 형벌이나 재앙이구나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어제 새벽 오래 살아..

나의 이야기 2023.04.30

노년일기 160: 4월의 고민 (2023년 4월 27일)

되도록이면 밖으로 나가거나 복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을 피하고 조용히 살았는데... 질문이 일어납니다. 이대로 나 혼자 평화롭게 살아? 다른 사람들도 평화로운 미래 혹은 노년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되는 데는 두 여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제 어머니입니다. 외출을 즐기시던 어머니가 아흔 넘어 마음껏 외출할 수 없게 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어 하시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중년에 이르신 때부터 일흔, 여든 되실 때마다 집안에서 즐기는 연습을 하시자고 권유했지만, 어머니는 귀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외출해도 아무렇지 않은 어머니의 튼튼한 체질이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또 한 사람은 최근에 잠깐 한자리에 앉았던 50대 여성입니다. 제가 ..

나의 이야기 2023.04.27

나뭇잎을 닦으며 (2023년 3월 20일)

먼지 속에서도 봄이 옵니다. 먼지 앉은 나뭇잎을 닦다 보면 머릿속도 말개지는 것 같습니다. 물을 많이 먹어 썩은 나뭇가지를 잘라내며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고 지나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해침을 상기합니다. 대파가 쑥쑥 자라고 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운 베란다를 서성이다 보면 부끄럽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키우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아래는 정호승 시인의 에 수록된 시 '나뭇잎을 닦다'입니다.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

나의 이야기 2023.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