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62

노년일기 147: 크리스마스날 (202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부고를 받았습니다. 뜬금없이... '새로 태어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울지마 톤즈'를 방영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 영화를 보던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개인의 안락을 목표로 하는 대신 더 높은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할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선의와 선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이름... 그분 덕에 말갛게 씻긴 눈을 닦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얀 눈은 사라지고 거뭇거뭇한 눈만 가로수 아래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눈은 흰눈일 때 눈 대접을 받고 사람은 의식이 제..

나의 이야기 2022.12.25

사랑받는 자들은 (2022년 12월 11일)

누군가에게 제가 쓴 책을 보내주기로 한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냥 책만 보낼 수는 없고 마음 담은 몇 글자 새로 적어 함께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자꾸 늦어집니다. 보내려고 꺼내둔 책을 펼치니 하필 '사랑의 슬픔1'입니다. 사랑이 슬픈 이유는 사랑받는 자들이 사랑보다 먼저 떠나가기 때문일 겁니다. 남은 자들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사랑, 사랑할 대상의 부재로 인해 슬플 수밖에 없겠지요. 사랑이 떠나며 남긴 깊은 슬픔은... 그 사랑을 만난 기쁨, 그 축복을 상기하며 이겨내야겠지요... 사랑하기 좋은 계절, 겨울. 사랑, 그 후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시길 빕니다. 사랑의 슬픔 1 사랑받는 자들은 떠나가고 사랑하는 자들은 남는다 사랑받는 자들은 언제나 사랑보다 먼저 떠나간다 -- 김흥숙 시산문집 , 81쪽

나의 이야기 2022.12.11

노년일기 145: 그녀의 비늘 (2022년 12월 4일)

아흔 넘은 어머니를 누르는 중력 아주 눌린 노부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다가 오히려 하늘로 돌아가시고 슬픔을 식량삼아 버티던 노모는 비척비척 십이월 젖은 낙엽 1분에 하던 일을 10분 걸려 하면서 왜 자꾸 채근하냐고 야속해 하는 어머니 혹은 낡은 비늘집 어제는 한 조각 오늘은 두 조각... 빛나던 비늘들 바래어 떨어지네 남의 집 같던 그 마음 이제야 알 것 같은데 그 목마름 그 성마름 먼지 털 듯 털어내시며 어머니 자꾸 사라지시고 내 손엔 빛바랜 비늘만...

나의 이야기 2022.12.04

12월 (2022년 11월 30일)

십이월아 어서 와 빗물 세수 덕에 그나마 말개진 세상 속으로 한 장 달력처럼 가볍게 어쩌면 하얀 망토에 앉아 영하 추위를 몰고 와 십이월아 어서 와 낙엽마다 음각된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 가벼워졌으나 무거워진 징그럽게 시끄러운 헌 것들의 새 세상으로 숨죽여 우는 사람들에게로 억지로 웃는 사람들에게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들에게로 십이월아 어서 와

나의 이야기 2022.11.30

노년일기 143: 아름다운 것이 스러질 때 (2022년 11월 21일)

세상에서 제일 빠르던 엄마의 걸음이 자꾸 느려질 때 스승 같은 선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 용서 대장이 어느 날부터 노여움 대장이 될 때 새 절 기와 같던 머리칼에 눈꽃 하얀 걸 볼 때 명문 자랑하던 친구가 저잣거리 흔한 여인이 될 때 여러 날 걸려 핀 꽃이 하루 환하다 지기 시작할 때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집이 굉음 속에 무너질 때 가슴 속에 무엇 무거운 것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 나도 엄마처럼 느려지다가 .. 가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니 문득 가볍네!

나의 이야기 2022.11.21

노년일기 142: 시선 (2022년 11월 12일)

아버지가 뗏목 같은 요에 누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시기 전 앉으시던 안락의자, 그 의자 아래 방바닥에 앉아 자꾸 붓는 아버지의 종아리와 발을 내 어깨 위에 올려두고 죽어라 주무르던 날들, 짐짓 명랑한 척 종알대는 나를 내려다보시던 그 시선, 그 시선 뒤 영영 떠날 마음, 그 외로움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고 잔잔히 웃으시던... 언제부턴가 내 시선 속에 그 시선 같은 것이 안개처럼 혹은 초미세먼지처럼 스미어, 살아갈 사람들은 앞과 위를 보지만 살아온 사람들의 시선은 뒤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지기 시작한 꽃의 마른 목처럼 길에 뒹구는 낡은 돌 끌어안는 저녁 이슬처럼... 아버지의 약한 육신은 굳건하고 청청한 정신을 몹시도 괴롭혔지만 아버지는 평생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 고통 또한 그 ..

나의 이야기 2022.11.12

노년일기 141: 치과, 무섭지 않아! (2022년 11월 6일)

한 2주 전 입안 오른쪽 깊숙한 곳에 있던 윗니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너무 낡아 자연히 부서져서인지 통증도 없었습니다. 가기 싫은 치과, 마침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감기를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영화 '캐스트어웨이 (Cast Away)'가 떠올라 용기를 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척 놀런드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데, 치과 치료를 미뤘던 까닭에 스케이트 날과 바위로 스스로 문제의 이를 빼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침내 어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양심 치과 명단'에 있는 치과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2대 째 하는 치과라 했습니다. 손님 수도 적당하고 직원들도 가만가만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제 이들도 꼭 저만큼 늙어 있었습니다. 우선 코로나 19로 하지 못했던 스케일링을 하..

나의 이야기 2022.11.06

노년일기 140: 신발의 주인들 (2022년 11월 2일)

며칠 전 몸에 들어온 감기가 아주 함께 살자 합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한 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감기의 힘이 더 강해지나 봅니다. 웬만하면 해 떠 있는 시간에는 눕지 않지만 직립이 힘들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까무룩 눈 감았다 깨어보니 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제 몸에 앉았습니다. 그 먼길을 왔는데도 햇살은 따스합니다. 문득 신문에서 본 이태원의 신발들이 떠오릅니다. 수십 켤레인지 수백 켤레인지 주인을 잃은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쪼르르 바랜 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신발들에도 이 햇살이 담기겠구나, 그 신발을 신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되었고, 애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흰머리와 ..

나의 이야기 2022.11.02

노년일기 139: 밤, 그 사랑 (2022년 10월 27일)

밤의 계절입니다. '어두운 밤'의 '밤'은 짧게 발음하고 '맛있는 밤'의 '밤'은 길게 발음해야 합니다. 밤을 보면 '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면 부자' 라던 어린 시절 남동생의 말이 떠오릅니다. 남동생은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밤을 마음껏 먹고 있을까요? 생밤을 익혀 먹기는 생쌀을 익혀 먹기보다 어렵습니다. 맨 바깥 가시껍질을 벗은 밤에도 두 겹 껍질이 있습니다. 바깥 껍질은 단단하고 속 껍질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밤 껍질을 벗기는 데는 수고와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밤을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먹으려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개는 부모나 배우자, 자녀 등 가족에게 먹이려고 살 겁니다. 밤 껍질을 벗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고롭게 껍질을 벗겨 낸 밤을 자기 ..

나의 이야기 2022.10.27

노년일기 138: 달팽아, 미안해 (2022년 10월 23일)

따스한 가을 햇살 위로 가을바람이 스칩니다. 왜 '가을 햇살'은 두 단어이고 '가을바람'은 한 단어일까요? 때로는 표준국어대사전이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바람을 느끼며 걷다 보니 간판 없는 채소가게 앞입니다. 배추 세 통들이 한 망이 금세라도 구를 듯 놓여 있습니다. 겉껍질은 시들었지만 물에 담가 두면 푸르게 살아날 겁니다. 배추를 보는 저를 보았는지 가게 사장이 소리칩니다. "배추 6천 원!" 6천 원이면 한창때 가을배추 값입니다. 배춧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했더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달팽이가 두 마리나 나옵니다. 달팽이가 앉은 배춧잎 조각 채로 화분 흙에 옮겨둡니다. 하룻밤 물에 담가두니 시들었던 잎들이 본래의 초록으로 돌아옵니다. 한 통에 5, 6천 원 배추가 되었습니다. 절여두었던 배추를 씻는데..

나의 이야기 2022.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