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84

1월 3일의 다짐 (2024년 1월 3일)

활동적이시던 어머니가 몸을 일으키시지도 못하고 침묵으로 자식들을 가르치십니다. 어머니는 어느새 당신 몸 크기의 거울입니다. 자식들은 그 거울에 늙어 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늘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낯익은 다짐이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했으니 다시 상기하며 강고히 해야 합니다. 졸저 의 1월 3일자 글에도 그 다짐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고... 새 달력을 걸며 새해가 되었지만 세상은 지난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을 여는 해도 밤을 밝히는 달도 그대로이고 1월의 바람도 12월의 바람처럼 비릿하고 차갑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연도와 달력은 뭐 하러 바꾼다지?’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연도와 달력이 바뀌어 다행입니다. 연도가 바뀌지 않으면 12월 다음에 13월이 오고 13..

나의 이야기 2024.01.03

노년일기 204: 인생을 다시 산다면 (2023년 12월 31일)

2023년의 마지막 날. 다 잤다는 기분이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어젯밤 11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으니 좀 더 자야할 거야 생각하며 누워 있었지만 떠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상승은 드물고 낙하는 풍성했던 일년. 중력이 있는 지구에선 떨어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한 번쯤은 중력을 이기고 싶었는데 ... 그래도 사랑 많은 한 해였습니다.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기도하며, 지혜와 용기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빌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친구들은 선물과 다정한 말로 격려해 주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친절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다시 새 달력을 걸며 자문합니다. 지나간 일년을 다시 산다면, 아니 지나간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르게 살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시..

나의 이야기 2023.12.31

노년일기 202: 우리는 살아있다 (2023년 12월 26일)

2023년의 마지막 달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수많은 실패를 묻느라 마음이 바쁘지만 지나가는 해의 실패는 새해의 거름이 되겠지요. 몇 달 후면 94세가 되실 어머니는 자꾸 침묵에 빠져드시니, 앞서 가신 아버지와의 해후가 멀지 않은가 봅니다. 뵌 지 한참된 선배님이 소식을 주시고 만난 지 오랜 후배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수양딸들은 가족들을 돌보느라 바쁘면서도 안부를 묻고, 아들은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늙은 부모를 챙깁니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지만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선물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드는데 친구들이 말해 줍니다. '네가 있어 감사해'라고. 올해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동행을 그쳤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나 봅니다. 아직 갚아야 할 사랑이 많은가 봅니다.

나의 이야기 2023.12.26

노년일기 200: 내 인생의 칭찬거리 (2023년 12월 22일)

책 많이 읽는 동생이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 중에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는 , 저자는 마리아 포포바 (Maria Popova)입니다. 포포바는 11명의 '앞서 나간 자들'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삶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지무지하게 많은 책을 읽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터득한 지식에 사유를 곁들여 태피스트리와 같은 글을 자아낸 것이지요. 제게 사람은 풍경과 같은데 이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대개 역사를 만든 이들입니다. 그러니 몇 쪽만 읽어도 노벨상 수상자들의 강연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벌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 (Maria Mitch..

나의 이야기 2023.12.22

노년일기 199: 은서 어머니께 (2023년 12월 20일)

은서 어머니, 오늘도 그 베이커리 카페에 오시겠지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의 예쁜 얼굴은 언제나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하늘빛이니까요.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는 당신께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두 딸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일들이 당신의 얼굴을 어둡게 만드는 것 같아서입니다. 은서... 2013년 태어난 여자 아이 이름 중에서 열 번째로 많은 이름이라지요? 은서가 태어난 2015년에는 그 이름이 인기 있는 여자 아이 이름 순위표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그 사실과 은서의 행복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을 겁니다. 그 시끄럽지만 커피값이 싼 카페에서 나는 여러 차례 당신과 두 딸의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

나의 이야기 2023.12.20

노년일기 196: 간헐적 고문 (2023년 11월 5일)

어머니가 스물넷에 저를 낳아 어머니와 저는 띠동갑이 되었습니다. 띠가 같은 사람은 성격도 비슷할 것 같지만 어머니와 저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어머니는 외출과 여행을 좋아하시지만 저는 좋아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맛'과 '멋'이 제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다른 만큼 부딪치며 살았습니다. 저는 어리고 어머니는 어른인 기간 동안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게 가해하는 사람이었고 저는 피해자인 줄 모르는 피해자였습니다. 젊은 시절엔 늘 어머니의 불운을 상기하며 어머니를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계셨으면 저렇게 되시지 않았을 거라고, 어머니가 나만큼 교육을 받으셨으면 말씀을 저런 식으로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우리집 형편이 나..

나의 이야기 2023.11.05

노년일기 195: 사랑의 충고 (2023년 10월 21일)

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저를 '위해서' 한 말이 여러 날 잠을 방해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충고를 가장한 비판을 하시지만, 근래에 제 잠을 방해할 정도의 충고를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겐 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그만큼 살았으면 본인도 본인의 장단점을 알 테고 충고를 해도 고치지 않거나 고치지 못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지요. 불면을 초래한 충고 덕에 지난 삶을 돌이켜볼 수 있었으니,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삶은 변명 가능한 삶이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태어나 자라 나이 든다면 또 다시 그때와 다르지 않은 선택들을 하며 지금과 다르지 않은 흰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충고의 후유증은 오래갔습니다. '긴 시간동안 제법..

나의 이야기 2023.10.21

가을비 (2023년 10월 19일)

오랜만에 찾은 단골 카페 마당에서 수국들이 시들고 있었습니다. 대추를 떠나보낸 대추나무도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맞은편 장애인 주간 보호시설의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압니다. 앞마당을 붉게 물들이던 수국들과 데일 듯 뜨거운 여름 햇살에 오히려 빛으로 맞서던 대추나무 잎들, 주차장을 넘어 인도까지 넘나들던 장애인 시설의 자동차들을... 보이는 것은 늘 변하지만 진실은 그 변화 너머에 있는 것... 자박자박 문밖을 거니는 가을비, 시들던 수국과 기운 없는 대추나무를 반짝반짝 씻어 주겠지요. 주차장 바닥도 쌓인 먼지를 벗고 말개질 겁니다. 자박자박 비의 발소리를 들으며 시간처럼 진한 커피 마시고 싶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3.10.19

노년일기 191: 어머니의 고스톱 (2023년 10월 3일)

일주일 전 어머니를 만나고 온 후 아팠습니다. 어제 어머니를 만나고 온 후엔 펑 젖은 옷을 다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리 다려도 옷에선 자꾸 물이 나왔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러 경로당에 가니 어머니는 다른 분들이 고스톱하는 걸 구경하고 계셨습니다. "난 이제 못해. 계산을 빨리빨리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거든." 경로당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고스톱은 어머니의 취미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친구분들과 고스톱을 치셨고 그 자리는 늘 웃음바다였습니다. 고스톱을 못 치는 제게 어머니는 늘 이담에 무슨 재미로 살 거냐고 힐난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경로당에서 어머니의 집까지는 전봇대 두어 개 거리지만 어머니는 한 번에 걸어내실 수 없었습니다. 중간 지점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 앉아 차를 마시..

나의 이야기 2023.10.03

노년일기 190: 구름(2023년 9월 22일)

내일은 추분, 이제야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엔 흰구름이 대가의 붓질 같습니다. 저 큰 화면에 큰 붓으로 쓱쓱 그려 넣는 마음은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파란 하늘이 아름답다 하지만 흰구름이 없다면 파랑의 아름다움이 부각되기 어렵겠지요. 가끔은 구름에 훅! 큰 숨 불어넣어 하얀 구름이 포말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가을 하늘은 인생을 은유합니다. 육체가 겪는 고통은 육체가 평화로울 때 할 수 있는 일들의 즐거움을 부각시키고 정신이 겪는 힘겨움은 오히려 정신의 고양을 격려합니다. 젊은이들은 파란 하늘의 아름다움에 취하지만 노안은 구름의 아름다움에 감사합니다. 늙어가는 일은 깨닫는 일,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일! 눈, 코, 입, 귀... 가을이 스며듭니다. 여름내 지친 사람들 위로하는..

나의 이야기 2023.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