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81

노년일기 155: 누군가가 나를 추모할 때 (2023년 3월 10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친구 같은 책 몇 권이 있을 겁니다. 제게도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거나 숲 속에 들어앉고 싶을 때면 린다 엘리스(Linda Ellis)와 맥 앤더슨 (Mac Anderson)이 함께 만든 책 를 음미합니다. 는 아무개가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죽었음을 나타낼 때 쓰는 표시 (ㅡ)입니다. 예를 들어 '1900ㅡ2000' 가운데의 표시로서 바로 그 사람의 생애를 뜻합니다. 2010년 12월 이 귀한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김광호 선생님께 감사하며, 책의 제목이 된 시 'The Dash'의 마지막 연을 대충 번역해 옮겨둡니다. 봄은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는 계절, 생과 함께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So when your eulogy is b..

나의 이야기 2023.03.10

노년일기 151: 겨울 다음 봄 (2023년 2월 12일)

겨울 동안 집안을 환히 비추던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이 자꾸 떨어지며 푸른 꽃대에서 손톱보다 작은 새 잎들이 돋아납니다. 봄이 오는 겁니다. 꽃과 잎이 묻습니다. 겨울이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을까? 봄 다음에 봄 또 봄 다음에 봄이 와도 가버린 시간을 털어낼 수 있을까?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긴 겨울밤 덕에 달의 몸이 사위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몸에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겨울 덕에 봄을 생각합니다. 제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_copa7lBCg&t=4s&ab_channel=JimmyStrain

나의 이야기 2023.02.12

노년일기 150: 달, 달, 무슨 달... (2023년 2월 6일)

어젠 정월대보름. 달을 보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나쁜 제 눈에도 밝고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둥두렷했습니다. 제 손 좀 잡아주세요! 하고 외치면 잡아줄 듯 다정해 보였습니다. 달을 올려다보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둥글긴커녕 비죽비죽 날카로운 성정, 어둠을 밝히긴커녕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 같은 노인... 달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당신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빌었습니다. 빛을 내되 햇살처럼 날카롭지 않게 하소서. 어둠을 밝히되 스스로 너무 밝지 않게 하소서. 당신처럼... 차별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이야기 2023.02.06

노년일기 149: 젊은이는... (2023년 1월 19일)

젊은이는 빛이 납니다. 이목구비 균형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도 머리끝서 발끝까지 반짝입니다. 노인은 집에서 키운 하늘소 같아 이목구비 균형이 아무리 좋아도 빛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황금뇌를 떼어 팔며 살다 죽은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노인은 제 빛과 시간을 바꾼 사람입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이 그 분야 전문가가 되듯 긴 시간을 제정신으로 산 노인은 인생을 제법 알게 되고 젊어서 씨름하던 문제의 답을 얻기도 합니다. 젊음을 부러워하는 노인이 많지만 모든 노인들이 그러지 않는 건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빛나던 시절엔 몰랐으나 빛을 잃으며 알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노년을 흥미롭게 하고 살 만한 나날로 만듭니다. 그러면 젊음이 부럽다며 늙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뭐냐고요? 글..

나의 이야기 2023.01.19

눈물 납니다 (2023년 1월 16일)

선인장 화분 한 귀퉁이에서 꺽다리 토마토가 자랍니다. 앉은 자리는 좁은데 해를 향해 자꾸 자라니 푸른 허리가 아플 것 같습니다. 지지대를 대어 묶어 주어도 허리는 자꾸 휘어집니다. 밤낮없이 크는데다 잎도 이미 여럿이니까요. 반대편에 하나 더 지지대를 세우다 보니 눈물 납니다. 노란 별사탕꽃이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어둔 길 가로등 같습니다. 꽃의 꿈은 열매일 테니 이쑤시개만한 솜방망이로 꽃술을 만져 벌나비 흉내를 냅니다. 설 명절 지나고 입춘 오면 꽃자리마다 토마토가 열릴지 모릅니다. 선인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나의 이야기 2023.01.16

노년일기 148: 잘 살고 싶으면 (2023년 1월 6일)

어떤 책을 읽다가 혹은 읽고 나서 다른 책을 이어 읽는 일이 흔합니다. 책의 한 구절이 다른 책을 부를 때도 있고 그 책의 한 생각이 다른 책을 펼치게 할 때도 있고, 책의 주제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읽게 하기도 합니다. 안락사를 선택한 지인의 마지막 시간을 스위스에서 함께하고 쓴 신아연 씨의 책 를 읽다 보니 두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과 네덜란드 의사 Bert Keizer (베르트 케이제르)의 입니다. 세 저자는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이고 살아온 배경과 종교도 다르지만, 그들의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후회 적은 삶을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으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프기 전에는 죽는 것이 무척 두려웠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3.01.06

새 달력을 걸고 (2023년 1월 3일)

어느 날 은행 앞을 지나다 입구에 붙은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새해 달력 소진되었습니다'. 그제야 새해로구나, 새 달력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은행 달력을 걸어 두어야 돈이 들어온다고 은행 달력을 탐내는 사람이 많아 인터넷 시장에서 은행 달력에 웃돈을 얹어 판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어 해 동안 은행에서 준 달력을 걸었지만 살림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아는 우리나라 최고의 보험전문가 양심순 선생이 달력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저희 집은 2023년 달력 없이 새해를 맞았을 겁니다. 게다가 양 선생이 보내주신 달력은 3개월이 한 장에 담긴 달력이라 좋습니다. 12월에 못한 것 1월에 하자고 볼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새 달력을 걸며 하는 결심은 왜 만날..

나의 이야기 2023.01.03

새해 소망 (2022년 12월 31일)

2022년 12월 31일 새벽은 다른 어느 새벽보다 어둡습니다. 2023년 1월 1일부터는 저 어둠이 옅어질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엔 코로나 19가 그만 물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줄고 산책하는 사람은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SNS에 행복을 광고하는 대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친절이 곧 행복을 나누는 방법임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울고 있을 때는 형편이 좋아도 웃지 않고 모두가 고통받을 때는 복락을 자랑하지 않는 예의를 아는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세 개의 좋은 문장을 읽고 하루에 적어도 세 개의 좋은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의 생존과 생활을 도와주신 ..

나의 이야기 2022.12.31

노년일기 147: 크리스마스날 (202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부고를 받았습니다. 뜬금없이... '새로 태어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울지마 톤즈'를 방영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 영화를 보던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개인의 안락을 목표로 하는 대신 더 높은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 노력할 때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선의와 선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이름... 그분 덕에 말갛게 씻긴 눈을 닦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얀 눈은 사라지고 거뭇거뭇한 눈만 가로수 아래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눈은 흰눈일 때 눈 대접을 받고 사람은 의식이 제..

나의 이야기 2022.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