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82

노년일기 177: 노년의 적 1 (2023년 7월 18일)

'적 (敵)'은 '해를 끼치는 요소' 또는 '승부를 겨루는 상대편'을 뜻합니다. 공적으로 노년에 들어선 지금 저의 첫 번째 적은 저 자신입니다. 자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제가 저를 괴롭힙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입을 옷을 꺼내놓았어야 하는데 꺼내놓지 않아 짜증이 날 때가 있고, 옷을 벗고 입는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손이 둔해진 것을 느끼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부엌에서 일하다 양파를 가지러 베란다에 가서는 베란다 빨랫줄의 빨래만 걷고 빈손으로 올 때가 있는가 하면,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해 베란다를 청소한 후 판판하게 펼쳐 널어야지 하고 빨랫줄 한쪽에 걸쳐 놓았던 손수건을 그냥 두고 올 때도 있습니다. 오래 산 집인데도 집안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조금만 오래 서서..

나의 이야기 2023.07.18

노년일기 175: 배웅 (2023년 7월 10일)

어젠 아침 일찍 조계사에 갔습니다. 이 세상을 바꾸려 했던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가는 길, 위로차 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 대웅전과 마당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90년대 어느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이미 세상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 쪽으로 기운 사람이었지만 희망과 낙관으로 진력하는 그는 감동적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그를 돕겠다 마음먹었고 그의 노력은 꽤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성공의 값은 그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를 좋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염원과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먹구름을 끌어안고 있던 하늘이 모든 의식이 끝나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눈물에 온몸을 적시며 떠돌다 돌아왔습니다. 배웅의 후유증은 허기와 무기력... 살구 다섯 개를 먹고 잉그..

나의 이야기 2023.07.10

노년일기 174: 초콜릿 (2023년 7월 4일)

혈당이 떨어져 힘들 때 먹으라고 친구가 사준 초콜릿을 오래 먹지 않아 녹을 기미가 보일 때 앓아누웠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려서 듣던 어른들의 얘기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 '입이 쓰다'는 말의 뜻도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입이 쓰니 먹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약을 먹어야 하니 뭔가를 먹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평소에 먹지 않던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먹고 더위 탓에 물렁해진 초콜릿도 먹었습니다. 하나만 먹어야지 했는데 먹다 보니 한 봉을 다 먹었습니다. 초콜릿을 이렇게 많이 먹다니 바보가 되려는 건가, 아이가 되려는 건가... 며칠 앓고 일어나 초콜릿을 검색합니다. 네덜란드의 의학 저널에 실린 연구를 보니 초콜릿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인지력 쇠퇴를 예방하며, 심혈관계 위험을 ..

나의 이야기 2023.07.04

노년일기 172: 영화가 끝난 후 (2023년 6월 26일)

며칠 동안 고통에 잡혀 있다 일어나면 긴 영화를 보고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중력 아래 오롯이 빈 종이처럼 존재하던 시간을 채운 건 무수한 상념과 기억입니다. 젊은이에겐 포기할 수 없는 꿈과 계획이 있겠지만, 낡은 몸에 담긴 오래된 정신에게 미래는 말 그대로 '미래(未來)', 오지 않은 혹은 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상념과 기억을 털며 다시 직립하는 인간으로 돌아가려 준비하다 보면 앞서간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임기는 우리의 생김처럼 다른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는 아예 상관없는 것인가...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듯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 책상 앞에 앉습니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잡일들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 좋은 점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나의 이야기 2023.06.26

노년일기 171: 어떤 자서전 (2023년 6월 11일)

태어난 직후는 절망의 시기: 또 태어나다니! 십대는 절망과 도피의 시기: 어차피 죽을 텐데 왜 늙어 죽도록 살아야 할까... 책 속으로 도피. 이십대 삼십대는 가면의 시기: 온 힘을 다해 죽음에의 욕구를 누르며 남들과 같은 척하기. 사십대는 조롱의 시기: 아직 살아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한편 삶과 죽음을 어렴풋이 파악함. 오십대는 가끔 웃는 시기. 육십대는 조금 더 자주 웃는 시기. 칠십은 낯익은 절망과 만나는 시기. 희망이 보이는 시기.

나의 이야기 2023.06.11

노년일기 170: 큰 나무 아래 (2023년 6월 7일)

이 나라는 아직 건설 공화국이라 자꾸 큰 나무를 베거나 뽑고 작은 나무를 심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교 앞에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이 많았는데, 학교 앞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게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 한 귀퉁이에 있는 산인데 아직 한 번도 가 보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지금의 룸메이트가 제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그때이지만 제 꿈은 지금과 같았습니다. 늘 큰 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남편이 가난한 아내의 꿈을 이뤄주려고 산 산이니 전국에서 가장 값이 싼 산이었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살다가 힘들 땐 그 산을 생각했습니다. 난 언제든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그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나의 이야기 2023.06.07

나는 꽃 도둑 (2023년 6월 4일)

산책길 가로수 아래 꺾인 채 버려진 꽃이 여러 송이입니다. 노란 꽃, 하얀 꽃, 큰 꽃, 작은 꽃... 활짝 핀 얼굴도 점 같은 봉오리도 모두 꽃입니다. 이 꽃들을 꺾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땡볕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 가로수 밑에 이 꽃들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꽃을 꺾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 꽃을 건네받은 누구일까요? 시들고 있는 꽃이 가엾어서 집어들고 왔습니다. 노란 꽃은 목이 길고 하얀 꽃은 목이 짧아 한 꽃병에 꽂을 수 없으니 목 긴 꽃은 조금 깊은 병에 꽂고 짧은 꽃은 작은 술잔에 담습니다. 그래봤자 다 제 손가락 길이입니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봅니다. 꽃들이 소리없이 물을 빨아들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기가 돕니다. 땡볕 아래 말라 죽거나 꽃병의 물을 먹다 죽거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나의 이야기 2023.06.04

노년일기 169: 유월의 기도 (2023년 6월 1일)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늘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지혜는 버릴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용기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겠지요. 지나가는 것들에 마음 쓰지 말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한 발씩 앞으로!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 AD)의 명상록 9권 33번 째 문단이 친구 같습니다. 33. All that your eyes behold will very quickly pass away, and those who saw it passing will themselves also pass away very quickly; and he who di..

나의 이야기 2023.06.01

노년일기 168: 나의 전생 (2023년 5월 28일)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전생을 불러냅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生에서 저는 비였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서는 목마른 풀이었습니다. 적어도 두어 번의 생에선 젖은 풀 사이를 킁킁대는 떠돌이 개였고, 적어도 두어 번은 젖은 잎새에 매달린 무당벌레였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래 못 본 친구처럼 반갑고 남들이 잡초라 하는 풀들이 제 눈엔 그리 아름다운 거겠지요. 그러니 남의 손에 이끌리는 개들과 풀잎 위 위태로운 무당벌레 모두 그리도 애틋하겠지요. 사람으로 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살 때 새긴 작은 브이 (V)자가 지금도 제 이마엔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살았기에 파스타를 여러 끼 먹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중국, 프랑스, 일본, 영국, 독일, 인도, 쿠바, 베트남, 남아프리카,..

나의 이야기 202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