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갔습니다. 인사동은
계속 달라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옛날은 가고 오늘은 오니까요.
길은 복잡하고 상가는 현란했지만
전시장 안은 대개 조용했습니다.
첫 번째 전시장에 들어갈 때는 잠깐
망설였습니다. 언뜻 보기에 만화
캐릭터 상품이 모인 팬시용품 가게
같았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보고는 놀랐습니다.
젊은 작가 다수가 함께하는 전시이고
그중 여러 작가는 그림을 그릴 뿐만 아니라
다른 작업도 하는 것 같았는데, 대부분
색을 쓰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래전 문화부 기자로서 미술을 담당할 때
만났던 젊은 작가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당시 젊은 작가가 전시회, 특히 개인전을
하려면 돈 많은 부모가 있어야 했습니다.
부모 덕에 일찍부터 그림을 배운 사람들이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색을 쓰는 방법도
모르면서 부모 돈으로 전시회를 하며 거창한
'작가의 말'이 담긴 화려한 팸플릿을 만들어
보낸 걸 받으면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습니다.
어제 그 전시회는 작가들 스스로 연 것
같았습니다. 오래전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에서
보았던 치기와 허세는 없고, 그리고 싶은 것을
겸손하게 그려낸, 젊지만 이미 세상을 알아 버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이 계속 그리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깊고
높은 경지에 닿는 희열을 느끼며 불멸에
도전하길 빌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전시는 단색화 풍 대작들이
많이 걸린 개인전이었습니다. 유화물감을
마음껏 사용한 두꺼운 마티에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작가가 부자인가 보구나...
그이는 부자일 뿐만 아니라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아름다웠으니까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전시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한 무리였습니다. 단색화들이 보통 그렇듯
그림들은 명상과 집중을 격려하는데, 그 무리는
스마트폰 속 AI에게 '비트박스를 해봐' 하는 식의
명령을 내리며 큰소리로 깔깔댔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의 작가가 그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감상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전시회를 하는 이유는 아마도 새 출발일 겁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갈 길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관객이 그림을 보러 가는 이유는
화가의 노고가 이루어낸 아름다움을 치하하면서, 그가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며 신발끈을 고쳐 매기 위한 것일 겁니다.
그러니 형편없는 작품과 형편없는 사람들은 있어도
유용하지 않은 전시회는 없는 것이지요.
오랜만의 전시회 투어, 발은 아팠지만 즐거웠습니다.
마침내 3월입니다. 지나간 겨울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하기 좋은 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VvE-JDbv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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