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고 나면 긴 여행을 한 것 같습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 함께 흘린 눈물... 무엇보다 그와 나 모두
고아가 되었고 젊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름에 '별'이 들어간 그 친구와 저를 이어준 건 제 첫 번째 책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입니다. 마침
제 블로그 방문자 중에 이 책에 대한 글을 보신 분이 계시어
저도 15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책을 냈을 땐 부끄러워
병이 났지만, 친구를 만나게 해 준 고마운 책입니다.
흔들림 없는 우정에 감사하며, 2010년 1월 4일 이 블로그에
쓴 글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문성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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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는 오래 전 제가 쓴 시이자,
그 시가 수록되어 있는 책의 제목입니다. 1991년에 나온 초판 1쇄본
146쪽엔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아 앉힌 시와 산문이 실려 있고, 표지엔
보라와 회색이 섞인 듯한 바탕 한가운데 핑크색 작은 네모 속에 흰 선으로
사람 하나와 하트 하나가 그려져있습니다. 지금은 중견 그래픽디자이너가
된 제 아우 김수자의 그림입니다.
1980년대는 한국 사람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였습니다. 생각은 많고
할 수 있는 일은 적은 신문기자로서 제겐 매일이 전투와 같았습니다.
한정된 자유 속에서 기사를 취재하고 쓰면서, 저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기사 마감을 한 후 찻집에 앉아, 혹은 오가는 자동차 안에서
흘러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노트에 적었습니다. 그 노트에 끄적였던 글들이
가감삭제의 과정도 없이 우연과 필연의 도움으로 책이 되어 나왔을 때,
병이 났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나간 것 같았으니까요.
책을 출판해준 '서해문집'이나 저자인 '김흥숙'이나 모두 무명이었으나,
이 책은 제법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표지를 바꿔 출간되기도 했고
초판이 나오고 십년 후인 2001년에 저도 모르게 드라마에 출연하는 바람에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던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이 책에 있는 시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 책의 제목이 잘못 소개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지금도 인터넷엔 잘못된 제목이 떠돌고 있습니다.
잘못된 제목 중엔 "그대를 부르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가 있는가 하면
"그대를 부르면 언제나 목이 메이고"도 있어 웃음을 자아냅니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 중에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바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인 듯합니다. 지금 보면 썩 잘 쓴 시라
할 수 없지만 처음 출판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여기에 옮겨봅니다.
그때 이 시는 "편지(넷)"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습니다.
편지(넷)
다시 그대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쓰는 행위는 나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고 부치지 않음은 그대를 평안케함이다.
시간이 큰 강으로 흐른 후에도 그대는 여전히 내 기도의 주인으로 남아
내 불면을 지배하는 변치않는 꿈이니 나의 삶이 어찌 그대를 잊고 편해지겠는가.
다시 겨울이 월요일처럼 왔으나 그대를 못 보고 지난 주말 같은 한 해가
마냥 계속될 것만 같다.
그래, 삶은 평안하며 날씨는 견딜 만한지.
무엇보다 그곳에도 가끔은 세상의 눈 벗어던지고 열중할 사랑이 있는지.
언제나, 그대여, 대답되지 않는 삶의 질문들로 목이 마를 때에는 오라!
그대를 위한 문은 여전히 열어둔 채 또 불면의 침낭에 나를 눕히니 밤낮으로
내 부엌 한 켠에서 끓고 있는 찻물과 그대를 위해 갈아 꽂는 가을 꽃들이
아주 열반하기 전에 오라, 그대여.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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