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65

노년일기 130: 고무줄 (2022년 8월 19일)

몇 년 전만 해도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서는 건 몹시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올여름은 반바지 두 벌로 버텼습니다. 다리 절반이 노출되니 시원한데다 뜨거운 직사광선이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말도 들어서입니다. 한 벌은 가족이 입던 것으로 엉덩이 부분이 해어져 꿰매어 입었지만, 헌옷수거함 출신인 다른 한 벌은 출신지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새 것입니다. 삼사 년 묵은 초가지붕 색과 짙은 남색인데, 두 바지 모두 면을 꼬아 만든 띠로 허리둘레를 조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허리밴드가 신축성이 없다 보니 바지를 입고 벗을 때마다 띠를 묶었다 풀었다 해야 해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어느 날 띠를 빼내고 고무줄을 넣었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아, 또 하나 닮고 싶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고무줄 같은 ..

나의 이야기 2022.08.19

노년일기 129: 요섭의 속눈썹 (2022년 8월 10일)

오른쪽 눈의 속눈썹이 눈꺼풀을 찔러 상처가 났습니다. 나이들며 눈꺼풀이 내려오는데다 더위로 인해 피부가 거의 항상 젖어 있으니 속눈썹처럼 약한 자극에도 상처가 나는 것이겠지요. 쌍꺼풀의 겹진 부분이라 남의 눈엔 잘 보이지 않지만 쓰라립니다. 속눈썹 하면 요섭이 떠오릅니다. 경향신문 정치부 정요섭 기자...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던 그와 저는 1980년대 중반 외무부(지금의 외교부) 출입기자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두환 정권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기자들이었고, 저는 당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에 있던 외무부 기자실에 출입하던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요섭과 저는 가끔 8층 창가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읊조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기자실의 큰 테이블에 앉아 뭔..

나의 이야기 2022.08.10

노년일기 128: 포기하겠습니다 (2022년 7월 25일)

오래 전 제게 보약을 지어주시던 선생님은 '나쁜 점은 하루라도 젊을 때 빨리 고쳐야 한다. 나이들면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꼭 나쁜 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기질은 나이들며 점차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흔 넘은 어머니와 일흔이 가까워지는 딸의 만남이 자꾸 삐그덕거리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겠지요. 하루라도 집에 머물면 병이 나신다는 어머니와 달리 저는 가능한 한 집안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많은 물건이 있는 곳을 매우 싫어하는데 어머니는 사교와 백화점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부르시면 싫다는 말을 못하고 백화점에 동행하곤 했습니다. 다녀와서 앓는 것은 저와 함께 사는 가족들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흔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외출을 좋아하시고 그 외출에..

나의 이야기 2022.07.25

바람, 나의 바다 (2022년 6월 28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바다, 그 바다가 오늘 제 창문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시속 24.1 킬로미터 남서풍을 타고 온 겁니다. 창가에 서서 눈을 감습니다. 머리칼과 치마가 바람을 타고 얼굴과 몸을 휘감습니다. '타이타닉'의 뱃머리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바람과 바람이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성난 아버지와 주눅든 아들처럼 낮고 높은 말을 주고받습니다. 바람이 바다를 옮기며 묻어 두었던 말을 쏟아내는 동안 새들은 침묵합니다. 예의를 모르는 건 사람뿐이니까요. 파도가 거세어지고 바람의 목소리가 거칠어집니다. 길을 방해하는 마천루들 때문이겠지요. 잠시 눈 뜨고 내려다보니 바쁜 택배 차들과 휴대전화에 잡힌 행인들, 영락없는 어제입니다. 멀리서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울립니다. 누군가가 바다를 만나는..

나의 이야기 2022.06.28

노년일기 125: 해후 (2022년 6월 23일)

살아 있어 좋은 점 한 가지는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의 어머니는 기억, 어머니 덕에 이번 주엔 두 번이나 귀한 해후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44년 만에 만난 신문사 후배는 그새 성공한 회사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 신문사에 견습기자로 들어와 머문 시간은 고작 6개월, 그때 함께 일했던 선배 중에 두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라고 했습니다. 으리으리한 호텔 식당에서 아름답고 맛있는 밥을 먹고 그가 사준 고급 카스텔라를 들고 돌아오는데 참 기뻤습니다.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북악도 아름다웠지만 출세가 바꾸지 못한 그 얼굴의 맑음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사람에겐 아홉 개의 얼굴이 있다고 하고 저는 그의 얼굴 중 하나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코끼리보다는 한라산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코..

나의 이야기 2022.06.23

노년일기 124: 말하지 말고 (2022년 6월 14일)

첫 직장에서 만 12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때로는 교사로서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제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 실력 있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 기자로서는 존경스러웠지만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기사를 잘 못 쓰는 기자들을 꾸짖는 태도가 특히 거슬렸습니다. 잘못을 야단치는 데서 벗어나 '국민학교는 나왔냐?'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했으니까요. 그 선배에게 늘 당하던 기자 하나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을 때는 그 선배로 인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는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여성들로부터 전화가 자주 왔습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회사로 전화가 왔고 그러면 제일 후배인 제가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줄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2.06.14

자연의 선물, 사람의 선물 (2022년 6월 8일)

무안에서 아카시아꿀이 왔습니다. 은은하고 투명한 꿀을 들여다보자니 벌들의 분주한 날갯짓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꽃의 자당을 꿀벌이 먹었다 토해낸 것이 꿀이라니 저 꿀을 먹는 것은 꽃과 벌, 그들의 생生을 먹는 것이겠지요... 너무도 아름다워 차마 먹을 수가 없습니다. 꿀은 보관만 잘하면 아무리 오래두어도 변하지 않는다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고흥에서 마늘과 양파가 왔습니다. 재래종 마늘은 초롱초롱 똘똘한 어린이 같고 양파는 심지 굳은 청년처럼 단단합니다. 가을에 심어져 겨울을 난 양파와 마늘, 둘은 오래전부터 저를 맑히우는 친구입니다. 지도에서 무안과 고흥을 찾아봅니다. 무안은 함평과 목포 사이 서해안에 접해 있고 고흥은 저 남쪽 보성 아래 바다에 있습니다. 무안도 고흥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곳에서 오는 ..

나의 이야기 2022.06.08

노년일기 123: 사랑의 수명 (2022년 6월 5일)

아흔둘과 아흔셋 사이를 걷고 계신 어머니와 점심을 먹기 위해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나니 "여보세요?" 낯익은 음성이 들립니다. 반가움과 함께 슬픔이 밀려듭니다. 언젠가 이 번호에 전화를 걸어도 이 목소리가 안 들릴 때가 올 겁니다. 어머니 댁으로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태우고 식당으로 갑니다. 연희동의 중국식당을 고르신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길에 바뀝니다. "저기, 저 까만 건물에 있는 식당에 가자!" 고 하십니다. 늘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이 길다는데 오늘은 줄이 없습니다. "일요일엔 안 하는 거 아니에요?" 묵묵부답이신 걸 보니 보청기를 끼셨어도 들리지 않나 봅니다. 차에서 내려 입구로 가니 문이 잠겨 있습니다. 차는 이미 떠났으니 주변의 식당을 찾아 봐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새로..

나의 이야기 2022.06.05

노년일기 122: 옛 친구 (2022년 6월 2일)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이 있지만 오래된 친구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엔 열심히 자신을 탐구하고 이웃에 도움되는 삶을 지향해 영감을 주던 친구가 나이들며 일신의 안락만을 좇아 실망을 주기도 하고, '이 나이에 무슨 책을 읽느냐'며 무지를 자랑하거나 '이제 칠십이 코앞이니 내 맘대로 편하게 살겠다'며 안하무인적으로 행동해 부끄럽게 만드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날 때는 작은 선물과 함께 실망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엊그제 삼십 여 년 전 한 직장에서 근무했던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몇 년에 한 번씩 만났던 터라 그 친구의 변함없는 맑음을 알고 있었지만, 노년에 가까워지며 갑작스런 변화를 보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친구..

나의 이야기 2022.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