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573

나뭇잎을 닦으며 (2023년 3월 20일)

먼지 속에서도 봄이 옵니다. 먼지 앉은 나뭇잎을 닦다 보면 머릿속도 말개지는 것 같습니다. 물을 많이 먹어 썩은 나뭇가지를 잘라내며 과유불급,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고 지나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해침을 상기합니다. 대파가 쑥쑥 자라고 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운 베란다를 서성이다 보면 부끄럽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키우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아래는 정호승 시인의 에 수록된 시 '나뭇잎을 닦다'입니다.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

나의 이야기 2023.03.20

완벽한 인간을 위한 자연의 시도 (2023년 3월 6일)

오래전 읽은 책이 문득 찾아와 영 떠나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하는 수 없이 다시 읽어야 합니다. 수십 년만에 미국 작가 손턴 와일더 (Thornton Wilder: 1897-1975)의 를 읽고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대학 축제 때 연극 '우리 읍내'를 공연하는 학교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3막으로 이루어진 이 희곡은 그로버스 코너즈 (Grover's Corners)'라는 가상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읽은 2막의 문장 몇 개를 아래에 옮겨둡니다. 말없음표는 단어들이 생략됐음을 뜻합니다. "... every child born into the world is nature'..

오늘의 문장 2023.03.06

네 잎 클로버, 세 잎 클로버 (2023년 3월 4일)

어젠 동네 큰길과 골목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가득했습니다. 학교 많은 동네에 사는 재미를 만끽했다고 할까요? 학교 옆 카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어머니들로 붐볐습니다. 전엔 카페 안팎을 종횡무진하는 아이들이 눈에 거슬렸는데 이젠 귀엽기만 하니, 제가 나이 덕을 보나 봅니다. 종일 온갖 배움터를 드나들며 바쁘게 지내던 아이들이 모처럼 쉬는 시간을 즐기는구나 생각하니 아이들이 행복한 쉼표들처럼 보였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자라거라! 행운과 행복을 누리면서!'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후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에서 아름다운 클로버 무더기를 만났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김수자 씨의 그림은 온통 행운..

동행 2023.03.04

황소, 얼룩소, 칡소, 젖소 (2023년 2월 27일)

경향신문을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데 엄민용 기자의 '우리말 산책'처럼 고마운 글 때문에 아직 보고 있습니다. 우리말이 엉망이 되어간다고 안타까워하는 제가 우리말에 얼마나 무식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엄 기자에게 감사하며 오늘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옮겨둡니다. 우리말 산책 얼룩소는 ‘젖소’가 아니라 ‘칡소’다 ‘황소’ 하면 누런 털빛의 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황소는 털빛과 상관없이 “큰 수소”를 뜻하는 말이다. ‘황소’는 15세기만 해도 ‘한쇼’로 쓰였는데, 이때의 ‘한’은 “크다”는 의미다. 황소와 닮은꼴의 말이 ‘황새’다. 황새도 키가 큰 새이지, 누런 털빛의 새는 아니다. 황새의 옛 표기 역시 ‘한새’였다. 황소가 누런 털빛과 상관없음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

동행 2023.02.27

노년일기 153: 시가 있어 '봄' (2023년 2월 24일)

젊은 시절엔 화 내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했습니다. 일엔 게으르면서 사교엔 부지런한 사람들도 이상했습니다. 타인이 무심코 뱉은 말에 상처를 입을 때도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누우면 그런 일들이 잠을 방해했습니다. 나이 덕을 보아서인지 화 내는 일이 줄었습니다. 내가 볼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다른 사람에겐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만큼 사교에 부지런한 사람도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 본인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일 뿐 나와는 상관없음도 알았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로 인해 우울한 기분이 들 땐 시를 읽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 1812-188..

동행 2023.02.24

노년일기 152: 했던 말씀 또 하시네! (2023년 2월 22일)

아흔 넘은 어머니를 만나 점심 먹고 차 마시다 보면 '했던 말씀 또 하시네!'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전에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곤 했는데 요즘엔 그러지 않습니다. 했던 말씀을 반복하셔도 좋으니 앞으로도 쭉 지금처럼 만날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엔 우연히 집어든 류시화 씨의 책 에 나오는 그랙 맥도널드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엄마, 그 얘긴 한 삼백 번 하셨는데' 했던 걸 반성했습니다. 75세 노인이 쓴 산상수훈 내 굼뜬 발걸음과 떨리는 손을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내 귀가 얼마나 긴장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중략) 오늘 내가 물컵을 엎질렀을 때 별일 아닌 걸로 여겨준 자에게 복이 있나니, (중략) 나더러 그 얘긴 오늘만도 두 ..

동행 2023.02.22

아기가 태어났대요! (2023년 2월 20일)

태어나는 게 좋은 일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기가 태어나야 인간 세상이 유지 또는 발전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출생률이 자꾸 낮아지는 사회는 유지, 발전하기 어려우니 저출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저출생을 걱정하지만 언론엔 아기들이 학대당하다 사망했다는 뉴스와, 잘못된 제도 탓에 아기 키우기가 힘들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 오래된 모순이 어서 해결되어 누군가의 아기가 태어날 때 모두 함께 기뻐하고 그 아기가 자랄 때 모두가 제 아이처럼 응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아래 글의 서두에 나오는 '금줄'은 '禁줄'이고 '禁'은 '금할 금'입니다. “우리 동네 아이가 태어났어요” 차준철 논설위원 예전에는..

동행 2023.02.20

파슬리 한 조각 (2023년 2월 17일)

어떤 책은 그 자체로서 영감이나 각성, 위로를 주지만 어떤 책은 다른 책이나 사람을 저와 이어주는 다리가 됩니다. 최근 카페에서 본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의 책이 바로 그런 다리였습니다.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300쪽에 나오는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 영국 사상가, 미술평론가)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배울 가치가 있는 이유는, 데생이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가 강의 끝에 했다는 말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한국어 번역서의 문장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클레어 시장에 걸어 들어간다고 해봅시다..

동행 2023.02.17

2월이 28일인 이유 (2023년 2월 14일)

어린 시절 저희 집 살림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신문을 세 가지나 구독하시니 어머니가 둘은 끊고 하나만 보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답니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신문에서 한 가지만 배워도 한 달 신문값은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그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신문을 끊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인터넷 시대가 되었으니 종이 신문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여전히 신문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선 포털사이트가 선정한 기사를 보거나 관심 있는 주제만 찾아 보게 되지만, 신문은 세상의 소식과 의견을 두루 보여주고 선정적 정보들이 주류인 인터넷과 달리 변치 않는 지식도 제공하니까요. 우리말 산책 집권자 이기심에 무너진 달력의 원칙 엄민용 기자..

오늘의 문장 2023.02.14

어찌할까, 어찌할까 (2023년 2월 8일)

어떤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아름답고 어떤 사람은 침묵할 땐 그저 그런데 말을 하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말을 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 중엔 말만 잘하는 사람이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은 말과 달리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말도 잘하는 사람은 행동거지와 삶이 진실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말도 잘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어찌할까, 어찌할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공자는 말 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속은 강하고 굳세면서 겉은 질박하고 어눌한 ‘강의목눌(剛毅木訥)’이 이상적인 인격에 가깝다고 했다..

동행 202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