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573

시, 그리고 '시시한 그림일기' (2023년 2월 3일)

이름 있는 병에 잡혀 3년 간 투병하느라 애쓴 제 아우 일러스트 포잇 (Illust-poet) 김수자 씨가 다시 현업에 복귀했습니다. (원래 남에게 제 아우를 얘기할 때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게 옳지만 그도 이제 회갑이 지나 '씨'를 붙였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오랜만에 그의 블로그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 새 그림이 걸렸습니다. 투병하는 동안 '나의 아픔은 별것 아니라는 주문으로 엄살 부리지 않으려 애썼다.'는 그의 토로를 읽으니 머리가 다 빠지고 키가 줄어들 만큼 고통을 겪으면서도 의연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자랑스러운 아우, 존경스러운 사람, 김수자 씨의 건강과 활약을 축원하며 그의 새 작품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이르사 데일리워드(Yrsa Daley-Ward)의 시 아래 글은..

동행 2023.02.03

책상 위의 고양이 (2023년 1월 30일)

작년 가을쯤 고양이 한 마리가 제 책상 위 스탠드 아래에 자리 잡았습니다. 부드러운 흰 헝겊 피부, 검은 머리에 붙인 분홍 리본이 어여쁘지만 큰 눈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제 게으름을 감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 첫 달이 끝나가는 오늘에야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엘리엇으로 지었습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영국인으로 죽은 T.S. 엘리엇의 시 '고양이 이름 짓기 (The Naming of Cats)' 때문입니다. 영문까지 쓰려니 너무 길어 대충 번역해 올려둡니다. 고양이 이름 짓기 고양이 이름 짓기는 어려운 일이야 쉬는 날 재미로 할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고양이에겐 세 개의 이름이 필요해 우선 가족..

오늘의 문장 2023.01.30

소설가란... (2023년 1월 27일)

책을 읽는 사람은 계속 줄고 있지만 글을 쓰는 사람도 줄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중에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건, 책을 읽는 사람이 아무리 줄어도 글을 쓰는 사람은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중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121쪽: "이처럼 소설가란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다. 그리고 일단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뻔뻔스러워져서 끝까지 계속 이야기를 하고야 마는 인간인 것이다." -

동행 2023.01.27

피아니스트 임윤찬 (2023년 1월 24일)

오랫동안 인터넷의 폐해를 견뎌온 보상을 오늘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런던 위그모어홀 콘서트. 아래 링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JeGcWZ-K5Q&ab_channel=WigmoreHall '그는 천재다, 그와 동시대에 살게 되어 영광이다...' 그를 칭송하는 무수한 댓글들을 읽는데 문득 떠오르는 한 생각: 2004년 3월 20일에 태어났다지만 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라는.

동행 2023.01.24

눈물 납니다 (2023년 1월 16일)

선인장 화분 한 귀퉁이에서 꺽다리 토마토가 자랍니다. 앉은 자리는 좁은데 해를 향해 자꾸 자라니 푸른 허리가 아플 것 같습니다. 지지대를 대어 묶어 주어도 허리는 자꾸 휘어집니다. 밤낮없이 크는데다 잎도 이미 여럿이니까요. 반대편에 하나 더 지지대를 세우다 보니 눈물 납니다. 노란 별사탕꽃이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어둔 길 가로등 같습니다. 꽃의 꿈은 열매일 테니 이쑤시개만한 솜방망이로 꽃술을 만져 벌나비 흉내를 냅니다. 설 명절 지나고 입춘 오면 꽃자리마다 토마토가 열릴지 모릅니다. 선인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나의 이야기 2023.01.16

톨스토이의 누나 (2023년 1월 12일)

며칠 전 카페에서 법정 스님의 을 읽다가 홀로 웃었습니다. 스님이 165쪽에 인용해 두신 의 구절들 때문인데, 이 책은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딸인 알렉산드라 톨스토이가 썼다고 합니다. 아래에 저를 웃긴 문장들을 옮기다 보니 고기 반찬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고모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식도락가였는데 어느 날 야채 일색의 식탁을 대하고서는 크게 화를 냈다. 자기는 이런 허섭쓰레기 같은 것은 못 먹겠으니 고기와 닭을 달라고 했다. 다음 번에 식사를 하러 온 고모는 자기 의자에 매여 있는 살아 있는 닭과 접시에 놓인 부엌칼을 보고 '이게 뭐야' 라고 놀라서 물었다. '누님이 닭을 달라고 했잖아' 하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린 아무도 그걸 죽일 생각이 없거든. 그래서 누님..

동행 2023.01.12

새해 소망 (2022년 12월 31일)

2022년 12월 31일 새벽은 다른 어느 새벽보다 어둡습니다. 2023년 1월 1일부터는 저 어둠이 옅어질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엔 코로나 19가 그만 물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줄고 산책하는 사람은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SNS에 행복을 광고하는 대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친절이 곧 행복을 나누는 방법임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울고 있을 때는 형편이 좋아도 웃지 않고 모두가 고통받을 때는 복락을 자랑하지 않는 예의를 아는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세 개의 좋은 문장을 읽고 하루에 적어도 세 개의 좋은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의 생존과 생활을 도와주신 ..

나의 이야기 2022.12.31

그녀를 기리며 (2022년 12월 28일)

꽤 오래 직장생활을 했지만 일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월급은 적고 집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한 일의 결과가 성에 차지 않아 어두운 얼굴일 때가 많았습니다. 더 나은 결과를 거두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선 젊은 시절 제 고민 같은 것은 '사치'가 되고 일터에서 죽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을 위해 일하는 곳이 '생활 전선'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선에서 사망자가 속출하다니... 세계 10위 권에 드는 경제력을 가진 국가는 이런 것일까요? 일터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단은 길고 길지만 지난 시월 SPC 계열사에서 숨진 스물셋 젊은이가 유독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그녀의 죽음이 2주 후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로..

동행 2022.12.28

일본 가는 한국인들 (2022년 12월 22일)

지난 달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밉다고 일본제 볼펜을 발로 밟고 유니클로를 사면 매국노라 욕하던 한국인들은 아니겠지요? 최근 일본정부는 평화헌법을 포기하고 국방 예산을 대폭 늘릴 계획을 발표해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국회와 대통령실과 외교부가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일본의 '몰락'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장담하건데 일본은 몰락하지 않습니다. 아니, 몰락할 수 없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한국은 사라져도 일본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한국이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큼을 보여주는 현상이 많듯 일본이 몰락할 가능성이 적음을 보여주는 현상도 많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월간지 '문예춘추 文藝春秋'가 내년 ..

동행 20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