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5

김종건 교수님... (2023년 12월 4일)

교수님,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되셨군요. 조이스가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 교수님은 부끄러운 듯 웃으시겠지요. 세계의 국가들을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 중에는 조이스의 와 를 제 나라 말로 번역한 번역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교수님 덕택에 번역본을 가진 소수의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번역본을 가진 네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1988년 11월 교수님은 소설 번역본 세 권과 주해서 한 권으로 구성된 완역본을 출간하셨고, 저는 12월 말 어느 날 고려대학교의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교수님의 방은 조이스와 더블린 지도를 비롯한 자료로 가득했습니다. 철없던 저는 교수님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교수님을 놀렸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조이스가 ..

동행 2023.12.04

서머싯 몸의 문장들5: 이방인 (2023년 12월 1일)

오늘은 룸메이트의 생일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마지막 미팅에서 만난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 파트너가 되었는데, 그가 지금의 룸메입니다. 인생은 'B-C-D'라는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Birth(태어남)-Choice(선택)-Death(죽음)'. 수십 년 전 룸메를 선택하여 함께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그가 이 사회의 방식에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태어난 이후 줄곧 한국에 살았으나 이곳은 늘 이방처럼 느껴지는데, 그 또한 저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민자들처럼 이 사회를 낯설어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부축합니다. 서머싯 몸의 에서 아래 문단이 눈길을 끈 이유입니다. P. 18..

오늘의 문장 2023.12.01

<달과 6펜스>와 폴 고갱 (2023년 11월 28일)

서머싯 몸의 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한참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건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쉽게 이해되는 문장들이 있는가 하면, 잡힐 듯 잡히지 앉는 문장들도 있습니다. 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이었습니댜. 대학 시절에 읽고 다시 읽는데 처음 보는 책 같았습니다. 이 책은 서머싯 몸이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주인공이 그림에 전념하겠다고 인생 항로를 바꾸고 타히티 등 남태평양의 섬에서 살다 죽는 것도 고갱을 닮았습니다. 를 읽고 난 후 영문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Paul_Gauguin)에서 폴 고갱을 찾..

오늘의 문장 2023.11.28

서머싯 몸의 문장들4: 운명 (2023년 11월 26일)

과학은 발달했지만 인류가 아직 답하지 못하는 오래된 질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중 하나는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인가,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가겠다!' 하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며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아,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게' 라고 하는 걸 가끔 봅니다. 피하고 싶은 운명이 있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서머싯 몸은 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라'고 합니다. P. 129 We must go though life so inconspicuously that Fate does not notice us. And let us seek the love of simple, ignorant people. Their ign..

오늘의 문장 2023.11.26

서머싯 몸의 문장들3: 예술과 예술가 (2023년 11월 24일)

대학교 2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써 본 단편소설이 학보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축하해 주었지만 저는 늘 죽음을 고민하던 터라 기쁜 줄도 몰랐습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저를 더 우울하게 만든 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삼촌이었습니다. 학보에 게재된 제 소설을 보고 "글이 너무 위티해서 잘못하면 박완서 같이 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박완서 선생은 연세 드실수록 좋은 작품을 많이 쓰셔서 한국 문학에 이정표를 세우셨지만, 초기엔 그분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다양했고 외삼촌은 그분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훗날 그분의 팬이 된 저도 그때는 그분의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삼촌의 말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읽고 쓸수록 작가에게 위트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

오늘의 문장 2023.11.24

서머싯 몸의 문장들2: 사람들 (2023년 11월 22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존재들 중에 사람처럼 재미있는 존재도 없을 겁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생김새도 종류도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재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점들--장점이든 약점이든--과 그 사람이 보여주거나 숨기는 모순들인 것 같습니다. 서머싯 몸의 에는 바로 이런 점에 관한 작가의 관찰과 통찰이 보입니다. P. 24 He was probably a worthy member of society, a good husband and father, an honest broker; but there was no reason to waste one's time over him. 그는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고,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이며, 정직한 증권맨이..

오늘의 문장 2023.11.22

부여와 부여 밤 (2023년 11월 20일)

오래전 한 번 가 본 부여는 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작년에 홈마트에서 서부여농협이 생산한 밤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으로 사 들고 온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부여를 가 보지 못한 한 해가 끝나가는 어제 다시 홈마트에서 부여에서 온 밤을 샀습니다. 1킬로그램에 8,9 천원 하던 걸 6,900원에 세일 판매한다니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물망에 든 밤들은 '부여왕밤(특)'이라는 광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부여에서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게가 이상했습니다. 주부 경력이 꽤 길다 보니 웬만한 무게는 맞추는데, 그물망의 밤 무게가 1킬로가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 삼아 부엌의 꼬마 저울에 올려 놓으니 바늘이 850그램과 860그램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정량..

동행 2023.11.20

빗속의 피아노 (2023년 11월 17일)

어젯밤엔 잠자리에 들고도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습니다. 아이로부터 빗속에 '폐기물 수거 대상' 딱지를 붙인 채 버려진 피아노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가 비를 맞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트럭으로 물건을 날라주는 곳을 찾아 네 곳이나 연락했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어쩌면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없어 안 한다고 한 것인지 모릅니다. 피아노를 옮기는 데는 힘과 함께 요령이 필요한데, 전에 요령으로 피아노를 옮기던 분들이 이제 대개 고령이 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요령이 없어 들 수 없을 테니까요. 본 적도 없는 그 피아노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하얀 건반 검은 건반들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음악을 죽이겠구나, 사물에도 마음이 있지 않을까, 피아노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이십 년..

동행 2023.11.17

서머싯 몸의 문장들1: 작가 (2023년 11월 13일)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버릇이 있지만 산책길에 들고 나가는 책은 한 권입니다. 며칠 전까지는 존 스타인벡의 을 들고 나갔고, 이제는 서머싯 몸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를 들고 갑니다. 산책길 동행을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책이 가벼울 것. 둘째, 재미 있을 것. 몇 권의 후보들 중,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는 책을 고르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태어난 지 100년이 넘고 죽은 지 58년이 된 작가의 작품이지만, 위트 있는 문장들을 읽다 보면 지금, 바로 이 시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거겠지요. 11쪽에 나오는 '작가'에 관한 얘기가 특별히 마음에 와닿아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대와..

오늘의 문장 2023.11.13

존 스타인벡의 문장들5: 배움 (2023년 11월 8일)

초등학교 부근 카페에서는 학교에서의 하루를 끝낸 아이들이 학원에 가기 전 잠시 엄마들을 만나 간식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길들여진다지만 요즘 아이들처럼 '시키는' 공부를 오래 해야 한다면 참으로 괴로울 것 같습니다. 엄마들이 시키는 공부는 대개 영어입니다. 아이들은 영어 그림책이나 영어 문제집을 보며 빵을 먹고 주스를 마시지만, 어머니들의 눈은 스마트폰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질문하는 일이 드물고 어쩌다 질문을 해도 그 질문이 대화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어머니들이 바로 답을 말해주거나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야단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라는 걸 접했지만 영어는 지금까지도 제게 즐거움을 주고 생계를 돕는 동무입니다. 그러나 유치원 때부터 영어..

오늘의 문장 2023.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