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569

나는 꽃 도둑 (2023년 6월 4일)

산책길 가로수 아래 꺾인 채 버려진 꽃이 여러 송이입니다. 노란 꽃, 하얀 꽃, 큰 꽃, 작은 꽃... 활짝 핀 얼굴도 점 같은 봉오리도 모두 꽃입니다. 이 꽃들을 꺾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땡볕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 가로수 밑에 이 꽃들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꽃을 꺾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 꽃을 건네받은 누구일까요? 시들고 있는 꽃이 가엾어서 집어들고 왔습니다. 노란 꽃은 목이 길고 하얀 꽃은 목이 짧아 한 꽃병에 꽂을 수 없으니 목 긴 꽃은 조금 깊은 병에 꽂고 짧은 꽃은 작은 술잔에 담습니다. 그래봤자 다 제 손가락 길이입니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봅니다. 꽃들이 소리없이 물을 빨아들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기가 돕니다. 땡볕 아래 말라 죽거나 꽃병의 물을 먹다 죽거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나의 이야기 2023.06.04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눈먼 소년 (2023년 5월 24일)

2011년 4월 9일에 이 블로그에 썼던 글을 우연히 다시 읽었습니다. 예산에서 사과를 키우시던 김광호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선생님이 연세 드시며 사과 농원을 그만두시면서 제가 사과 향기 맡는 일과 선생님과 연락하는 일이 줄었지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주한 미국대사관 도서관장으로 일하신 후 은퇴하셨고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글들 중엔 영어로 된 것이 많았는데, 그때 받은 영어 원문과 제가 축약 번역한 것을 함께 게재한 것입니다.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글, 선생님을 뵈온 것처럼 반가워 여기 다시 옮겨둡니다. 선생님, 안녕하시온지요? 눈 먼 소년 하나가 건물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저는 맹인입니다. 부디 도와주셔요"라고 쓰인 피켓이 있고 발치엔 모자가 놓여 있었..

오늘의 문장 2023.05.24

우린 '사사받지' 않는다 (2023년 5월 23일)

글의 제목 옆 괄호 속에 '5월 23일'이라고 쓰는데 이날이 무슨 날이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날입니다. 양심이 욕심보다 컸던 그는 저세상으로 갔고 그 같지 않은 사람들은 흰머리로 혹은 검게 물들인 머리로 뉴스 안팎을 총총댑니다. 우리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반면교사는 넘쳐도 교사는 드물고 스승은 더욱 드뭅니다.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받음을 뜻하는 '사사(師事)하다'가 '사사받다'로 잘못 쓰이는 일이 흔한 이유도 바로 이런 세태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말 산책 ‘사사’는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다 엄민용 기자 '선생(先生)’은 보통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

오늘의 문장 2023.05.23

너희가 해바라기다! (2023년 5월 13일)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가로수 아래 핀 꽃들을 보며 해바라기다! 아니다! 목청을 높입니다. 노란 꽃이 아니니 해바라기는 아니고 같은 국화목에 속하는 꽃으로 보이지만, 저도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면서도 한마디 거들고 싶은 건 아이들이 꽃만큼 예뻐서입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스마트폰만 보며 걷는데 이 아이들은 찻길 옆 보도에 심긴 나무 아래 옹기종기 핀 작은 꽃들을 본 것입니다. '얘들아, 그 꽃은 해바라기가 아니야. 너희가 바로 해바라기야!' 마음 속으로만 얘기하며 아이들의 앞날을 축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컴컴해도 해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포기하지 마! 꿋꿋하게 자라서 주변을 밝혀줘!'

동행 2023.05.13

밥과 리즈: Bob and Liz (2023년 5월 10일)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제 상관은 로버트 뱅크스 (Robert Banks)박사라는 문정관 (cultural attache)이고 그의 아내는 리즈 (Liz)였습니다. 기자 노릇 15년 후 7년간 칩거(?) 했는데 소위 IMF 사태 (금융위기)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주한 미국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대사관은 정부인데 저는 정부와 여러모로 다른 언론계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은 좋은 직장이라는 대사관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4년 3개월이나 일할 수 있었던 건 뱅크스 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유학을 해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제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고, 기자생활만 한 까닭에 행정에 어두운 제게 행정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아..

동행 2023.05.10

시인의 가난 (2023년 5월 4일)

'가난한 시인'이란 말은 있어도 '부유한 시인'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가 있고 시집이 잘 팔려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개 현실적으로 무능하여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게 사회적 통념입니다. 시인의 가난은 아마도 '시'에 내재하는 즉흥성이나 자발성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시'는 현실적 계산이 없는 마음, 혹은 그런 계산을 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어느 순간 일어나는 '발로'의 기록이거나 그런 마음에 예고 없이 찾아 오는 천둥 번개나 봄비 같은 것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시 쓰는 법도 배우고 가르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시 작법을 배워 쓰는 시보다는 '시는 시인이 쓰는 글이며, 시..

동행 2023.05.04

삶은 헌 신발을 신고... (2023년 4월 24일)

삶은... 무엇일까요?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일까요?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기회'일까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 '시시한 그림일기'에서 만난 이기철 시인은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 가면 더 많은 시와 일러스트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illustpoet&skinType=&skinId=&from=menu&userSelectMenu=true 시 한편 그림 한장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종이에 색연필 ​ ​ ​ ​ 삶은 헌 신발을 신고 늙은 길을 걸어가는 것 입니다 이기철 삶을 미워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자는 것이지요 저 길가..

동행 2023.04.24

딸 (2023년 4월 22일)

제겐 몸으로 낳은 딸이 없지만 마음으로 맺은 딸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는 제 어머니의 딸입니다. 어머니가 처음 만난 딸로서 때로는 시행착오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보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딸'이며 딸 가진 어머니인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딸들'을 바라보는 눈엔 사랑과 안쓰러움이 가득합니다. 김일연 씨의 시집 는 바로 그 어머니이며 딸인 세상의 모든 딸들을 노래합니다. 이 한영대역 시집의 첫 시는 '딸'입니다. 딸 짐 빼고 집 내놓고 용돈 통장 해지하고 내 번호만 찍혀 있는 휴대전화 정지하고 남기신 경로우대증 품고 울고 나니 적막하다

동행 2023.04.22

참으로 술맛이란 (2023년 4월 19일)

술은 이길 수 없는 적과 같은데, 이기지 못할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은데, 그런데도 가끔 술을 마십니다. 체질과 체력 모두 음주 자격 미달이니 '부어라 마셔라'는 꿈도 꾸지 못하고 기껏해야 입술이나 목 입구를 적실 뿐이지만, 뻔뻔한 자들, 용서할 수 없는 자들, 억울한 사람들이 술잔을 들게 합니다. 100년 전 현진건이 에서 주장한 대로 '이 사회란 것'이 술을 권하는 겁니다. 억울하기로 하면 다산 정약용 (1762-1836)만한 이도 드물 텐데... 그는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이 입술만 적셨을까요? 아니면 술맛은 포기하고 한 잔 또 한 잔 기울였을까요?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

오늘의 문장 2023.04.19

울어야 할 시간 (2023년 4월 16일)

4월 한가운데 라일락은 향기롭고 나무마다 연둣빛 새 잎들 아름답지만 오늘은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9년... 아직도 우리는 왜 세월호의 승객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단원고의 수많은 학생들이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지미 스트레인의 영상/노래 'Time 2 Cry (울어야 할 시간)'...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옷깃을 여밉니다. 선생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v5a21bY7og&ab_channel=JimmyStrain

동행 20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