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99

노년일기 104: 고민 (2022년 2월 2일)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런 느낌을 받으면 그 느낌을 얘기할까 말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입이 말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아 아버지를 바꿔드리곤 "아버지, 이 사람은 멀리 하시는 게 좋겠네요"라고 말한 적도 있고, 기자 시절 제 아기를 키워 주시는 이모님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모, 이분에게 돈 빌려 주지 마세요"한 적이 있는가 하면, 녹차 마시는 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초면의 승려에게 "스님, 안경 하나 쓰시지요?" 한 적도 있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하시기에 '그냥' 그 사람은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하시는 중이라며 "허, 너..

나의 이야기 2022.02.02

노년일기 102: 월든 (Walden) (2022년 1월 18일)

生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했던 대학 1학년 때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같은 초월주의 시인들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회의'를 '결심'으로 누르며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결심' 위로 '피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거운 피로를 밀어올리며 중력의 세계에 계속 존재해야 하는가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걸까요? 지난 연말부터 자꾸 소로우의 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모든 책꽂이를 다 뒤져도 원서도 번역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학가에 살지만 서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장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헌 책방에 들러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보다는 책을 직접 만..

나의 이야기 2022.01.18

노년일기 101: 금쪽같은 내 새끼 (2022년 1월 15일)

사과를 먹지만 사과를 모릅니다. 지구에 살지만 지구를 모릅니다.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좋아하지만 마이스키도 첼로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 중에서도 알기 어려운 건 자신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투쟁에 시달린 탓이었다는 걸 훗날에야 알았습니다. 저는 가급적 여럿이 모이는 자리나 시끄러운 곳을 피하는데 어린 시절 좁은 집에서 오 형제가 복대기며 자란 탓이 클 겁니다. 저 자신을 잘 알진 못했지만 제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건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타인과 한 집에서 산다는 건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얹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상황은 의지를 압도합니..

동행 2022.01.15

노년일기 100: 두 세계의 만남 (2022년 1월 9일)

만남 중에 쉬운 만남은 없습니다. 아니, 의미 있는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겠지요. 오늘 저녁 어머님아버님과 만나기 위한 준비도 며칠 전에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뵌 아버님, 한참씩 저희와 동거하신 어머님, 아버님은 룸메의 십대 중반 떠나시고 어머님은 2014년에 떠나셨습니다. 작년에 뵈었으니 꼭 일 년 만입니다. 적어도 9시부터는 두 분께 대접할 음식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사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두 분과 저희 가족이 상 앞에서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일 년 처음 하는 일을 하여 돈을 번 두 분의 손자가 제사 비용을 내주어 오늘 제사상엔 구경만 하고 산 적은 없었던 샤인머스캣도 올라갑니..

나의 이야기 2022.01.09

노년일기 99: 내일은 새날 (2021년 12월 31일)

연말은 늘 우울합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그런데 오늘 새벽 기도를 하다가 문득 웃었습니다. '내일은 새날'이라는 평범한 깨달음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쉬이 지치는 육체와 금세 흐트러지는 정신을 탓하며 그때, 자고 나면 바로 회복되던 시절에 좀 더 열심히 살지 그랬냐고 저를 꾸짖곤 했는데,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아흔에 타계하신 아버지나 백 번째 생신 지나 별세하신 어머님, 올해 아흔 셋이 되시는 어머니처럼 산다면 제게는 아직도 많은 '새날'들이 남아 있습니다. 부스러지는 육체와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태어날 때 지니고 왔으나 살며 잃어 버린 지혜와 현명을 다시 찾으려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그분들만큼 살지 못한다 해도, 그래..

나의 이야기 2021.12.31

노년일기 98: 무지 일기 (2021년 12월 29일)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온 걸까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안다는 말을 버려야 하네 하루도 빼지 않고 살았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삶은 학교가 아니네 지나간 날들이 그렇다면 오는 날들은 어떨까 오 년이 오면 십 년이 오면 무언가 알게 될까 무지가 빙하 같으니 정신은 새벽 버스 꼴 넉넉한 건 오직 겨울 해 얼리는 한숨뿐이네!

나의 이야기 2021.12.29

노년일기 97: 누구나 겪는 일 (2021년 12월 22일)

가끔 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픽 웃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을 혼자 겪는 것처럼 곱씹으며 슬퍼하거나 화 내는 걸 볼 때입니다. 감기부터 암까지 몸과 정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질병들, 시험 낙방, 투자 손해, 텅 빈 지갑, 행인을 넘어뜨리거나 놀래키는 보도블럭, 횡단보도를 침범해 들어온 자동차, 불친절한 식당 주인이나 마트 직원, 어깨에 뽕을 넣은 공무원, 직책이 요구하는 일은 잘못하면서 직책이 부여한 권한 이상을 휘두르는 사람, 아랫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상사, 친구인 척하지만 '친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남보다 나를 모르는 가족, 연애나 결혼 실패, 이별과 사별... 누구나 이런 일을 겪고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얕고 깊은 상처가 자리를 잡아 두고두고 괴롭습니다. 이 모..

나의 이야기 2021.12.22

노년일기 96: 책 읽는 노인 (2021년 12월 9일)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오래 전에 졸업한 학교를 상기시킵니다. 십 대, 이십 대... 몸은 지금보다 나앗겠지만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 날이 드물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준 건 도서관의 친구들, 바로 책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취직이 되던 시절이라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텅 빈 도서관에 앉아 에머슨과 소로우를 읽으면 괴로운 실존과 피로한 현실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동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그런 위로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7퍼센트만이 대학에 간다고 했으니까요.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에 보탰다고 해도 대학에 다닌다는 건 선택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습니..

나의 이야기 2021.12.09

노년일기 95: 아름다운 지우개 (2021년 11월 18일)

산소는 무색, 무취라지만 산 사람은 유색, 유취입니다.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게 삶이니 삶에도 빛깔이 있고 냄새가 있습니다. 어떤 냄새는 코를 막게 하고 어떤 냄새는 숨을 들이쉬게 합니다. 어떤 냄새는 따뜻한 손 같고 어떤 냄새는 매질 같습니다. 담 없는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는 평화를 나릅니다. 제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여러 십년 쌓인 먼지 냄새? 붉고 푸른 감정의 재 냄새?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랑의 냄새? 나무 냄새가 나면 좋겠지만 잡식의 냄새가 나겠지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왜 비만 오면 제 영혼이 제 몸을 끌고 나가는지 비, 아름다운 지우개!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악취를 씻어내는 지우개 같은 사람이 ...

나의 이야기 2021.11.18

노년일기 94: 시부모 흉보기 (2021년 11월 10일)

어제 낮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응급실' 카페에 갔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창가 자리엔 두 여인이 담소 중이고, 왼쪽 방엔 손님 하나가 노트북과 씨름 중이었습니다. 저는 두 여인과 멀리 떨어진, 벽에 면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응급실'에 가는 재미 중 하나는 '라디오 스위스'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대개의 동네 카페에서 들을 수 없는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 라흐마니노프나 쇼팽의 음악이 나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저만치 왼쪽으로 난 통창 밖 풍경을 보면 저절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제도 그렇게 행복했는데... 창가 자리 두 여인의 대화가 때때로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사람..

동행 202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