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104: 고민 (2022년 2월 2일)

divicom 2022. 2. 2. 12:41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런 느낌을 받으면 그 느낌을 얘기할까 말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입이 말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아 아버지를 바꿔드리곤

"아버지, 이 사람은 멀리 하시는 게 좋겠네요"라고 말한 적도 있고,

기자 시절 제 아기를 키워 주시는 이모님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모, 이분에게 돈 빌려 주지 마세요"한 적이 있는가 하면, 

녹차 마시는 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초면의 승려에게

"스님, 안경 하나 쓰시지요?" 한 적도 있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하시기에

'그냥' 그 사람은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하시는 중이라며 "허, 너, 참 용하다" 하셨습니다.

 

이모님은 "그 사람이 돈 빌려달라고 할 걸 어떻게 알았어?

근데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돈 빌려가고 안 갚을 사람 아니야" 하셨습니다.

그때도 생각하기 전에 입이 말했습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이모, 나쁜 사람만 안 갚는 게 아니고 좋은 사람도 돈이 없으면 못 갚아요" 했습니다.

착하신 이모님은 그를 믿고 돈을 빌려 주시고 몇 년 동안 조각돈을 받아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스님이 "왜 안경을 쓰라 하시나요?" 하시기에 "아시는 게 너무 많고 그것이 눈으로

흘러 나오니 도 닦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요"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큰스님이

안경을 쓰라 하셨는데 눈이 좋아 안경을 쓴 적이 없다 보니 불편해서 쓰질 않았는데...

써야겠네요" 하셨습니다. 

 

대학생이던 제게 어머니는 "학교 그만두고 미아리에 가서 멍석을 깔아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느낌'을 느끼는 일도 줄었고 그런 느낌이

들어도 입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설을 맞아 찾아간 어머니댁에서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카 하나가 자신의 배우자 될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사람의 기가 너무 약해서

가능하면 일을 쉬면서 기를 보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게다가 뜬금없이 금 목걸이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느낌을 조카에게 얘기해야 하는가 입니다.

나이 들면서 '묻기 전엔 말하지 말자'는 태도를 견지하고 살았는데...

얘기했다가 괜히 핀잔이나 서운하다는 말을 들으면?

둘 다 똑똑한데다 사랑하는 사이이니 알아서 하지 않을까?

아무리 똑똑해도 젊기 때문에 모를 수 있지 않을까?....

 

고민에 고민이 이어져 룸메이트에게 물으니 가만히 있으라 합니다.

그래 그러자, 가만히 있자 하다가 또 고민합니다. 

아,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민도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