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62: 깻잎이 치매 예방에 좋은 이유 (2020년 11월 23일)

예전에도 깻잎을 좋아했지만 치매 예방에 좋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더 열심히 먹습니다. 날로 먹기도 하고 김치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부침개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어떻게 요리를 하더라도 깻잎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향기를 유지하는 깻잎의 속성이 치매 예방 효과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며칠 전 시장에서 세일 중인 깻잎을 만났습니다.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비닐봉지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 봉지에 핑크색 띠를 두른 깻잎 묶음이 열 개씩 담겨 있기에 한 봉지를 사들고 왔습니다. 찬물에 담가두었다 꺼내니 빛깔은 더 아름답게 짙어지고 향기는 여전했습니다. 한 장 한 장 사이마다 양념을 넣어 깻잎 김치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을 싫어한다는 ..

나의 이야기 2020.11.23

노년일기 61: ‘38점’짜리 바느질 (2020년 11월 14일)

가끔 바느질을 합니다. 가족들의 양말도 꿰매고 바지의 허리나 길이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긴팔 옷을 잘라 짧은 옷으로 만들기도 하고 원피스를 잘라 조끼를 만들기도 하는데 바느질을 하다 보면 언제나 중학교 때로 돌아갑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는 ‘수예’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바느질을 배운 다음 베갯잇에 수를 놓거나 액자나 병풍에 넣을 수예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예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바느질을 할 줄 알면 되지 수놓는 것까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가 불만이 많았습니다. 수예 선생님이 수예 재료를 사라고 하면 하는 수 없이 샀지만, 수업시간에 수놓는 흉내만 낼 뿐 완성한 작품이 드물었고, 한참 소설 읽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라..

나의 이야기 2020.11.14

노년일기 60: ‘노후’는 없다 (2020년 11월 11일)

초록색 상자에 든 ‘빼빼로’를 먹습니다. 11월 11일을 ‘빼빼로 데이’라고 하는가, ‘젓가락 데이’라고 하는가, 혹은 그냥 11월 11일로만 생각하는가.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사람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빼빼로 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엔 젊은이가 많고, ‘젓가락 데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엔 나이가 좀 든 사람이 많을 겁니다. '빼빼로 데이'는 오늘 날짜의 1111이 '빼빼로' 과자를 닮았으니 그 과자를 먹는 날로 하자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고, '젓가락 데이'는 1111이 젓가락을 닮았으니 이 날을 올바른 젓가락질을 홍보하는 날로 하자는 캠페인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그렇지만 두 명칭 모두에 무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무심하겠지요. 법적으로는 만 ..

나의 이야기 2020.11.11

노년일기 59: 어머니의 마지막 김장 (2020년 11월 8일)

어머니는 1930년 이른 봄에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친을 여읜 탓에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노동을 하며 자랐고 스물에 결혼해 다섯 남매를 낳았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딸들이 낳은 아들들이 또 아들딸들을 낳는 동안 어머니도 어머니의 삶도 많이 변했습니다. 늘 한방을 쓸 것 같던 남편은 오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딸들은 꿈속에서 비단옷 입은 아버지를 만났다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꿈속에서 남편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야속하고 서운하면서도 ‘살아생전에 내가 잘못해주어 내 꿈엔 안 오는가‘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어느새 아흔이 넘어 청력이 옛날 같지 않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살만합니다. 그러니 올 겨울 아픈 둘째딸네 김장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창 때는 백 포기, 이백 포기도 했으니 배..

나의 이야기 2020.11.08

노년일기 57: 부음, 갑작스런 (2020년 10월 25일)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존경하는 윤석남 선생님과 차와 담소를 나누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과 평소보다 늦은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 전화에서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누굴까 기대하며 전화를 여니 부음이었습니다. 나흘 전 아파트 동대표회의에서 만나 대화와 미소를 나눴던 아파트 소장님의 부음.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지며 숨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막 70세를 넘긴 건강한 분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가, 왜 그분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가, 의문과 탄식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지나서야, 댁에 화재가 발생했고 소장님이 불을 끄러 들어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갑자기 죽음을 맞은 소장님과, 화재를 당하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소장님까지 잃은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동행 2020.10.25

노년일기 56: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2020년 10월 22일)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실 때 가끔 모시고 가던 식당에 어머니와 둘째 동생과 갔습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배가 고팠습니다. 주요리가 나오기 전에 동생과 함께 푸성귀 반찬을 거의 다 먹어치웠습니다. 마침내 주요리가 나왔습니다. 이미 익혀 나온 주요리는 식지 않게 식탁 가운데 가스 불판에 놓였습니다. 즐겁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과식은 적(敵)인데 깜빡 잊은 것이지요. 동생과 어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통창이라 열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짐까지 챙겨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동생도 저와 비슷한 증세로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했고 구토를 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계속 메스꺼운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물약 소화제 한..

나의 이야기 2020.10.22

노년일기 55: 노인의 눈물 (2020년 10월 2일)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일어나면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머리를 빗은 후 기도 방석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포함해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이 다소나마 줄어들기를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지구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다 눈물 지을 때도 있고, 저보다 앞서 이곳의 주민으로 살다간 사람들의 자유와 평안을 기원하다가 눈물 흘릴 때도 있습니다. 오늘도 눈물이 찾아왔습니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 살아있는 값을 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애쓰는가, 어린 사람은 어린 값을 하느라, 젊은 사람은 젊은 값을 하느라, 늙은 사람은..

나의 이야기 2020.10.02

노년일기 54: ‘오륙남’ (2020년 9월 29일)

내일모레는 추석이고 글피는 ‘노인의 날’입니다. 추석과 ‘노인의 날’엔 황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황혼은 만물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 또한 인생의 황혼녘입니다. 그 시기는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50세부터입니다. 그런데 요즘 인터넷과 SNS에는 5,60대 남자를 뜻하는 ‘오륙남’이라는 신조어가 비아냥조로 오르내립니다. ‘오륙남’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널리 퍼진 말입니다. 그 전에도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는 5, 60대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마스크를 쓰라는 운전기사나 다른 승객의 말을 듣는 대신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5, 60대 남성..

동행 2020.09.29

노년일기 53: 오래된 노트의 질문 (2020년 9월 22일)

오래 전 두어 쪽 쓰고 두었던 작은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하얗던 종이가 가장자리부터 노르께합니다. 시간의 빛깔은 노리끼리한 걸까요? 제 머리에서 여러 십 년 자란 머리칼들은 소금과 후추를 섞은 빛깔입니다. 시간은 이런 식의 회색일까요? 하늘을 이고 선 은행나무의 잎들은 초록록합니다. 시간은 초록빛일까요? 시간은 이런 빛이다,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야 할까요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아야 할까요? 그렇게 오래 살고 나면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나면 마침내 시간은 이런 빛이다,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의 이야기 2020.09.22

노년일기 52: 아버지, 그리고 덴마크 무궁화 (2020년 9월 19일)

5월 17일 혜은, 혜선 자매로부터 선물 받은 덴마크 무궁화가 어제 새 꽃을 두 송이나 환하게 피웠습니다. 무궁화와 제가 만난 지 꼭 4개월. 무궁화가 이 등불 같은 꽃들로 우리의 우정을 축하하는 걸까요? 처음 올 때는 꽃을 달고 왔는데 한동안은 잎 늘리기에만 전념한 듯 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촛불 같은 봉오리가 맺히기에 마침내 잎의 시간이 끝나고 꽃의 시간이 시작되는가 했는데 그 촛불에 불이 붙어 세상이 환해지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을 흔들어대는 속도라는 것도 꽃에겐 범접하지 못하나 봅니다. 내일은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신 지 만 5년이 되는 날입니다. 가장 오랜 스승이며 친구인 아버지를 뵙지 못한 지 5년... 아버지의 부재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저와 주변을 비췄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0.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