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85: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2021년 7월 30일)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더위도 추위도 담아두지 않고 비와 바람도 다만 흐르게 하는 까치집처럼 살려 했는데 주름 늘어가는 몸집에 더위가 들어앉아 주인 노릇을 하니 사지는 절인 배추꼴이 되고 정신은 젖은 손수건처럼 제 할 일을 못하여 에고 칠월은 낭비로구나 한 뼘도 자라지 못하고 한 낱도 영글지 못했구나 탄식 중에 화분 사이를 거닐다 깜짝! 오월 초에 피었던 재스민 활짝 핀 보라 여섯 송이 음전한 봉오리 하나 처음 겪는 더위는 마찬가진데 내겐 낭비인 칠월이 재스민에겐 부활이로구나 나의 각성은 늘 부끄러움이구나

나의 이야기 2021.07.30

노년일기 84: 노년의 적들 (2021년 7월 19일)

아흔둘 어머니는 그대로 스승입니다. 칭찬은 박하고 비판은 후하던 어머니의 성격은 여전하시지만 그때 '엄만 왜 저럴까?' 하며 속상해하던 저는 이제 저 부분은 유전자, 저 부분은 자신감, 저 부분은 열등감의 소산이구나, 분석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에 잠시 불쾌할 때는 있지만 오래가는 상처를 받는 일은 드뭅니다. 그런 말은 어머니가 극복하지 못한 문제를 드러낼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머니의 문제는 늘 제게 질문을 던집니다. 어머니의 문제가 저것이라면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저런 것이 어머니의 성숙을 방해한다면 나의 성숙을 방해하는 오래된 적들은 무엇일까... 그러니 어머니가 무엇을 하든 어머니는 제 스승인 거지요. 요즘 어머니가 가장 많이 일깨워주시는 건 외로움입니다. 저는 홀로 있는 ..

나의 이야기 2021.07.19

노년일기 83: 가난을 기록하는 일 (2021년 7월 10일)

'적당한 가난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생각하는 저는 블로그나 책에 저의 '가난'을 기록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의 '가난'은 집을 소유한 자의 가난이니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배부른 자의 고민입니다. 저의 가난은 공과금이나 관리비를 낼 돈이 통장에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낼 때 내고 싶은 만큼에서 조금 덜어내야만 하는 가난입니다. 가난 때문에 맛있지만 비싼 커피를 절제한 적도 많았지만 그런 얘기를 이 블로그에 쓴 후로는 마음껏 마시고 있습니다. 수양딸이 그 커피를 파는 카페에 거금을 선결제해주는 덕택입니다. 힘들게 번 돈으로 커피를 사주는 수양딸에게 늘 미안과 감사를 느끼며 가난을 기록하지 말아야겠다..

나의 이야기 2021.07.10

노년일기 82: 쌀 (2021년 7월 7일)

어제 저녁밥을 끝으로 쌀이 똑 떨어졌습니다. 하루에 한끼는 밥을 먹으니 오늘 중에 쌀을 사야 합니다. 식구가 적어 많이 산다고 해도 10킬로그램 한 봉입니다. 우편함에 새로 생긴 마트의 홍보 전단지가 있기에 보니 10kg짜리 쌀을 시중보다 훨씬 싸게 판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 나는 역시 운이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9시에 마트 영업이 시작된다기에 9시 10분쯤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서 마트까지는 차로 5분 거리입니다. 얼른 쌀을 사다 놓고 할 일을 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마트에 가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들어가긴 했는데 상품대 사이마다 사람이 가득하여 정신이 자꾸 아득해졌습니다. 싼 것도 좋지만 쓰러질 것 같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차장이 없어 주변을..

나의 이야기 2021.07.07

노년일기 81: 산 (2021년 7월 1일)

7월의 첫날임을 햇살이 알려줍니다. 아침 일곱 시 조금 지난 시각의 햇살이 바늘처럼 따갑습니다. 그렇지만 7월 햇살도 산자락 나무들의 초록잎 지붕을 뚫진 못합니다. 초록 그늘 속에서 심호흡을 합니다. 산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갑니다. 이태준의 에서 본 한시가 떠오릅니다.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하네 이 산중에 가득한 것은 구름뿐이니 안개 구름 속에 어디를 찾으랴 " --이태준, 무서록, 범우사 엔 쓰여 있지 않지만 이 시는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779~843)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은자를 못 만나고)' 라는 제목의 시라고 합니다. 원문은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원문대로 번역하면 셋째 줄은 ..

나의 이야기 2021.07.01

노년일기 80: 김흥숙 전화번호 (2021년 6월 23일)

자고 나니 유명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런 경험은 해 보지 못했고 자고 나니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껏 011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사용했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이 '혹시' 하고 011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가 연결되어 기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제 전화번호의 '자동 변경'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으니 제일 먼저 염려가 됩니다. 누군가 오랜만에 전화했다가 당황하지나 않을지... 연말까지는 전화번호 변경 안내를 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누군가 당황하여 인터넷에서 제 번호를 찾을까봐 이 글의 제목에 제 이름을 넣었습니다. 제 번호는 앞자리만 010으로 바뀌었을 뿐 뒷자리는 그대로입니다. 상황, 환경, 조건 등의 변화는 대개 인간 관계..

나의 이야기 2021.06.23

노년 일기 79: 노인의 기도 2 (2021년 6월 4일)

살아오며 잘못한 일들을 기억하며 참회할 때까지만 살게 하시고 평생 잘못한 일 없다고 생각하기 전에 죽게 하소서 준 것은 큰 것도 기억 못하고 받은 것은 작은 것도 기억할 때까지만 살게 하시고 관계가 어그러진 건 모두 상대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죽게 하소서 살아있는 내내 불편하게 하시고 편해지는 순간 괴사가 시작됨을 알게 하소서 남아있는 친구가 있음을 감사하게 하시고 외로움만이 침묵으로, 침묵만이 진리로 가는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나의 이야기 2021.06.04

노년일기 78: 반려를 잃는다는 것 (2021년 5월 25일)

어제 세상을 뿌옇게 채웠던 먼지를 오늘 비가 지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는 말과, 끝이 끝이 아니다라는 말이 동시에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젊어선 몰랐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무심코 깨달을 땐 노인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또 노년에 들어서 겪은 무수한 일들 덕에 이런 것을 알게 된 걸까, 경험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조차 우리를 키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태어남과 죽음, 젊음과 늙음, 좋은 것과 싫은 것, 얻음과 잃음, 기쁨과 슬픔... 죽는 순간까지 경험은 계속됩니다. 현명한 사람에게 경험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을 뜻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경험은 대개 제자리걸음과..

나의 이야기 2021.05.25

노년일기 75: 하루 (2021년 3월 25일)

어젠 어머니의 92번 째 생신이었습니다. 아흔두 번째 생일을 맞는 느낌을 여쭈니 "아주 좋아, 만날 생일이면 좋겠어"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제 나이 때쯤 달게 입으셨던 코트를 입으니 쑥스러웠습니다. 늘 무채색인 제 옷과 달리 어머니의 옷 중엔 화려한 옷이 많습니다. 파스타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딸들과 며느리들이 파스타집에 모였습니다. 식사와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의료진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엔 아픈 동생과 연세암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엔 식당보다 사람이 많았습니다. 거대한 고통의 공간에서 고통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병원 건너편 정류장에서 601번 버스를 탔습니다. 처음 타보는 번호의 버스였지만 승객들은 낯..

나의 이야기 2021.03.25

노년일기 74: '꼰대' (2021년 3월 23일)

'꼰대'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꼰대'의 뜻을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보면 그가 꼰대인지 어떤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꼰대'의 정의는" '늙은이'를 이르는 은어,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입니다. '꼰대'가 이 사전적 정의만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꼰대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픈사전에는 '젊은 꼰대'와 '청바지를 입은 꼰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젊은 꼰대'는 권위적인 젊은 사람, '청바지를 입은 꼰대'는 낡고 후진적인 조직에서 무늬로만 혁신을 좇는 직장 상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전에 수록되는 것은 아니고, 수록된 단어들의 경우에도 모든 의미가 기술돼 있진 않습니다. '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꼰대'는 대개..

동행 2021.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