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40: 불행을 광고하라(2020년 7월 18일)

어제는 제헌절, 뜨거운 햇빛 아래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오래된 질문을 소환했습니다. 법은 무엇인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자 붙은 직업인, 특히 법 집행에 종사하는 검사, 판사, 변호사는 결혼상대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면 ‘법은 권력의 시녀’라 그렇다며 웃으셨지요. 짧지 않은 시간 지구인으로 살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볼 때면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선행은 법과 상관없이 일어나며 악행은 법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믿고, 약은 사람은 이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법은 종교를 닮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법과 무관한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습니다. 제게 이 영악무도한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어린 자녀가 있다면 저는 결..

나의 이야기 2020.07.18

노년일기 39: 소나무여, 소나무여 (2020년 7월 7일)

아침에 창문을 열면 뒷산의 산내음이 흘러들고 거의 온종일 새소리가 들립니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뒷산 덕에 시간의 흐름과 시간이 하는 일을 시시각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집이 산기슭에 기대앉은 모양새이니 집안에 앉아 산의 품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기온도 지하철역이 있는 곳보다 2~3도 낮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아파트는 한 평당 가격이 매우 낮습니다. 고층이 아니고, 100세대 조금 넘는데 평수가 다양해 가격 형성이 어렵다고 합니다. 주민들 중에 아파트 값이 왜 이렇게 싸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보다 최근에 이사 온 사람들의 불평이 높습니다. 집 값이 싸서 온 사람들이 오자마자 싸다고 불평하니 실소가 나옵니다. 조경을 하면 보기에도 좋고 아파트..

나의 이야기 2020.07.07

노년일기 38: 이별은 어려워라 (2020년 7월 4일)

마침내 2G폰과 이별했습니다. 오래된 관계가 끝날 때에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어젠 하루 꼬박 누워서 지냈습니다.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한 건 2000년 어느 날입니다. 그때는 그게 2G폰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휴대전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회사 업무에 필요하니 소지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휴대전화가 싫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2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휴대전화가 ‘진화’되며 3G폰, LTE, 5G폰 등으로 바꾸라는 회유와 종용이 이어졌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이 블로그에 쓴 적이 있지만, 새로 나오는 전화기들이 너무 크고 비싼데다가 성능도 너무 많아 싫었습니다. 제게..

나의 이야기 2020.07.04

노년일기 37: 빗물 젖은 벤치(2020년 7월 1일)

어린 시절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초록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생각한 후 답합니다. 초록 나뭇잎과 회색 하늘 중 하나를 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회색 하늘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아침 일찍 산책에 나섰습니다. 어젯밤 내린 비가 먼지를 씻어내고 열기를 식혀준 덕에, 세상이 선명하고 공기는 선선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걷다가 사람 없는 길에서 마스크를 벗으니 풀, 나무, 하천...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의 향기가 왈칵 포옹처럼 온몸을 감쌌습니다. 산책로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도 아마 이 향기 때문이겠지요. 마스크는 유리문처럼 향기를 막으니까요. 작은 얼굴에 더 작은 마스크를 쓴 어린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 향기를 ..

나의 이야기 2020.07.01

노년일기 36: 나이야, 미안해 (2020년 6월 27일)

엊그제 밤새 비 내리고 난 새벽 회색 하늘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어서 저 하늘 아래를 걷고 싶었습니다. 손바닥 노트, 볼펜, 비상금이 든 카드 지갑 하나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 디스크엔 ‘빨리 걷기’가 명약이라기에 아침 일찍 홍제천변을 걷곤 했는데 그날은 하늘에 이끌려 더 일찍 나선 겁니다. 비 그친 세상에선 숲의 향기가 났습니다. 낡은 운동화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습니다. 성큼성큼 신나게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작은 물고기의 비늘 같은 빗방울이 날렸지만 저는 가뭄 끝에 비를 만난 풀처럼 행복했습니다. 신나게 걸은 후엔 천변 바로 윗길에 있는 편의점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비는 자꾸 굵어지고 바람도 차가워졌지만, 진초록 차양 아래서 비바람 향기를 맡으며 마..

나의 이야기 2020.06.27

노년 일기 34: 작은 병, 작은 다짐 (2020년 6월 20일)

산책을 하는데 무언가가 오른쪽 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먼지인지 날벌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심하게 아프지 않아 가던 길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후 죽염 안약으로 소독하고 생수로 씻어내니 괜찮은 듯했습니다. 마침 끝내야 할 번역이 있어 몇 시간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오른쪽 눈이 자꾸 거북해진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무시하고 번역을 끝냈습니다. 번역본을 보내고 나니 눈의 거북함이 괴로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래 눈꺼풀 안쪽이 벌겋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화농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부위든 화농이 되어가는 동안은 괴롭지만 막상 화농이 되어 고름이 차면 고통이 줄어듭니다. 팔이나 다리처럼 제 손으로 고름을 제거할 수 있는 곳이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눈은 눈이니 가는 게 좋겠지요. 평생..

나의 이야기 2020.06.20

노년일기 33: 코로나바이러스와 스타벅스 (2020년 6월 14일)

어제 오후 연희동 스타벅스에 친구를 만나려고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일, 이층 할 것 없이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여러 달째 싸우고 있는 정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가 2미터는 되어야 한다고, 정 안되면 1미터라도 떨어져 앉으라고 호소하지만, 스타벅스의 손님들 사이엔 거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이부터 중년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겨울 대중목욕탕처럼 붐비는 것을 보고 앉지 않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어린이와 60세 이하 연령층의 사망률이 낮다는 통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찾아오는 불행이 나에겐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은사망상(恩賜妄想) 때문일까요? 사망률이 아무리 낮아도 죽는 사람은 하나뿐인 생명을 잃는 것이고 ‘은사’에 대한 믿음은 말 그대로 ‘망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동행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