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노년일기 174

노년일기 51: 요양병원과 존엄한 죽음 (2020년 9월 15일)

골목길에 떨어진 푸른 감들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매달린 채 주홍으로 물든다 해도 감의 미래는 뻔합니다.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거나 꼬빌꼬빌 마르도록 남겨졌다가 까치밥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길에 떨어져 구르는 덜 익은 감을 안타까워하는 건, 젊은이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발로일 겁니다. 그러나 바로 관에 들어가 누워도 놀랍지 않을 모습의 노인이 죽을 듯 죽을 듯 죽지 않아 천덕꾸러기가 되는 걸 보면 때 이른 죽음만이 인간다운 죽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다운 죽음은 무엇보다 합당한 슬픔과 애달픔을 자아내는 죽음이니까요. 며칠 전 한국방송(KBS)의 ‘시사기획, 창’에서 요양병원의 실태를 보았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요양병원의 환자는 곧 ..

동행 2020.09.15

노년일기 50: 왈가왈부 (2020년 9월 6일)

일요일에 종일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보고 어머니와 동생을 하루 당겨 만났습니다. 사소한 음식과 얘기를 나누며 하루 치 안녕을 확인한 건 좋았는데, 그만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여러 십년 쌓였는데 아직도 괜한 말을 하고 그것을 후회하다니... 혼자 있어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다짐 다짐했습니다.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하는 옛 시조의 구절은 여전히 유효한데 저도 시나브로 말 많은 시절에 젖었었나 봅니다. 21세기가 어떤 시대인지 한 줄로 정리하는 일은 21세기가 끝나갈 때쯤에야 가능하겠지만 한국의 2020년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왈가왈부’입니다. 둘러보면, 입 가진 사람 모두가 떠들고 있는 것 ..

나의 이야기 2020.09.06

노년일기 49: 어젯밤 달 놀이 (2020년 9월 1일)

간밤엔 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9월 냄새에 눈을 뜨니, 어머나... 동숙생의 얼굴에 달이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일어나 서성이다가 잠자리로 돌아가니 저 누울 자리에 달이 먼저 누워 있었습니다. 호오...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 ‘달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누웠습니다. 달은 천연덕스럽게 제 다리 위에 앉았습니다. 달이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이번엔 제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달보다 가볍고 부드러운 손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달만큼 환하되 눈부시지 않은 빛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달처럼 짓궂되 깊은 위로를 주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오래 전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태양 같은 사람이 되어 주변을 비추라‘ 하셨..

나의 이야기 2020.09.01

노년일기 48: 땀과 눈물 (2020년 8월 30일)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8월이 끝나갑니다. 무지와 은사망상으로 무장한 채 세상을 누비는 하룻강아지들로 인해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꼴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분연히 나서서 어리석음을 꾸짖는 백성의 스승 한 분이 없으니, 그 결핍이 너무나 아픕니다. 아니 어쩌면 스승은 여러 분이되 그분들 모두 ‘난세엔 나서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나, ‘은거부하구隱居復何求 무언도심장无言道心長’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려는가? 말없는 가운데 도심이 자라네) 하는 주희의 시구를 실천하고 계신 것인지 모릅니다. 스승들이 그러하실 때 저 같은 질인이 할 일은 그저 제 자신을 들여다보며 뒷걸음질 치지나 않게 경계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은 나아감과 뒷걸음질을 반복하지만 몸은 나이 덕에 나아가고 있음을 땀 덕에 느낍니다. 아무리..

나의 이야기 2020.08.30

노년일기 47: 오빠의 길, 장손의 길 (2020년 8월 19일)

저는 동생은 셋이지만 오빠는 하나뿐입니다. 아들이 대접받고 종손은 더 대접받던 시절 종손으로 태어난 오빠는 부모님의 극진한 정성 속에 자랐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 지도를 보고 그린 지도는 원화를 능가했고, 삼국지의 본문 밖 여백에 그려넣은 만화는 본문보다 재미있어 동생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음악을 두루 좋아하고 노래도 잘했습니다. 이라는 노래책을 펼쳐놓고 바로 아래 동생인 저와 노래를 부르면 오빠는 늘 화음을 담당했는데, 처음 부르는 노래에도 화음을 참 잘 넣었습니다. 마음속으론 미술이나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오빠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팝송 모임에 나가고 월간 에 칼럼을 연재하여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가 되었습니다. 오..

동행 2020.08.19

노년일기 46: 사이좋은 부부 (2020년 8월 11일)

구순의 어머니와 점심을 먹는 건 주례행사입니다. 너무 덥거나 폭우가 내려 한 주쯤 거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 전부터 ‘집콕’을 좋아하는 저와 달리 어머니는 ‘매일 나가야 하는’ 분이니까요. 요즘 어머니와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사이좋은 부부를 여럿 보았습니다. 대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한 아이들을 대동한 40대 부부였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삼계탕 집에서 본 부부에겐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몇 인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계탕과 전기구이통닭으로 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 옆에는 빈 맥주병 세 개가 있는데 제가 도착한 후 바로 한 병을 더 주문했습니다. 큰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느라 바쁘고 작은 아이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꾸 소리를 질렀지만 아버지는 맥..

동행 2020.08.11

노년일기 44: 겉으로 보면 (2020년 8월 2일)

젖은 여름은 쨍쨍 마른 여름보다 덜 덥지만 수많은 걱정을 자아냅니다. 가장 괴로운 건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일 겁니다. 눅눅한 방에서 외로이 고통과 싸우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우울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도 걱정이고, 지각 출현한 매미들이 폭우로 인해 편히 울 곳을 찾지 못할 테니 마음이 아픕니다. 물난리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저만치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그저 생활을 마비시키고 가재도구를 쓸어가 버리는 재난으로 보이겠지만, 물난리는 훨씬 중요한 삶의 기록들을 지웁니다. 삶에 깃든 불행 중엔 물난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거의 평생 계속되는 불행도 있습니다. ..

나의 이야기 2020.08.02

노년일기 43: 빗물, 사라지는 (2020년 7월 29일)

새벽 두 시 거울과 욕조가 있는 방에서 누군가 부릅니다 낡은 잠옷을 입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빠안히 이편을 바라봅니다 여자는 잠옷보다 낡았습니다 누구신데 이 시각에 잠도 안 자고 어두운 거울 속에서 부르시나요? 내가 웃으니 낡은 입이 웃습니다 우린 전생 어느 구비쯤 친구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부자리는 그이의 미소처럼 낯익은데 누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이의 눈엔 왜 빗물이 고였을까요? 눈을 감으니 그이도 나도 빗물도... 모두 사라집니다

나의 이야기 2020.07.29

노년일기 42: 고전음악의 힘 (2020년 7월 23일)

귀가 들리는 사람에게 세상은 소리의 세계입니다. 빗소리와 새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있는가 하면 거칠고 큰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소음도 있습니다. 대개 도시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적고 그 소리마저 소음이 삼켜 버리는 일이 흔합니다. 얼마 전부터 귀가 자꾸 아프더니 마침내 며칠 전 소음에 지친 두 귀가 속삭였습니다. ‘제발 우리 몸의 더께를 씻어내 주오.’ 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가 듣기를 포기할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오페라 아리아들을 들었습니다.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 ‘Una Furtiva Lagrima(남 몰래 흐르는 눈물)’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 귀가 행복해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은 소프라노 송..

나의 이야기 2020.07.23

노년일기 41: 매미 같은 사람, 물고기 같은 사람 (2020년 7월 21일)

7월이 깊어가는데 매미가 울지 않는다고 끌탕하는 제 목소리를 매미들이 들었나 봅니다. 창문에 서서 외출하는 가족을 배웅하는데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어디쯤에서 매미가 웁니다. 야호! 시계를 보니 1014. 제게만 의미 있는 숫자가 탄생합니다. 20207211014. 세계에는 1500여 종의 매미가 있고 그 중 15종쯤이 한국에 사는데, 한국의 매미들은 대개 1년에서 5년까지 애벌레로 산 후 날개 달린 성충이 되어 한 달 안팎을 산다고 합니다. 긴 준비기간을 보낸 후 지상에 나와 매앰 맴 쓰르르 공기를 흔드는 매미들은 어설픈 공연을 싫어하는 완벽주의자 뮤지션 같습니다. 그래서 옛 유학자들이 매미는 다섯 가지 덕을 갖추었다며 칭송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무위키의 매미 항목에 보면, “머리에 홈처럼 파인..

나의 이야기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