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844

아, 최재형! (2021년 6월 30일)

유월의 끝에 서서 지나간 시간과 그 시간 속 사람들과 사건들을 돌이켜 보니 안타까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타까운 건 감사원장이던 최재형 (崔在亨) 씨가 대통령을 꿈꾸며 감사원장직에서 사직한 겁니다. 그의 이름은 국문뿐만 아니라 한자 표기까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함자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감사원장 직을 내려놓다니... 그는 최재형 선생과는 이름만 같은 몽상가인가 봅니다.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바치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도우신 최재형 선생님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 그분의 희생은 우리의 부끄러움으로 남았는데, 전 감사원장 최재형 씨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이름..

오늘의 문장 2021.06.30

어제 읽은 시: 도연명의 귀거래사 (2021년 6월 28일)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껏 스스로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부렸으니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홀로 슬퍼하여 서러워하는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이미 깨달았으니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일은 바르게 할 수 있음도 알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 그리 멀지 않으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잘못된 지난 일들 이제부터 바르게 하리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고..

오늘의 문장 2021.06.28

오늘 읽은 시: 의자와 참외 (2021년 6월 19일)

지난 며칠 사소한 글자들을 다루느라 정작 시는 읽지 못했습니다. 시를 읽지 못한 날들이 이어지면 바닷물을 마신 사람처럼 목이 마릅니다. 목마름 때문일까요? 허만하 시인의 를 집어듭니다. 의자와 참외 마지막 교가처럼 비어 있는 방에 의자가 들어온다. 대합 실 지루한 시간같이 의자 위에 다시 의자가 얹힌다. 풀잎같 이 엷은 소학생 엉덩이 마지막 무게를 받치던 의자가 모로 누운 다른 의자의 무관심 위에 얹힌다. 쌓인 의자는 교실 벽 에 기대어 벌써 위험하다. 출격을 앞둔 병사들처럼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 조그마한 의자들. 폐교 하루 전의 교실보다 쌓인 의자가 고요한 것은 균형의 목표가 붕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 격렬한 소모를 예감할 뿐 어디에 실려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을 잃어버린 빈 학교..

오늘의 문장 2021.06.19

익숙함이라는 적 (2021년 6월 16일)

거리가 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지켜지는 예의가 낯익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흔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을 할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하지만 익숙한 일을 할 때는 건성으로 하다가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 관계, 환경...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조심하지 않아 사고가 나고 뒷걸음질 치기 쉽습니다. 2021년 여름은 제가 살아온 여러 해 중에 가장 편하고 편리한 해,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무례하고 시끄럽고 건성으로 가득한 해. 그래서 아래 글이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익숙함을 경계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가 오랜 지인인 상득용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축하하는 이유가 이상하다. 상득용이 말에서 떨어진 일을 축하..

오늘의 문장 2021.06.16

달빛에 잠이 깨어 (2021년 5월 28일)

밤에 자꾸 잠이 깨어 괴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새벽에 깨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면 잠자려 애쓰는 대신 일어납니다. 시간을 덤으로 받은 기분으로. 그런데 어제 법정스님의 글을 읽다가 스님도 '자다가 몇 차례씩' 깨셨었다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기침하느라 잠에서 깨어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님은 그럴 때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한낮의 좌정坐定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비춰주고 싶다." -- 법정, , 샘터

오늘의 문장 2021.05.28

늙은 아내가 늙은 남편에게 (2021년 4월 28일)

한 늙은 아내가 자신의 마흔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늙은 남편에게 시 한 조각을 보냈다지요. 그 시는 19세기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Christina Rossetti: 1830-1894)의 'The Convent Threshold (수녀원 문턱)'의 마지막 연이었다지요. 결혼기념일에 하필 수녀원 문턱 얘기라니? 세 번이나 결혼 문턱까지 갔으나 결국 혼자 살다 간 시인의 시라니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요. 게다가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사랑하는 이여 내가 죽거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오'로 시작하는 로맨틱한 시 'Song (노래)'을 쓴 시인이니까요. "If now you saw me you would say: Where is the face I use..

오늘의 문장 2021.04.28

태어나는 게 행운이라고? (2021년 4월 23일)

창밖의 재스민꽃이 시들고 있습니다. 보라로 피었던 꽃이 하양이 되어도 향기는 변함없어 집안은 절간이었습니다. 시드는 꽃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시들다 말라 흙빛으로 떨어지면 나무는 꽃을 피운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푸른 잎만으로 남은 한 해를 버티겠지요. 다시 봄이 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보라꽃을 등처럼 거울처럼 내걸고 밤낮 흔들리는 마음을 비춰보라 할 겁니다. 만물 중에 사유를 부추기지 않는 것은 없지만 꽃처럼 태연하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도 드뭅니다. 죽음과 삶, 피움과 시듦, 종말과 순환, 반성, 약속... 재스민 향기를 맡다보니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1819-1992)의 시 '나의 노래 (Song of Myself)'가 떠오릅니다. '나의 노래'는 52편으로 쓰여진 시..

오늘의 문장 2021.04.23

사랑, 그리고 혁명 (2021년 4월 18일)

내일은 4.19혁명 기념일. 미얀마사태를 보며 1960년 4월 한국을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꿈이자 목표였던 그때... 우리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을까요? 지금 우리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오랜만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자서전 를 펼치니, 평생 자신의 '상(喪)'을 치렀다던 프랑스 철학자의 고통이 훅 들어옵니다. 전쟁을 겪고 포로가 되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프랑스 사상계와 정계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 알튀세르가 지금 지속되고 있는 '미래'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요? 그가 겪고 생각했던 무수한 일들을 기록한 자서전에서 하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쓴 부분이 눈에 들어온 건 무슨 연유일까요? 바로 어제 제 수양딸이 맛있고 비싼 커피를 파는 집..

오늘의 문장 2021.04.18

수선화, 그리고 외로움 (2021년 3월 11일)

미세먼지 가득한 거리에서도 꽃들은 별처럼 빛납니다. 갖가지 색깔의 꽃들 중에도 목이 길고 노란 수선화가 유독 눈길을 끕니다. 꽃말은 '자기애'.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외롭겠지요. 수선화를 보면 영국의 낭만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시 '나는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았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시의 4연 중에서 첫 연, 그 중에서도 첫 문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삶도 죽음도 구름 같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

오늘의 문장 202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