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862

심장을 씻고 싶어 (2021년 1월 14일)

어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고 말을 하고 눈 녹은 길을 걷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았습니다.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려 하는 건 가끔 있는 일입니다. 한의사이신 황 선생님은 제 심장이 '태업'을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심장에 녹이 슬었거나 때가 낀 거라고 생각합니다. 볼 필요가 없는 것들을 보고 들을 필요가 없는 소리를 듣고 갈 필요가 없는 곳들을 다니며 마음 쓸 필요가 없는 일들에 마음을 쓰는 바람에 녹이 슬고 때가 낀 것이지요. 가슴에 문이 있다면 그 문을 열고 서랍 속 물건을 꺼내듯 심장을 꺼내어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싶습니다. 언제였던가, 다이 호우잉 (戴厚英)의 소설 를 보며 깊이 감동하고 아파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이 호우잉은 그새 ..

오늘의 문장 2021.01.14

겨울나무와 딜런 토마스 (2020년 12월 22일)

겨울이 깊어지며 대부분의 식물들은 가지와 마른 잎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저 죽은 듯 보이는 갈색 가지 속으로 푸른 피가 흐르고 있을 겁니다. 봄에 맞춰 꽃을 피우려는 뜨거운 결의가 숨죽인 채 푸른 피를 위로 몰아댈 겁니다. 그러니 앙상한 겨울나무는 오히려 보는 이의 피를 덥히고 무성한 여름나무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겠지요. 사람의 시간도 식물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이 살아갈 가을과 겨울 같은 나날이 안쓰럽지만, 주름투성이 얼굴들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으니 담담합니다. 1914년 웨일즈에서 태어나 1953년에 죽은 딜런 토마스 (Dylan Marlais Thomas)는 겨우 39년을 살았지만 알아야 할 것을 거의 다 알았던 것 같습니다. 대개의 천재들처럼. 아래에 그의 시 ..

오늘의 문장 2020.12.22

수능, 그리고 엄마들의 문제점 (2020년 12월 3일)

오늘 전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실시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대학진학률이 높은 나라인 만큼 수능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21세기의 대학은 20세기의 대학과 다릅니다. 20세기에는 대학 교육이 곧 사회에서의 성취, 즉 교양, 취업, 사회적 인정 등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무교양자와 실업자가 차고 넘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대학을 나온 사람 못지않은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대학 졸업자보다 큰 성취를 이루는 일도 많습니다. 어쩌면 지금 대학에 가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지 모릅니다.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들, 즉 20세기 사람들의 두려움이지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알려 하지 않고 걱정만 합니다. 부모와..

오늘의 문장 2020.12.03

작은 노트 속의 단테 (2020년 11월 20일)

작은 노트에 쓰인 단테의 신곡 (The Divine Comedy), 지난 10월 3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기억이 어럼풋합니다. 겨우 20일 전인데... 정신차리자, 지혜로워지기 전에 늙지 말자 다짐합니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의 54쪽과 55족에 있는 문장들입니다. 54쪽 One has to fear only the things which have The power of hurting others; for the rest, They do not matter, they are not to be feared.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남들에게 상처줄 수 있는 것들, 그 나머지는 상관없네,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 55쪽 Why do you let such cowardice sleep..

오늘의 문장 2020.11.20

에스페란토, 그리고 한글 (2020년 10월 27일)

아주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접하고 그것을 쓴 사람에게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그런 감사를 느꼈습니다. 아래의 글 때문입니다. 저는 을 매우 좋아했으나 작가 홍명희의 호 '벽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서의동 논설위원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여적]‘평화어’ 한글 서의동 논설위원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는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의 작가 홍명희는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인’이라는 뜻을 담은 ‘벽초(碧初)’를 호로 했다. 청록색은 에스페란토의 상징색이다. 벽초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지면에 고정란을 만들어 논객들의 글을 에스페란토로 실었다. 1920년 창간된 문학동인지 ‘폐허’ 표지에는 한자 ‘廢墟’와 에스페란토 ‘La Ruino’가 나란히 쓰였다..

오늘의 문장 2020.10.27

칼 폴라니의 월급 사용법(2020년 10월 21일)

거의 매일 밥벌이 현장에서 과로로,혹은 과로로 인한 절망으로 야기된 죽음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이고 인류학자이며 철학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1886년에 태어나 1964년 캐나다에서 숨진 폴라니가 1944년에 세계에 선물한 죽비 을 소환하며,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처참하게 부정해버리는 시장 자본주의의 더욱 포괄적인 인간 파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https://www.ecommons.or.kr/series/Review/post/27 인용) 오늘 경향신문에도 이중근 논설실장이 폴라니를 소환한 글이 실..

오늘의 문장 2020.10.21

기형도의 '10월' (2020년 10월 8일)

10월이 오면 생각 나는 시가 두 편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월'과,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10월'입니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시적(詩的)인 10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서 발견한 기형도 시인의 시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10월 - 기형도 illustpoet ・ 2019. 10. 10. 20:18 URL 복사 이웃추가 종이에 연필 ​ ​ ​ ​ ​ ​ ​ ​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오늘의 문장 2020.10.08

'아멘!' 그리고 '아기 폐하' (2020년 9월 7일)

요즘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일부 교회'들을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목사들 때문이 아니고 그 목사들을 신봉하는 신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생각...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참 잘 써주었기에 감사하며 아래에 옮겨둡니다. [신형철의 뉘앙스]‘아기 폐하’의 위험한 운전 신형철 문학평론가 일부 교회가 성경적 근거도 없이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反)정부’를 실천하려는 것도 헌금 수납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목사님들에게 거울이 필요해서는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두 배 더 크게 비춰주는 여자라는 거울 덕분에 최악의 순간에도 자기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냉소했다. 어떤 목사들은 신도라는 거울 앞에서, 두 배가 아니라 신만큼이나 거대해진 ..

오늘의 문장 2020.09.07

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 (2020년 8월 26일)

'칼럼'이 무엇이냐? 어떻게 쓴 칼럼이 좋은 칼럼이냐? 누군가 위와 같이 묻는다면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라 하겠습니다. 소위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자기검열 속에서 허우적대는 오늘, 발등 대신 '구두의 등을 긁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모처럼 칼럼다운 칼럼을 읽었습니다. 장대익 교수에게 감사합니다. [장대익 칼럼]한국 개신교의 유통기한은 남아있을까?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의 글 모음 - 경향신문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news.khan.co.kr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의 저자가 무심히 던진 이 돌직구는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 집단들 때문에 국가적 대..

오늘의 문장 2020.08.26

글을 쓴다는 것 (2020년 8월 6일)

청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노트를 펼치니 지난 4월 29일에 적어둔 문장이 보입니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집 의 서문에 있는 문장입니다. “... 위대한 시인에겐 사소하거나 시시한 것이 없다. 하찮아 보이던 것도 그가 숨을 불어넣으면 우주의 장엄함과 생명력으로 팽창하리니... ...The greatest poet hardly knows pettiness or triviality. If he breathes into any thing that was before thought small it dilates with the grandeur and life of the universe...” 꼭 ‘위대한 시인’이 아니어도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

오늘의 문장 2020.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