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845

수선화, 그리고 외로움 (2021년 3월 11일)

미세먼지 가득한 거리에서도 꽃들은 별처럼 빛납니다. 갖가지 색깔의 꽃들 중에도 목이 길고 노란 수선화가 유독 눈길을 끕니다. 꽃말은 '자기애'.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외롭겠지요. 수선화를 보면 영국의 낭만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시 '나는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았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시의 4연 중에서 첫 연, 그 중에서도 첫 문장을 가장 좋아합니다. 삶도 죽음도 구름 같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

오늘의 문장 2021.03.11

나의 예일대학 (2021년 3월 7일)

상황에 따라 생각나는 친구가 다르듯 기분에 따라 다른 책을 펼치게 됩니다. 제법 따끈한 봄볕 속을 걸은 후라 바다 생각이 난 걸까요? 이 눈에 들어옵니다. 166쪽 중간의 한 문단이 미소를 자아냄과 둥시에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예일대학은 무엇인가?' "...만일 나 가운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장점이 있다고 하면 또 내가 정상적으로 야망을 품고 있는, 매우 작기는 하지만 고귀한 침묵의 세계에 있어서 어떤 명성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또 만일 앞으로 대체적으로 사람으로 했어야 할 것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임종시에 유언집행인, 아니 채무자가 나의 책상 속에서 어떤 귀중한 원고를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여기서 미리 이 모든 영광이 포경의 덕택임을 밝혀두겠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

오늘의 문장 2021.03.07

노년일기 70: 마이너스의 어려움 (2021년 1월 31일)

호아... 2021년의 첫달도 오늘로 끝이 납니다. 한달 동안 제 안팎에서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에는 '임대'가 붙은 상점이 많아졌고 제 마음에선 어떤 이름들이 의미를 잃거나 사라졌으며 자꾸 눈과 비가 내려 지상의 낯을 씻었습니다. 새 달력을 달고 먹고사는 일에 매진하느라 새로운 생각을 하는 시간이 짧았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은 죽은 날과 같으니 이제라도 생生에 숨을 불어 넣어야겠습니다. 책꽂이에서 이라는 책을 뽑아 목차를 훑어봅니다. 수학 얘기입니다. 처음 치른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학은 0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 잘된 일이지만 당시에는 실패가 부끄러웠습니다.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수학에서 0점을 맞은 것이었고, 0점 맞은 것보다 ..

오늘의 문장 2021.01.31

심장을 씻고 싶어 (2021년 1월 14일)

어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고 말을 하고 눈 녹은 길을 걷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았습니다.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으려 하는 건 가끔 있는 일입니다. 한의사이신 황 선생님은 제 심장이 '태업'을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심장에 녹이 슬었거나 때가 낀 거라고 생각합니다. 볼 필요가 없는 것들을 보고 들을 필요가 없는 소리를 듣고 갈 필요가 없는 곳들을 다니며 마음 쓸 필요가 없는 일들에 마음을 쓰는 바람에 녹이 슬고 때가 낀 것이지요. 가슴에 문이 있다면 그 문을 열고 서랍 속 물건을 꺼내듯 심장을 꺼내어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싶습니다. 언제였던가, 다이 호우잉 (戴厚英)의 소설 를 보며 깊이 감동하고 아파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이 호우잉은 그새 ..

오늘의 문장 2021.01.14

겨울나무와 딜런 토마스 (2020년 12월 22일)

겨울이 깊어지며 대부분의 식물들은 가지와 마른 잎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저 죽은 듯 보이는 갈색 가지 속으로 푸른 피가 흐르고 있을 겁니다. 봄에 맞춰 꽃을 피우려는 뜨거운 결의가 숨죽인 채 푸른 피를 위로 몰아댈 겁니다. 그러니 앙상한 겨울나무는 오히려 보는 이의 피를 덥히고 무성한 여름나무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겠지요. 사람의 시간도 식물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이 살아갈 가을과 겨울 같은 나날이 안쓰럽지만, 주름투성이 얼굴들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으니 담담합니다. 1914년 웨일즈에서 태어나 1953년에 죽은 딜런 토마스 (Dylan Marlais Thomas)는 겨우 39년을 살았지만 알아야 할 것을 거의 다 알았던 것 같습니다. 대개의 천재들처럼. 아래에 그의 시 ..

오늘의 문장 2020.12.22

수능, 그리고 엄마들의 문제점 (2020년 12월 3일)

오늘 전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실시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대학진학률이 높은 나라인 만큼 수능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21세기의 대학은 20세기의 대학과 다릅니다. 20세기에는 대학 교육이 곧 사회에서의 성취, 즉 교양, 취업, 사회적 인정 등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무교양자와 실업자가 차고 넘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대학을 나온 사람 못지않은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대학 졸업자보다 큰 성취를 이루는 일도 많습니다. 어쩌면 지금 대학에 가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지 모릅니다.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들, 즉 20세기 사람들의 두려움이지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알려 하지 않고 걱정만 합니다. 부모와..

오늘의 문장 2020.12.03

작은 노트 속의 단테 (2020년 11월 20일)

작은 노트에 쓰인 단테의 신곡 (The Divine Comedy), 지난 10월 3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기억이 어럼풋합니다. 겨우 20일 전인데... 정신차리자, 지혜로워지기 전에 늙지 말자 다짐합니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의 54쪽과 55족에 있는 문장들입니다. 54쪽 One has to fear only the things which have The power of hurting others; for the rest, They do not matter, they are not to be feared.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남들에게 상처줄 수 있는 것들, 그 나머지는 상관없네,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 55쪽 Why do you let such cowardice sleep..

오늘의 문장 2020.11.20

에스페란토, 그리고 한글 (2020년 10월 27일)

아주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접하고 그것을 쓴 사람에게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그런 감사를 느꼈습니다. 아래의 글 때문입니다. 저는 을 매우 좋아했으나 작가 홍명희의 호 '벽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서의동 논설위원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여적]‘평화어’ 한글 서의동 논설위원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는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의 작가 홍명희는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인’이라는 뜻을 담은 ‘벽초(碧初)’를 호로 했다. 청록색은 에스페란토의 상징색이다. 벽초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지면에 고정란을 만들어 논객들의 글을 에스페란토로 실었다. 1920년 창간된 문학동인지 ‘폐허’ 표지에는 한자 ‘廢墟’와 에스페란토 ‘La Ruino’가 나란히 쓰였다..

오늘의 문장 2020.10.27

칼 폴라니의 월급 사용법(2020년 10월 21일)

거의 매일 밥벌이 현장에서 과로로,혹은 과로로 인한 절망으로 야기된 죽음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이고 인류학자이며 철학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1886년에 태어나 1964년 캐나다에서 숨진 폴라니가 1944년에 세계에 선물한 죽비 을 소환하며,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처참하게 부정해버리는 시장 자본주의의 더욱 포괄적인 인간 파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https://www.ecommons.or.kr/series/Review/post/27 인용) 오늘 경향신문에도 이중근 논설실장이 폴라니를 소환한 글이 실..

오늘의 문장 2020.10.21

기형도의 '10월' (2020년 10월 8일)

10월이 오면 생각 나는 시가 두 편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월'과,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10월'입니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시적(詩的)인 10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서 발견한 기형도 시인의 시 아래에 옮겨둡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10월 - 기형도 illustpoet ・ 2019. 10. 10. 20:18 URL 복사 이웃추가 종이에 연필 ​ ​ ​ ​ ​ ​ ​ ​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오늘의 문장 2020.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