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861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눈먼 소년 (2023년 5월 24일)

2011년 4월 9일에 이 블로그에 썼던 글을 우연히 다시 읽었습니다. 예산에서 사과를 키우시던 김광호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선생님이 연세 드시며 사과 농원을 그만두시면서 제가 사과 향기 맡는 일과 선생님과 연락하는 일이 줄었지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주한 미국대사관 도서관장으로 일하신 후 은퇴하셨고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글들 중엔 영어로 된 것이 많았는데, 그때 받은 영어 원문과 제가 축약 번역한 것을 함께 게재한 것입니다. 4425일 만에 다시 만난 글, 선생님을 뵈온 것처럼 반가워 여기 다시 옮겨둡니다. 선생님, 안녕하시온지요? 눈 먼 소년 하나가 건물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저는 맹인입니다. 부디 도와주셔요"라고 쓰인 피켓이 있고 발치엔 모자가 놓여 있었..

오늘의 문장 2023.05.24

우린 '사사받지' 않는다 (2023년 5월 23일)

글의 제목 옆 괄호 속에 '5월 23일'이라고 쓰는데 이날이 무슨 날이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날입니다. 양심이 욕심보다 컸던 그는 저세상으로 갔고 그 같지 않은 사람들은 흰머리로 혹은 검게 물들인 머리로 뉴스 안팎을 총총댑니다. 우리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반면교사는 넘쳐도 교사는 드물고 스승은 더욱 드뭅니다.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받음을 뜻하는 '사사(師事)하다'가 '사사받다'로 잘못 쓰이는 일이 흔한 이유도 바로 이런 세태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말 산책 ‘사사’는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다 엄민용 기자 '선생(先生)’은 보통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인다.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

오늘의 문장 2023.05.23

참으로 술맛이란 (2023년 4월 19일)

술은 이길 수 없는 적과 같은데, 이기지 못할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은데, 그런데도 가끔 술을 마십니다. 체질과 체력 모두 음주 자격 미달이니 '부어라 마셔라'는 꿈도 꾸지 못하고 기껏해야 입술이나 목 입구를 적실 뿐이지만, 뻔뻔한 자들, 용서할 수 없는 자들, 억울한 사람들이 술잔을 들게 합니다. 100년 전 현진건이 에서 주장한 대로 '이 사회란 것'이 술을 권하는 겁니다. 억울하기로 하면 다산 정약용 (1762-1836)만한 이도 드물 텐데... 그는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이 입술만 적셨을까요? 아니면 술맛은 포기하고 한 잔 또 한 잔 기울였을까요?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

오늘의 문장 2023.04.19

배움을 방해하는 지식 (2023년 4월 14일)

지식은 기억하는 것, 즉 과거의 산물입니다. 가끔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자꾸 퇴행하는 것도 살아오며 쌓은 지식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인도에서 태어나 세계 시민으로 살다 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 1895-1986)의 책에서 비슷한 생각을 발견했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저의 나쁜 기억력에 감사하면서... 말없음표는 문장의 생략을 뜻합니다. 90쪽: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지 않는 과정입니다. 나는 지식을 쌓아놓았습니다. 자전거 타는 법, 말하는 법 같은 모든 것을.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축적한 지식은 어떤 것이든 더 많이 배우는 걸 방해할 뿐이지요. '나'는 살아 있는 것..

오늘의 문장 2023.04.14

코끼리 발 앞의 개미 (2023년 4월 7일)

요즘 베란다에 나가면 소리 없는 소리, 생명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꽃과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내는 모습이 신나게 일하는 일꾼들 같습니다. 꽃마다 잎마다 눈을 주며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가' 경탄합니다. 봄은 참 소란하고 아름다운 침묵의 계절입니다. 참으로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양은 모양이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송혁기의 책상물림 없음과 있음의 역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자신의 집에 ‘오무헌(五無軒)’이라 써 붙인 이가 있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다섯 가지 중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다섯 가지를 하늘에서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실마리로 삼아 확충해 감으로써 본래의 바름을 회..

오늘의 문장 2023.04.07

폴 고갱이 받은 거절 편지 (2023년 3월 23일)

이라는 제목의 책 63쪽을 읽다가 '거절의 미학'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타히티 섬에서 그린 그림이 파리에서 좋은 평을 받지 못하자 고갱 (1848-1903)은 전시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는 저명한 스웨덴 작가 오거스트 스트린베리 (August Strindberg: 1849-1912)에게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스트린베리는 정중한 편지를 보내 거절합니다. 아래는 그 편지의 일부입니다. 오랫동안 소설 출간을 시도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 저는 고갱이 참 부럽습니다. 고갱과 저를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저도 스트린베리의 편지와 같은 거절 편지를 받아보고 싶습니다. 고갱은 스트린베리의 편지를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자리에 게재하고, 몇 년 후 성명서이자 ..

오늘의 문장 2023.03.23

완벽한 인간을 위한 자연의 시도 (2023년 3월 6일)

오래전 읽은 책이 문득 찾아와 영 떠나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하는 수 없이 다시 읽어야 합니다. 수십 년만에 미국 작가 손턴 와일더 (Thornton Wilder: 1897-1975)의 를 읽고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대학 축제 때 연극 '우리 읍내'를 공연하는 학교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3막으로 이루어진 이 희곡은 그로버스 코너즈 (Grover's Corners)'라는 가상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읽은 2막의 문장 몇 개를 아래에 옮겨둡니다. 말없음표는 단어들이 생략됐음을 뜻합니다. "... every child born into the world is nature'..

오늘의 문장 2023.03.06

2월이 28일인 이유 (2023년 2월 14일)

어린 시절 저희 집 살림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신문을 세 가지나 구독하시니 어머니가 둘은 끊고 하나만 보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답니다. 아버지는 하루에 한 신문에서 한 가지만 배워도 한 달 신문값은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그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신문을 끊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인터넷 시대가 되었으니 종이 신문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여전히 신문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선 포털사이트가 선정한 기사를 보거나 관심 있는 주제만 찾아 보게 되지만, 신문은 세상의 소식과 의견을 두루 보여주고 선정적 정보들이 주류인 인터넷과 달리 변치 않는 지식도 제공하니까요. 우리말 산책 집권자 이기심에 무너진 달력의 원칙 엄민용 기자..

오늘의 문장 2023.02.14

책상 위의 고양이 (2023년 1월 30일)

작년 가을쯤 고양이 한 마리가 제 책상 위 스탠드 아래에 자리 잡았습니다. 부드러운 흰 헝겊 피부, 검은 머리에 붙인 분홍 리본이 어여쁘지만 큰 눈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제 게으름을 감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 첫 달이 끝나가는 오늘에야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엘리엇으로 지었습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영국인으로 죽은 T.S. 엘리엇의 시 '고양이 이름 짓기 (The Naming of Cats)' 때문입니다. 영문까지 쓰려니 너무 길어 대충 번역해 올려둡니다. 고양이 이름 짓기 고양이 이름 짓기는 어려운 일이야 쉬는 날 재미로 할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고양이에겐 세 개의 이름이 필요해 우선 가족..

오늘의 문장 2023.01.30

<월든>이 하는 말 (2022년 9월 15일)

어느새 9월의 한가운데입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 사유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8월 말 송파위례도서관 인문학 열전 수업 덕에 적어두었던 의 문장들 소개합니다. 아래의 문장들은 모두 1장 경제 (Economy)에 나옵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의 생략을 뜻합니다. “Age is no better, hardly so well, qualified for an instructor as youth, for it has not profited so much as it has lost.” “나이가 많다는 게 젊음보다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기 때문이다.” “Most of the luxuries, and many of the so ca..

오늘의 문장 202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