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786

무소의 뿔처럼 (2021년 5월 29일)

5월의 끝에 서서 한 달을 돌아보니 사랑 덕에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기적처럼 해가 뜨고 비가 내리고 구름이 흘러갔습니다. 나무들은 쑥쑥 자라고 꽃들은 힘들여 꽃을 피웠습니다. 과분한 사랑을 주신 분들, 특히 커피와 보약으로 영육을 돌봐준 두 수양딸에게 감사하며 이 구절 함께 읽고 싶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법정, , 샘터

동행 2021.05.29

'바보 노무현' 생각 (2021년 5월 23일)

다시 그날이 왔습니다. '바보 노무현'이 세상을 등지고 저 세상으로 날아간 날,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그를 생각합니다. 겨우 악수 한 번 나눈 것뿐인데... 그 두툼한 온기가 여러 십년 제게 머물며 그와의 사별을 슬퍼하게 합니다. 헛똑똑이들로 시끄러운 세상에서 '바보'를 그리워하는 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저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바보이니까요 [정동칼럼]‘바보’는 어디 있는가 천정환 저자·성균관대 교수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일을 맞으며 그 유서를 읽어본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

동행 2021.05.23

이삿날 (2021년 5월 21일)

오늘은 친구 자매가 이사하는 날입니다. 어젯밤부터 뿌린 비가 새벽에도 계속되기에 이제 그만 비를 그쳐 주소서... 기도했습니다. 새 집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비는 고맙지만 이삿짐을 적시는 비는 반갑지 않으니까요.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동네에 정착할 때는 힘이 들지만, 사람은 '도전과 반응'을 통해 깊어지고 넓어진다니 이사의 피로와 적응의 힘겨움도 친구들의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되겠지요. 혜은씨, 혜선씨, 이사를 축하합니다. 묵은 집에서 풀지 못한 숙제가 있으면 새 집에서 다 푸시고, 새 마음으로 각성과 발전 이루시고, 좋은 이웃을 만나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동행 2021.05.21

광주의 입맞춤 (2021년 5월 18일)

죽은 친구 중에 광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광주에서 살거나 자주 드나든 것도 아닌데 광주를 생각하면 슬프고 괴롭습니다. 생각이 그대로 고통이 되어 몸을 주저앉히니 가능하면 생각을 하지 말자 하지만 5월, 특히 5월 17일부터는 광주를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늘 깊은 슬픔과 거대한 분노로 이어집니다. 광주의 의거와 무수한 희생자들을 기리며 광주가 낳은 시인의 시를 읽습니다. 이성부(1942-2012) 선배님, 어디쯤에 계신가요, 그곳은 이곳보다 나은가요? 자연 한줌 흙을 쥐고 처음인 듯 들여다본다. 흙은 마지막 남은 틀려버린 일을 끝내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냄새를 낸다. 썩음의 목마른 소리를, 무너진 아름다움을 들내어 보여준다. 흙은 또 금방 생활을 토해낼 것 같은 창백한..

동행 2021.05.18

매실이 익겠구나, 비! (2021년 5월 15일)

새벽녘 잠시 이슬 같은 비가 손등에 내려앉더니 벌써 그쳤습니다. 내일은 종일 비가 온다니 목마른 매실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실을 기다립니다. 아래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그림과 시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김수자 씨의 블로그 '시시한 그림일기'로 연결됩니다. 맨 아래 글은 김수자 씨의 글입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서우(暑雨) - 고영민 종이에 채색 서우(暑雨) - 고영민 매실이 얼마나 익었나 우두커니 방에 앉아 비의 이름을 짓네 매실이 익는 비 매실을 보내는 비 떨어져 온종일 한쪽 볼을 바닥에 기대고 있노라면 볼이 물러지고 녹아, 썩어 없어지는 올해도 나무는 들고 있던 꽃을 놓치고 애지중지 열매를 또 놓치고 시큼달큼 이 비는 언제나 그칠까 매실이 가고 없는 가지 끝 허공..

동행 2021.05.15

바람, '백세청풍' (2021년 5월 9일)

어제 낮과 밤을 뿌옇게 지웠던 황사가 오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비사막의 모래를 실어온 것도 바람, 시야를 다시 사진 속 풍경으로 되돌린 것도 바람, 새삼 바람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때론 스승이고 때론 친구인 책은 가끔 저를 놀래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빛 도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 후 바람의 위대함에 감탄하며 펼친 책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만난 겁니다. 그 책은 존경하는 문창재 선배님이 쓰신 입니다. 무심코 펼친 180쪽에 '백세청풍'이 있었습니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이 구절의 '따스한 손길'은 14대 심수관을 뜻합니다. 아시다시피 심수관(沈壽官..

동행 2021.05.09

비 냄새, 페트리코 (2021년 5월 7일)

살아 있어서 좋은 점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묘비나 지방(紙榜)의 망자 이름 앞에 '학생 學生'이 쓰이는 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배움을 그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배울 기회가 있다는 것, 이 기회에 감사합니다. 어젠 신문에서 영어 단어 하나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임의진 목사님이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임의진의 시골편지'에서 '페트리코 (petrichor)'라는 단어를 처음 본 것입니다. '영어로 밥 먹고 산 지 한참인데 이제야 이 단어를 만나다니!' 하는 부끄러움도 컸지만, 모르던 단어를 알게 된 기쁨이 더 컸습니다. 게다가 그 단어는 제가 라테보다 좋아하는 '비 냄새'를 뜻하니까요. 임 목사님의 글에도 나오지만, 'petrichor'는 '바위'와 '돌'을 뜻하..

동행 2021.05.07

묘비명 (2021년 5월 2일)

한때는 죽는 사람 대개가 묘에 묻혔습니다. 묘가 있으면 묘비가 있고 묘비명도 있었습니다. 묘비명 중엔 망자가 살아서 써둔 말도 있고 남은 사람들이 쓴 말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납골당이 묘를 대신하게 되면서 묘비도 묘비명도 현저히 줄었습니다. 묘비명이 사라지는 건 안타깝습니다. 묘비명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 남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나 당부 같은 말이니까요. 5월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님의 묘비명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모두와 함께 나눔'을 뜻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삼가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여적]추기경의 묘비명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고(故) 정진석 추기경 선종 나흘째인 30일..

동행 2021.05.02

세월호 참사 7주기 (2021년 4월 15일)

내일은 세월호 참사로 적어도 304명이 불귀의 객이 된 지 7년이 되는 날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그 비극적 사건의 여파로 박근혜 정부도 침몰했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제가 문재인 정부에 바란 것은 오직 하나, 구할 수 있었던 세월호의 승객들을 왜 구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내일 오후 4시 16분부터 1분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일대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이렌이 울린다고 합니다. 안산시는 사이렌이 울릴 때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에 동참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는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과 4·16생명안전공원 선포식이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

동행 2021.04.15

순수한 분노 (2021년 4월 13일)

서울시장이 바뀌고 나니 시장의 행보가 매일 인구에 회자되고, 선거에서 패한 더불어민주당과 선거에서 이긴 국민의힘의 내분이 언론을 장식합니다. 그러나 지난 7일의 보궐선거엔 승자가 없습니다. 국민의힘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고 하나 그 '승리'는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라 여당의 실패로 얻은 어부지리에 불과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21년째, 혁명적 시대의 변화 속에서 경험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경륜이 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새 사람들이 20세기적 사고에 길든 사람들을 대체해야 합니다. 경향신문 문화부의 백승찬 차장이 쓴 글을 읽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두 편의 글이 떠오릅니다. 빅토르 위고의 과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 차장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본 후에 신..

동행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