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죽는 사람 대개가 묘에 묻혔습니다.
묘가 있으면 묘비가 있고 묘비명도 있었습니다.
묘비명 중엔 망자가 살아서 써둔 말도 있고
남은 사람들이 쓴 말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납골당이 묘를 대신하게 되면서
묘비도 묘비명도 현저히 줄었습니다.
묘비명이 사라지는 건 안타깝습니다.
묘비명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
남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나 당부 같은 말이니까요.
5월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님의 묘비명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모두와 함께 나눔'을 뜻하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삼가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여적]추기경의 묘비명
도재기 논설위원 jaekee@kyunghyang.com
고(故) 정진석 추기경 선종 나흘째인 3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살아 있음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어느 곳에선 누군가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죽어간다. 그렇게 인류 역사는 이어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여느 동물과 달리 죽은 자를 기억하며 애써 기린다. 수만년 전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그랬다. 추모 행위야말로 인류 문명의 시작과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은 그의 삶이 남긴 가치와 의미, 정신적 유산을 되새기는 일이다. 그 되새김질로 산 자는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이어간다. 고인의 삶이 산 자들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이다.
묘비명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준다. 고인의 인생이 짧고 간단한 한 문장, 단어로 응축된 게 묘비명이다. 세상에 남긴 그 마지막 말은 산 자들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잘 알려진 묘비명은 많다. ‘오래 버티고 살다보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대표적이다. 시인 천상병 묘비에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는 구절의 시 ‘귀천’이, 방정환의 묘비엔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의 ‘童心如仙(동심여선)’이 적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명은 ‘대통령 노무현’이지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란 어록도 따로 새겨져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는 사목 표어이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좋아한 성경 구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이 없어라’가 추모객을 맞이한다.
지난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묘비명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으로 정해졌다. 생전 사제로서의 삶을 상징하는 그의 사목 표어이기도 하다. 1일 장례미사 이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묻히는 정 추기경의 삼나무 관에도 사목표어에서 묘비명이 된 ' 옴니버스 옴니아'가 쓰인 생전의 문장(紋章)이 새겨진다.
고인은 생전에 ‘옴니버스 옴니아’를 “모두와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고인은 장기와 가진 것 모든 것을 내주고 떠났다. ‘정진석추기경선교장학회’(가칭)도 조만간 발족한다.
나눔과 배려보다 독식과 배제가 판을 치고, 사람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시대다. 정 추기경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곱씹고 되새겨볼 때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302032005&code=990201#csidx084d3819b2f0c689b06c4c19d233b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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