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바람, '백세청풍' (2021년 5월 9일)

divicom 2021. 5. 9. 08:14

어제 낮과 밤을 뿌옇게 지웠던 황사가 오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고비사막의 모래를 실어온 것도 바람, 

시야를 다시 사진 속 풍경으로 되돌린 것도 바람,

새삼 바람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때론 스승이고 때론 친구인 책은 가끔 저를 놀래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꼭꼭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빛 도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 후 바람의 위대함에 감탄하며

펼친 책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만난 겁니다.

 

그 책은 존경하는 문창재 선배님이 쓰신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입니다.

무심코 펼친 180쪽에 '백세청풍'이 있었습니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이 구절의 '따스한 손길'은 14대 심수관을 뜻합니다.

아시다시피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심당길(沈當吉)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심씨 문중의 후손들이 전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에 따라

각자의 본명 대신 심수관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청송 심씨인 심당길은 1598년 12월,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남원 근교에서 피랍돼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훗날 사쓰마 도기(薩摩燒)를 개창했다고 합니다. 

1873년 12대 후손 심수관이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 쌍을 출품해

사쓰마 도기가 서구에 알려졌고, 14대 심수관은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遠太郞)가 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문창재 선배님이 만난 분은 바로 이 14대 심수관으로, 본명은 오사코 게이사치(大迫惠吉).

1964년 14대 심수관이 돼 심수관 가를 이끌다가 2019년 6월에 별세했습니다.

현재는 그의 장남인 가즈데루(一輝)씨가 15대 심수관으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백세청풍'은 '영원한 맑은 바람'을 뜻하는데, 문 선배님이 심수관 가에서 보신

글씨는 송나라 학자 주자(朱子: 주희)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이 글씨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50233

 

세상은 날로 탁하여 과연 '백세청풍' 같은 것이 있는지, 있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가지만, 대개 중요한 것들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겐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의' '천복' '사필귀정' '백세청풍'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다를 겁니다.

전 세계에 '백세청풍'을 믿는 사람이 백여 명뿐이라 해도,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이 '백세청풍'의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