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65

노년일기 112: 그 집 앞 (2022년 3월 16일)

오래 전 어떤 집에 사는 이를 보고 싶어 그 집 앞을 서성인 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 제 집 앞을 서성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시간은 그리움이 쌓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집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집에 살던 이는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집 앞을 서성이는 건 지나간 날들로의 여행이고 재회를 꿈꾸는 시간입니다. 우리 가족과 15년을 산 '꼬미'가 저 세상으로 간 지 20년이 되어가지만 저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산책길에서 개나 강아지, 고양이들을 만나면 늘 꼬미가 떠오르고 잘해 주지 못한 게 미안합니다. 요즘은 '흰둥이'네 집 앞을 서성이는 일이 잦습니다. 흰둥이는 하얀 개여서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흰둥이의 가족들은 다르게 부르겠지요. 어떤 종인지는 알 수..

나의 이야기 2022.03.16

노년일기 111: 눈물 없이 (2022년 3월 11일)

오늘은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이곳을 떠나신 지 꼭 12년. 그 12년 동안 이 나라엔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는 공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9일 치러진 20대 대통령선거 유세 도중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는 인사가 여럿이더니, 어제 오전엔 선거 결과와 관련해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던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읽다가 눈물을 흘려 브리핑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국민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을 수 있는 건, 그 눈물과 웃음이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과 웃음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에게나 해당됩니다. 성인들은 당연히 때와 장소를 가려..

나의 이야기 2022.03.11

노년일기 110: 딸기 별, 딸기 꽃 (2022년 3월 8일)

어린 시절 저희 집엔 꽃과 나무가 많았습니다. 장미나 활련화처럼 화려한 꽃이 있는가 하면 무화과처럼 조용한 나무도 있고 딸기 꽃처럼 음전하고 예쁜 꽃도 있었습니다. 딸기가 붉어지기를 기다리던 중 집에 놀러온 친구가 덜 익은 딸기를 따먹어 버려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겨울 과일이 된 딸기가 그땐 여름 초입에야 제 맛이 들었습니다. 올 초엔 딸기 한 상자가 2만 원 가까운 값에 팔렸습니다. 봄 과채인 딸기를 겨울에 먹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공적 노력을 기울였기에 저 값에 파는 걸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면, 턱없이 비쌀 땐 사지 않는 게 제 원칙입니다. 대파를 좋아하지만 한 단에 8천 원, 만원씩 할 땐 사 먹지 않았습니다. 딸기 한 상자에 2만 원을 호가할 때도 ..

나의 이야기 2022.03.08

사랑해요, 수자님 (2022년 2월 27일)

수자는 변함 없는 따스함 수자는 활짝 열린 마음 수자는 소리 없는 참을성 수자는 성실한 예술가 사랑하는 제 아우 수자가 오늘부터 무균실에 머물며 새로운 반생을 위한 신체 정지(整地) 작업에 들어갑니다. 수자가 외롭고 고통스러운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 천지신명이시여, 수자를 도와주소서... 같은 병을 앓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하소서... 아래는 제 아우 김수자가 자신의 블로그 '시시(詩詩)한 그림일기'에 올린 그림과 글입니다. 그림은 김수자가 한지에 채색으로 표현한 오규원의 시 '꽃과 꽃나무'이고, 시 아래 짧은 글은 김수자의 글입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꽃과 꽃나무 - 오규원 illustpoet ・ 2017. 4. 4. 18:02 URL 복사 이웃추가 한..

나의 이야기 2022.02.27

노년일기 108: 천재 (2022년 2월 21일)

아, 2월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넘겨 자는 일이 잦아 내일이 자꾸 짧아진 2월... 1인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3주를 낭비했습니다. 천재가 아니면 성실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천재엔 적어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재능을 일찍 꽃피운 후 서둘러 이승을 떠나는 천재들과 나이 들도록 살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천재들...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젊은 날의 성취와 영광을 잃거나 퇴색시키지 않고 영감을 주며 오래 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일찍 죽은 천재들은, 천재가 아닌 무수한 보통 사람들의 품평과 감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면에서 운이 좋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단명(短命)을 꺼리지만, 단명의 장점은 영원히 늙지 않아 노화가 수반하는 퇴행을 실연(實演)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나의 이야기 2022.02.21

노년일기 107: 주름살 지운 교수님 (2022년 2월 17일)

제 주변에는 교수가 제법 여러 명입니다. 제 오빠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교수가 있는가 하면 장사꾼보다 돈을 잘 버는 교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주름살을 지우는 교수들도 적지 않습니다. 주름살을 지우는 건 물론이고 코를 오뚝하게 세우거나 듬성듬성해진 눈썹을 짙게 만들어 무서워 보이는 교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주름을 지운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젊은 애들하고 있으려니 너무 늙어 보이면 안 되겠더라고." 단골 문방구 사장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흰머리가 참 멋있는데, (저는) 노상 손님들을 접해야 하니 할 수 없이 염색을 해야 해요." 그곳은 아주 큰 문방구이고 손님들은 대개 필요한 뭔가를 사러 오는데, 사장님의 머리 색깔이 왜 문제가 될까... 의아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젊음 강박 혹은 추구..

나의 이야기 2022.02.17

노년일기 106: 내 몸은 소인국 (2022년 2월 14일)

콕콕콕 쿡쿡쿡 싸알싸알 탕 보이지 않는 일꾼들은 보이는 일꾼들보다 성실합니다 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내 몸은 릴리퍼트 사람들보다 작은 일꾼들로 가득합니다 머리카락을 헤집어 보지만 콕콕콕 손은 보이지 않습니다 쿡쿡 싸알싸알 종아리 속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은 일꾼들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고통의 생산이 부(富)나 성장과 통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일하느라 바빠 그날이 오는 걸 끝내 알지 못하는 걸까요 고통이 막강한 무기가 되어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는 날?

나의 이야기 2022.02.14

노년일기 105: 노인과 원로 (2022년 2월 4일)

오늘은 올해의 첫 절기인 입춘(立春), 봄이 들어서는 날이지만 기온은 한낮에도 영하를 맴돌 거라 합니다. 이름은 대개 명칭일 뿐 이름이 현실과 일치하는 건 오히려 드문 일입니다. 아침 신문에서 한 '원로'의 책 광고를 보았습니다. 워낙 오래 사신 분이라 제 생애 전체가 그분 생애의 일부에 해당되고 제 친구들 중엔 그분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분은 수십 년 동안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며 사시는데 이번에 나온 책에도 그런 말씀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자가 원로인데다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유명한 출판사이니 잘 팔리겠지요. 그런데 그 소식을 접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건 왜 그럴까요? 연세가 많은 분이면 으레 '원로'라 부르는 게 우리 사회의 풍토이지만 노인이라고 다 '원로'는 아닐 ..

나의 이야기 2022.02.04

노년일기 104: 고민 (2022년 2월 2일)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그런 느낌을 받으면 그 느낌을 얘기할까 말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입이 말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아 아버지를 바꿔드리곤 "아버지, 이 사람은 멀리 하시는 게 좋겠네요"라고 말한 적도 있고, 기자 시절 제 아기를 키워 주시는 이모님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모, 이분에게 돈 빌려 주지 마세요"한 적이 있는가 하면, 녹차 마시는 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초면의 승려에게 "스님, 안경 하나 쓰시지요?" 한 적도 있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하시기에 '그냥' 그 사람은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어 멀리하시는 중이라며 "허, 너..

나의 이야기 2022.02.02

스토크 사건과 전문가의 힘 (2022년 1월 29일)

정초에 손님이 사들고 온 꽃 덕에 한 3주 집안이 환했습니다. 아름다움에 반해 이름도 묻지 않고 받아들고는 시든 후의 아름다움까지 만끽했습니다. 홀로 남은 화병이 안쓰러워 꽃집에 갔습니다. 동네의 꽃집들 중 가장 나중에 생긴 듯한 집으로 갔는데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 중이던 주인에겐 저와 동행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했으면 기다렸을 텐데 아무 말 없이 하던 말만 하기에 잠시 꽃을 구경하다 나왔습니다. 산책 삼아 100미터쯤 걷다가 다른 꽃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도 주인인 듯한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주인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금세 정말 우리를 반기는 듯한 "어서 오세요"를 들었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꽃을 보는 순..

나의 이야기 202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