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882

노년일기 118: 청둥오리처럼! (2022년 5월 11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어서일까요? 한국은 '길들이는' 나라입니다. 남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며 비슷한 목표를 좇고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야 살기도 쉽고 소위 '성공'이란 걸 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니 각기 다른 사고와 경험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집단 지성'의 효과보다는 비슷하게 살며 '집단 편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집단 우둔'을 초래하는 일이 흔합니다. 거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야성미를 풍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야성'은 '자연 그대로의 성질'을 말하는데 오늘의 한국에선 어린이들에게서조차 자연스런 천진함보다 어른스런 눈빛이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생물들 중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들이 있듯이 야성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특질입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여기..

나의 이야기 2022.05.11

노년일기 117: 4월 끝 붉은 눈 (2022년 4월 30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거짓말로 즐겁게 시작했던 4월... 붉은 눈으로 지난 한 달을 돌아봅니다. 꽃과 나무, 대지, 사람... 갈증을 느끼지 않은 존재가 하나도 없었을 한 달, 억울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날들... 나날이 중력이 가중되어 이것 저것 버렸지만 새 화분들이 들어오며 가족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무릎 꿇을 힘이 있는 날은 매일 아침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십사'고 기도했지만 기도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눈의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처음 보는 빨강이 흰자위를 물들였는데 세상의 빛깔은 여전합니다.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며 4월의..

나의 이야기 2022.04.30

노년일기 116: 이방인 (2022년 4월 28일)

매일의 습관 중에 잠만큼 신기한 게 또 있을까요? 늘 눕는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은 채 어둠을 응시하면 검은 먹물이나 연기 같은 것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부터 서서히 퍼지고, 마침내 시야 전체가 검정에 먹히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죽음 비슷한 삶, 혹은 잠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래 전 죽은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산과 산 사이를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의 끝은 언제나 각성. 이불을 걷고 일어납니다. 때로는 낮에 본 풍경들과 얼굴들이 응시를 방해합니다. 잠은 완성할 수 없는 그림으로 남고 새벽이 졸린 눈을 비빕니다. 그럴 땐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하듯 오늘 못 잔 잠은 내일 자면 됩니다. 일어나 앉은 사람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습니다. 푹..

나의 이야기 2022.04.28

노년일기 115: 낙타처럼 걷기 (2022년 4월 20일)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아직도 장애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입니다. 정신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 장애 또한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도 장애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위 건강한 신체를 가진 비장애인이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젊어서 건강했던 사람이 나이 들며 각종 장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장애인들이 출근 시간 지하철의 운행을 방해하는 시위를 벌여 비난받은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신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텐데... 참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애가 생기면 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할 ..

나의 이야기 2022.04.20

노년일기 114: 태어나지 않을 거야 (2022년 4월 8일)

고통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어떤 상태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놓여나 다시 밥을 지어 먹게 되었습니다. 원래도 먹는 일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 꾸미는 일 같은 것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심하게 앓고 나면 더더욱 생(生)의 열기란 것이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 이 소음과 현란 속으로 다시는 오지 말자' 마음먹고 먼 데 하늘을 바라봅니다. 얼마 전에 이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는 미국 시인 셸 실버스틴 (Shel Silverstein)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의 시집 에 실린 '난 부화하지 않을 거야 (I Won't Hatch)'라는 시가 그 증거입니다. I Won’t Hatch! Oh I am a chickie who lives in an egg, But I will not ha..

나의 이야기 2022.04.08

사랑은 어려워라 (2022년 4월 3일)

제 사랑의 역사는 제 인생의 역사와 같습니다. 사랑을 받고 주며 자라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사랑은 살아가는 일처럼 어렵습니다. 사랑은 모순덩어리입니다. 누구나 하지만 양과 정도, 방향이 달라 슬픔과 원망과 질투를 일으키는 일이 잦습니다. 사랑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인데다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큼에서 작음으로 흐르다 보니 큰사랑은 외롭고 작은 사랑은 허기집니다. 영국 시인 테드 휴즈 (1930-1998)의 시 '까마귀의 첫 수업'엔 '사랑'을 가르치려다 실패하고 눈물 흘리는 신이 나옵니다. 그 눈물이 때로 우리를 적십니다. 미국의 천재적 시인이며 작가였던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1932-1963)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영국 시인 테드 휴즈는 플라스의 자살 후..

나의 이야기 2022.04.03

노년일기 113: 봄비 (2022년 3월 19일)

눈물 같고 마침표 같은 비가 혹은 날고 혹은 떨어집니다. 하얗게 젖은 세상 속에서 포크레인이 작동합니다. 아, 집 하나가 사라지는 중입니다. 예술가 주인이 살았을 때는 철철이 옷을 갈아입으며 아름답던 집... 몇 해 전 그이가 죽은 후엔 버려진 아이처럼 추레하던 집... 남은 가족들 사이에 유산 싸움이 붙었다는 소문 속에 어느 날 문득 수의 차림이 되더니 오늘 빗속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자가 삼대를 못 가고 빈자가 삼대를 안 간다'더니 아름다운 집은 이대도 가지 못하는가... 무너지는 집 마당의 숱한 나무들 저 포크레인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느낄 공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마도 한참 그 집이 섰던 길 쪽으론 가지 못할 겁니다. 나무들이 섰던 자리에 또 하나 높은 건물이 지어지고, 그 집이 누구..

나의 이야기 2022.03.19

노년일기 112: 그 집 앞 (2022년 3월 16일)

오래 전 어떤 집에 사는 이를 보고 싶어 그 집 앞을 서성인 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 제 집 앞을 서성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시간은 그리움이 쌓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집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집에 살던 이는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집 앞을 서성이는 건 지나간 날들로의 여행이고 재회를 꿈꾸는 시간입니다. 우리 가족과 15년을 산 '꼬미'가 저 세상으로 간 지 20년이 되어가지만 저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산책길에서 개나 강아지, 고양이들을 만나면 늘 꼬미가 떠오르고 잘해 주지 못한 게 미안합니다. 요즘은 '흰둥이'네 집 앞을 서성이는 일이 잦습니다. 흰둥이는 하얀 개여서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흰둥이의 가족들은 다르게 부르겠지요. 어떤 종인지는 알 수..

나의 이야기 2022.03.16

노년일기 111: 눈물 없이 (2022년 3월 11일)

오늘은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이곳을 떠나신 지 꼭 12년. 그 12년 동안 이 나라엔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는 공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9일 치러진 20대 대통령선거 유세 도중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는 인사가 여럿이더니, 어제 오전엔 선거 결과와 관련해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던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를 읽다가 눈물을 흘려 브리핑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국민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을 수 있는 건, 그 눈물과 웃음이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과 웃음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에게나 해당됩니다. 성인들은 당연히 때와 장소를 가려..

나의 이야기 2022.03.11

노년일기 110: 딸기 별, 딸기 꽃 (2022년 3월 8일)

어린 시절 저희 집엔 꽃과 나무가 많았습니다. 장미나 활련화처럼 화려한 꽃이 있는가 하면 무화과처럼 조용한 나무도 있고 딸기 꽃처럼 음전하고 예쁜 꽃도 있었습니다. 딸기가 붉어지기를 기다리던 중 집에 놀러온 친구가 덜 익은 딸기를 따먹어 버려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겨울 과일이 된 딸기가 그땐 여름 초입에야 제 맛이 들었습니다. 올 초엔 딸기 한 상자가 2만 원 가까운 값에 팔렸습니다. 봄 과채인 딸기를 겨울에 먹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공적 노력을 기울였기에 저 값에 파는 걸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면, 턱없이 비쌀 땐 사지 않는 게 제 원칙입니다. 대파를 좋아하지만 한 단에 8천 원, 만원씩 할 땐 사 먹지 않았습니다. 딸기 한 상자에 2만 원을 호가할 때도 ..

나의 이야기 2022.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