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7

추석달, 천고마비, 오곡백과 (2021년 9월 22일)

어제 추석 새벽엔 비 뒤로 숨었던 달이 오늘 새벽엔 환히 가을 오는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달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마주잡고 갖가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살아가느라 애쓰는 모든 동행들을 생각하니 눈이 젖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동행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제 본 풍경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댁에 가며 본 사람들, 나무들, 길에 떨어져 구르던 푸르고 붉은 감들, 검은 개, 어머니댁에서 만난 가족들 -- 아흔 넘은 어머니부터 태어난 지 한 달을 갓 넘긴 아기까지 --,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 본 파란 하늘 흰 구름, 길가의 꽃들과 그들을 흔들던 맑은 바람,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의 눈, 과자 부스러기를 보..

오늘의 문장 2021.09.22

노년일기 89: 잠깐 (2021년 9월 19일)

어젯밤 늦게야 잠자리에 든 사람에게 아침 6시 31분은 새벽입니다. 핸드폰을 거실에 두고 안방에서 잤는데 예민한 귀가 문자 도착 알림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거실로 나가는데 아흔 넘은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건강하셔도 연세가 있으니 걱정이 되는 거지요. 전화를 여니 동영상이 뜹니다. 보고 싶지 않아 전화를 닫았다가 다시 엽니다. 옛 직장 동료가 추석을 앞두고 보낸 단체 문자입니다. 명절즈음이면 늘 이런 문자를 보냅니다. 잠이 부족한 머리가 띵 합니다. 이런 문자를 받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런 문자를 이렇게 이른 시각에 보내는 걸까? 자신이 아주 일찍 일어나 움직이다 보니 6시 반이면 누구나 자신처럼 활동 중일 거라고 생각하나?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이 일찍 ..

나의 이야기 2021.09.19

카페에서 만난 생각: 무심코 (2021년 9월 17일)

정진 님이 말했습니다 "문 열고 들어서는 것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누군가 들어서는 걸 보면서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어요. 손님을 골라 받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괴로울 줄 몰랐어요." 정진 님은 향기로운 카페의 주인입니다 카페 문을 거칠게 여는 사람은 테이블과 의자에게도 거칩니다 요란하게 떠들며 들어선 사람은 주문할 때도 시끄럽고 커피를 마실 때도 소란합니다 '한 일이 열 일'이고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 더니 무심코 하는 행동이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카페의 손님은 골라 받을 수 없겠지만 나를 이루는 요소는 골라 들이고 싶습니다 의식으로 무의식을 이겨 무심코 아름답게!

나의 이야기 2021.09.17

산 산 산 (2021년 9월 12일)

어디를 걷든 걸음은 결국 산으로 나이는 산 오를수록 보이는 것 많고 올라 보면 보이는 것 모두 측은한 산 산 산 ... - - - - - - - - - - - - - - - - - - - - - - - - - - 녹스는 나뭇잎들을 보니 산으로 간 사람들과 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밟는 곳마다 무덤인데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부처님 큰 스승님들 모두 사랑하셨겠지요 ...

나의 이야기 2021.09.12

아버지 떠나신 후 (2021년 9월 9일)

아버지, 어디 계셔요? 아버지 떠나신 후 세상은 더 시끄러워졌습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찾아와 모두의 입에 마스크를 씌웠지만 소음은 날로 커지고 듣고 싶은 음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 떠나신 날이라고 아버지 누우셨던 방문 밖 또한 시끄럽겠지요. 공기에선 기름 냄새가 나고 한참씩 보지 못했던 식솔 모두 모여 소식을 주고 받을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 저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 방문 밖에 오시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아주 자유로워지셨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제 꿈에 오셨을 때 아름다운 비단 옷 입으시고 높은 관 쓰셨던 모습 조금 전 뵈온 것처럼 생생합니다. 아버지, 못난 딸은 아버지 흉내를 내며 잘 지내고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시옵고 아버지가 그 방에 계실 때 잘..

나의 이야기 2021.09.09

질문2: 2021년 9월 6일

추운 곳의 친구에게 보낼 양말을 사러 가는 길, 인도 한쪽에 차도를 등지고 앉은 여인이 보였습니다. 여인은 남루해도 껍질 벗긴 대파는 깔끔하고 예뻤습니다. '저 대파를 사야지' 생각하는 찰나 집에 있는 대파가 떠올랐습니다. 양말부터 산 후에 생각하자고 그이를 지나쳤습니다. 십오 미터쯤 떨어진 양말 가게 옆에선 다른 여인이 직접 키운 얼갈이배추를 팔았습니다. 저 배추를 사다 국을 끓여야겠다 마음먹고 우선 양말 가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겨울 양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빈손으로 나서니 얼갈이 파는 여인과 손님 하나가 한창 대거리 중이었습니다. 제법 기다린 후에야 얼갈이 이천 원어치를 사들고 갔던 길을 되돌아 오는데 대파 여인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로 왔습니다. "저기서 뭐 팔아요? 뭐, 좋은..

동행 2021.09.06

질문1 (2021년 9월 4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아연했습니다. 기자들이 악명 높은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들이대자 그가 기자들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기자들은 '... 하십니까?' ... 하셨습니까...' 하는 식으로 존칭 보조어간까지 사용하며 깍듯하게 질문하는데 범죄자는 반말로 준엄히 꾸짖었습니다. 범죄자의 당당함과 기자들의 초라함이 딩! 머리를 쳤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전도된 시대라지만 저게 무슨 짓이지? 저 기자들은 뭐 하는 거지? 왜 저 사람에게 마이크를 대는 거지? 누가 저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는 거지? 언론은 무엇이며 기자는 누구인가... 1970, 80년대 신문기자를 할 때 늘 저를 따라다니던 질문은 2021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적 범죄자에게서 마이크를 뺏어라 김민아 논설실장 2019년 3월 뉴질랜드 ..

동행 2021.09.04

'뭉클'한 9월 (2021년 9월 1일)

9월은 폭우를 타고 왔습니다. 이 차분한 온도가 이렇게 극적인 비바람 속에 찾아오다니... 세계와 세상이 갈수록 드라마틱해지니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겠지요. 비 그친 9월 새벽 회색 하늘은 울음 끝 부운 눈처럼 안쓰럽고 아름답습니다. 눈물이 사람을 맑히우듯 빗물이 세상을 맑게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9월 한 달 동안 8월에 못한 일들 많이 하시고 뭉클한 순간들 자주 맞으시길, 그래서 자꾸 맑아지시길 빕니다. 아래는 일러스트포잇 김수자 씨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뭉클'입니다. 이사라 시인의 시 아래에 있는 글은 김수자 씨의 글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김수자 씨의 블로그 '詩詩한 그림일기'로 연결됩니다. 시 한편 그림 한장 뭉클 - 이사라 illustpoet ・ 2019. 7. 29. 23..

동행 2021.09.01

'자연인' (2021년 8월 29일)

지구별, 대한민국, 서울. 이곳에 산 지 수십 년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낯설어 이곳을 걷다 보면 늘 여행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진면목과 마주하지 못하는 여행은 허사... 제가 매일 하는 여행은 유의미한 걸까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 자연을 발견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서울 한복판에 살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그 일이 가능하다는 걸. 지리산 속이 '자연'이듯 서울 한복판도 '자연'이라는 걸. 1973년 처음 만나 꽤 오랫동안 친구가 되어주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 (Henry D. Thoreau: 1817-1862)... 오늘 문득 펼친 그의 일기에도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1856년 8월 30일자 일기에서 몇 구절 옮겨둡니다. 이 일기가 쓰인..

오늘의 문장 2021.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