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2637

빵만큼만 다양했으면 (2021년 11월 12일)

이른 아침 산책길에 동네 빵카페에 들렀습니다. 오늘만 그런 걸까요? 띄엄띄엄 앉은 손님은 모두 여자입니다. 세상에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면? 다 자란 사람만 있고 어린이는 없다면? 젊은이만 있고 노인은 없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엔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고 비슷한 것을 즐기려 합니다. 심한 경우엔 다른 생각, 다른 사람을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일도 있습니다. 인구 구성까지 단조로워지면 사람들의 사고가 더더욱 편협해질 겁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진열대의 빵만큼만이라도, 투명 냉장고의 음료만큼이라도 다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본적 예의범절은 누구나 지켜야 하지만 생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다수의 횡포와 획일화, ..

동행 2021.11.12

학생의 날 (2021년 11월 3일)

오늘은 '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출발해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광주중학생들이 내렸고, 이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조선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습니다. 조선 남학생들이 항의하며 그들과 일본 학생들이 싸움을 벌였고 그렇게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작년 오늘자 한국일보에 실린 손호철 교수의 글을 요약하면, "한국 학생운동의 기원격인 광주학생운동은 우발적인, 일회성 항일투쟁이 아니었고 5개월간 전국 320개 학교의 5만 4,000여 명이 참여한,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항일 독립투쟁이며 간도·상하이·베이징·일본·미주에까지 번져간 국제적 투쟁"이었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지금 이곳에 이르기까지 피 흘린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얼..

동행 2021.11.03

개미지옥 (2021년 10월 31일)

인류를 나누는 기준과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엔 '준비하는 자'와 '준비 없이 뛰어드는 자'도 있겠지요. 준비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최악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소치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자영업자 수가 많지만 많은 만큼 망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 주된 이유는 준비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식당 하나, 옷가게 하나가 한두 달 먼저 혹은 늦게 개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세계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해당 업주와 그의 가족에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래 생각하고 오래 준비해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망한 자영업자의 통계에 포함되는 걸 피할 수 있습니다. 여적 개미지옥 이용욱 논설위원 개미지옥은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

동행 2021.10.31

사랑 없는 지식 (2021년 10월 21일)

오래 전 애인은 책을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책 읽기처럼 재미있는 일을 즐기지 않는 게 궁금해 어느 날 그에게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반문했습니다. 왜 그리 책을 읽느냐고.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하니 그는 자신은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게 많다며, '책은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이냐 물으니 헤르만 헤세의 라고 했습니다. 불교 신자도 아닌 사람이 라니...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문고판을 빌려주어 저도 그 책을 읽었지만, 왜 그 책 하나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십년쯤 후 다시 그 책을 읽는데 참 좋았습니다. 왜 그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아니, ..

동행 2021.10.21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021년 10월 16일)

시월 한가운데에 들어선 겨울 같은 추위가 옛날을 소환합니다. 책장을 기웃거리다 전혜린 (1934-1965)의 를 집어 듭니다. 전혜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속이 싸해집니다. '이런 완벽한 순간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는 소제목에 이어지는 문장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p. 97, 전혜린, , 삼중당문고 제게도 가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오늘 동네 횡단보도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갑작스런 추위도 하늘의 아름다움을 지우진 못합니다. 아니 추위는, 아름다운 문장 아래 그어진 밑줄처럼 하늘과 녹슬고 있는 나뭇잎들을 강조합니다.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아..

오늘의 문장 2021.10.16

화천대유, 천화동인 (2021년 10월 7일)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이 회자되기 시작한 지 한참이지만 공부가 부족한 저는 아직도 이 단어들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이 단어들을 설명한 강수돌 교수의 칼럼을 아래에 옮겨둡니다. 세상읽기 화천대유? 역의 철학과 개발 자본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3000년 전 동양 고전 은 음양의 조합인 64괘를 통해 우주 만물의 근본 이치를 논한다. 점술서요, 철학서다. 천지의 일부인 인간이 ‘역(易)의 철학’을 배워 삶의 지혜를 구하라는 것! ‘역’은 곧 변화다. 천지인은 변한다. 그러니 성공에 자만해도 안 되고, 실패라 포기할 것도 없다.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지금은 금융자본주의다. 3000년 전 노예제 때의 이 여전..

동행 2021.10.07

경험, 반항. 죽음 (2021년 10월 4일)

작은 노트에서 9월 23일에 적은 일부를 만났는데 이 책의 원제가 무엇인지, 누가 번역했는지는 써놓지 않았으니 답답합니다. 원제가 무엇이든 번역자가 누구이든 원저자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분명하고, 글이 전하려는 메시지 또한 분명하니 아래에 옮겨둡니다. 말없음표는 문장이 생략되었음을 뜻합니다. 먼저 인용 구절을 쓰고 괄호 안에 제 생각을 적습니다. p. 201 경험을 통해 배울 만큼 나이를 많이 먹은 이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경험을 통해 배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조금이나마 지혜로워진다면 경험에서 배운 것을 숙고하며 실천하는 덕이겠지요.) p. 242 한 사람의 인생을 특징 짓는 것은 천성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반항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

오늘의 문장 2021.10.04

게으름에 대한 찬양 (2021년 10월 1일)

새해나 새달에 들어설 때면 대개 '더 열심히 00해야겠다'는 각오들을 다지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월은 계단을 한 번에 몇 개씩 오르듯 살았지만 시월엔 좀 게을러져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구월 끝자락에 몸살이 나서 며칠 누워 있으려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최소한 나잇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좋아하는 카페에 갔더니 테이블에 쌓인 책 중 한 권이 자꾸 말을 걸었습니다. .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버트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책입니다. 못 마시던 커피를 마시게 된 것만 해도 즐거운데 친구 같은 책을 만나 '게으름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게으름에 관한 구절은 마음에 담고, 작은 노트엔 ..

오늘의 문장 2021.10.01

선생이라는 직업 (2021년 9월 28일)

작은 노트에서 지난 8월 19일에 쓴 단상을 만났습니다. "선생처럼 위험한 직업이 있을까 조금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되풀이하며 먹고 살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이 많이, 혹은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신에게 배운 사람들은 나무처럼 자라는데 자신은 화석이나 밑둥 썩은 기둥이 되어 여전히 입을 달싹이며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는" 대학교 4학년 때 서울 모 여중으로 교생 실습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열 명이 그 중학교의 교생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중학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니었고 등록금을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이 그 학생들에게 어서 등록금을 내라고 다그칠 때면 어디로 숨고 싶었습니다. 교사들이 참관하는 수업을 하고 교장으로부터 '하..

나의 이야기 2021.09.28

친구의 생일 (2021년 9월 25일)

오늘은 친구의 생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몰라도 제게 그의 생일은 우주의 배려입니다. 저를 성장시키려는 배려이지요. 친구 덕에 사람과 사물, 세상을 보는 제 시야가 매우 좁다는 것을 알았고, 저의 재주가 얼마나 국한된 것인지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고 인연의 소중함과 덧없음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시간보다 만남 자체가 의미 있음을 알았습니다. 동행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시간동안 그와 내가 꾸준히 성장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Happy Birthday, my friend! Thank you for coming into my life. https://www.youtube.com/watc..

나의 이야기 202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