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2007년 5월 10일) 오랜만에 내리는 비, 문득 몇 해 전 부여를 적시던 비가 생각납니다. 낮은 건물들의 어깨 위에 턱을 괸 하늘이 정림사지 푸른 마당에도 동남리 낡은 골목에도 묵은 연인의 시선 같은 비를 뿌렸었지요. 501-3번지, 신 동엽 시인 댁 툇마루는 고작 팔뚝 너비, 그 끄트머리에 젖은 몸을 얹어 놓.. 자유칼럼 2009.11.17
섬진강 나룻배 (2007년 3월 29일) 광양군 다압면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그곳엔 꽉 찬 것과 텅 빈 것이 함께 있습니다. 희고 붉은 매화향에 취한 동네는 밤에도 잠들지 못하지만 길아래 섬진강은 텅 비어 한낮에도 달의 울음 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꽃 그늘마다 사람들이 일렁이니 오히려 발을 돌려 강가로 내려 갑니다. .. 자유칼럼 2009.11.16
기형도를 생각함 (2007년 3월 14일) 은행나무들은 아직 죽은 듯 조용하지만 쟈스민 가지에선 작은 새의 혀를 닮은 잎들이 솟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햇빛에 데워진 땅 위로 보일 듯 말 듯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면 세상의 나무들 혈관 속마다 푸른 피가 돌고 눈 앞이 점차 화안해지겠지요. 봄은 죽은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살.. 자유칼럼 2009.11.16
오래된 뜨락 (2007년 03월 06일 (화) 선배님과 헤어지고 일곱 시간 남짓이 흘렀습니다. 제법 온화한 햇빛이 노닐던 거리엔 서늘한 밤이 사금파리처럼 깔려 있습니다. 선배님, 혹시 깨어 계세요? 선배님과 함께 했던 두 시간 반 동안 오래된 뜨락을 거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래된” 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신다고요? 하지만 선배님, 오래.. 자유칼럼 2009.11.16
할머니 닮았다 트집 잡으시더니… [한겨레21 2008.02.01 제696호] 완경기 딸이 어머니를 인터뷰하다… 가장 슬펐을 때는 시어머니 돌아가신 때, 좋을 때는 ‘밤나’ ▣ 김흥숙 시인 길은 사람과 자동차로 어지럽지만 주홍빛 코트를 입은 어머닌 석양처럼 아름답다. 저 여인이 떡국 한 그릇으로 일흔아홉이 된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1월 셋쨋주 일요일 오후. 카페로 가는 길은 봄날 같아, 어디선가 어머니의 이름 같은 봄 매화가 “톡” 하고 열릴 것만 같다. 의 주문을 받아 어머니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적은 많았지만 ‘인터뷰’한다고 마주 앉은 건 처음이다. 어색한 한편으론 어머니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게 있지 않을까, 살짝 흥분도 된다. 너무 주관적인 대화로 흐르는 걸 막기 위해 객관적 사실 확인으로 시작했다. » 어머니는 지금도 석양처럼 아름답다. 어머니.. 나의 이야기 2009.11.02
죽을 때까지 죽지 마시라 (2008년 5월 9일) 남해에 사는 벗에게서 선물이 왔다. 아수라 같은 세상에 눈감고 앉아 “내가 미친 것이냐, 세상이 미친 것이냐” 되뇌고 있는 걸 알았는지, 선물 중에 <은둔>이 있다. 현대의 선사 33인의 삶을 얘기하는 책, 책날개에 쓴 작가의 글이 죽비 되어 굽은 어깨 위에 쏟아진다. “이 선사들에.. 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2009.11.02
젊은이의 편지 (2008년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실망하여 이민을 가고 싶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이민 수속을 밟던 때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국은 낙인, 어디에 간들 자유로워지겠는가. 의지의 낙관에 기대어 주저앉고 말았었다. 때맞춰 날아든 편지 한 통, 실망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몇 달 .. 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2009.11.02
투제체! 달라이 라마 (2008년 3월 21일)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 보기가 무섭다 싶으면 결국 앓게 된다. 혜진이와 예슬이, 네 모녀 살해 사건에 이어 티베트 사태까지, 새 잎 돋고 꽃 피어도 봄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몸을 이루는 모든 조각들이 아프다. “삶의 뿌리가 고(苦)”라는 달라이 라마의 말이 떠오른다. 고열로 지글대는 .. 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2009.11.02
오늘 저녁은 콩나물밥 (2008년 3월 7일) 사람에겐 잔인해지려는 본성과 게을러지려는 본성이 있다고 하더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첫 번째 본성의 지배를 받는가 보다. “살 쪘네요!” 듣는 사람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건넨다. 겨우내 감기를 오래 치르느라 몸이 둥글어진 탓이다. 어려서 감기에 걸리면 매운 콩나물국.. 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2009.11.02
사랑할 때와 죽을 때 (2008년 2월 22일) 죽어라 사랑하는 이, 죽은 다음에 사랑하는 이, 떠난 사랑 앞에 침묵하는 이, 떠난 자리에 앉아 통곡하는 이, 사랑이 떠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이, 입으로 슬픔을 말하며 눈으로 새 사랑을 구하는 이 …. 하여 숭례문 무너진 서울은 시끄럽다. 불을 붙인 건 ‘채 노인’이지만 불을 붙이게 .. 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2009.11.02